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4화
84화 찰리의 레스토랑 (1)
"레이첼 양? 여긴 또 어떻게......?"
"제가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친척 중에 힘 좀 있으신 분이 계신데, 마침 이번 연회에 대위님도 참석하실 예정이란 걸 듣고 같이 가게 해달라고 졸랐거든요."
레이첼은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며 씩 웃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거죠."
"허어."
레이첼은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진한 연기를 들이마셨다.
"혹시,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혹시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오늘이랑 비슷할 겁니다. 따라오시게요?"
"아뇨, 안타깝지만 내일은 제가 다른 일정이 있거든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갈 겁니다."
"그럼?"
"별건 아니고,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시간 나시면 여기에 한번 놀러 오세요."
그녀가 내게 주소가 써진 메모지를 건넸다.
"'찰리의 레스토랑'......?"
"우리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 이름이에요."
레이첼은 민망한 듯 웃으며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찰리는 저희 아버지 이름이고요."
"아, 그렇군요."
"대위님 덕분에 정직원도 되고 이래저래 고마운 게 있어서 한 번쯤은 대접을 좀 해드리고 싶었더군요. 부담가지시진 마시고, 시간 나면 한 번 오세요. 식당이 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음식 솜씨만큼은 어디에도 꿀리지 않거든요.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레이 대위! 여기 있었군!"
밖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탓일까, 나를 찾으러 중령이 직접 나타났다.
"바람 좀 쐬고 온다더니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나무라는 것 아니니까 죄송할 필요는 없네.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많아. 얼른 가자고."
"옙."
나는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레이첼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다른 손으론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마음만큼은 고맙지만, 안타깝게도 조금은 힘들 것 같다.
내일도 오늘처럼 저녁에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서 말이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
"취소라고요?"
"그래, 취소일세."
아침.
평소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오늘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뭔 일이래, 대체?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겁니까?"
"반전단체인가 뭔가 하는 떨거지들이 오늘 행사가 열리는 곳에 나타나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네. 경찰들을 동원해서 해산하려고 했는데, 불상사가 터지는 바람에 오늘 일정은 모두 캔슬일세."
"불상사라면, 어떤 일입니까?"
중령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복도에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소리를 낮춰 말했다.
"웬 계집년 하나가 연단에 올라가서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기에 강제로 끌어내리려고 했는데, 그년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머리통이 깨지면서 즉사했어. 덕분에 현장은 아주 난리야."
"허어......."
"윗분들도 행사를 예정대로 강행했다간 나중에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 오늘은 건너뛰기로 하셨네. 그대로 방에 누워서 자던가, 아니면 산책이라도 나갔다 오게. 대신,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옙."
예상도 못 했던 하루 휴가라.
하루 종일 쉴 수 있게 됐지만. 컴퓨터도, 스마트폰, TV도, 책도 없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잠자기와 라디오 청취, 이 두 개뿐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생긴 휴식 시간을 헛되이 날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어제 레이첼이 말한 그녀의 부모님이 운영한다는 식당을 이참에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
외투를 걸치고, 지갑과 호신용 권총 한 자루, 마지막으로 어제 받은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들고 밖으로 나온 지 20분.
덴마크 힐거리를 걷던 나는 킹스 칼리지 병원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쯤인데......."
메모지에는 킹스 칼리지 병원에서 앞으로 쭈욱 가면 식당이 있다고 하던데.
문제는, 주변에 널린 게 식당이라 좀처럼 구분이 쉽질 않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간판이 무슨 색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줬어도...... 어?
"여기였어?"
붉은색 배경에 하얀색 글씨로 쓰여진 '찰리의 레스토랑'.
틀림없이 내가 찾는 그곳이었다.
주변 가게들에 비해, 간판이 너무 작은데다 색이 바래서 한 번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탁자들과 벽에 걸린 몇 개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족사진과 더불어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이 인쇄된 액자도 있었다.
그럭저럭 무난한 동네 식당이라는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그건 그렇고...... 장사하는 거 맞나?
어째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구석에 있는 전등은 아예 불도 안 들어오고.
"이런, 손님이 왔구만."
조용히 가게를 둘러보고 있는데, 주방 안쪽에서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허겁지겁 나왔다.
"어? 혹시 아서 그레이 대위?"
남자는 내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군복을 입지 않았는데도 얼굴을 보고 날 알아본 것이다.
"아서 그레이 대위 아니오?"
"예, 제가 바로 아서 그레이입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건넸다.
남자는 유명인과 만나는 게 처음인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 그 말이 사실이라니. 정말로 올지 몰랐는데!"
"?"
"딸이 갑자기 '내일 아서 그레이 대위가 가게에 올지 모르니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거 아뇨. 나는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무시했는데.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갑자기 내일 유명인이 온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수? 아, 아무튼 환영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누가 유전 아니랄까 봐, 딸 못지않게 말이 무척 많았다.
아니다. 딸이 아버지를 닮아서 말이 많은 건가?
아무튼 나는 가게 주인장 '찰리 씨'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다른 자리들과 별 차이는 느낄 수 없었다)에 착석했다.
찰리 씨는 이윽고 메뉴판과 물이 든 컵을 내왔다.
"여기 메뉴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하소. 내 다 해드릴 테니."
"감사합니다...... 저어, 실례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응? 뭐든지 물어보슈."
"지금이 장사 시간 맞나요?"
"그렇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그런 것치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는...... 아, 죄송합니다."
"별수 없지. 이미 이렇게 된 지 꽤 됐수. 뭐, 예전에도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저, 저 사진 말입니다."
"응? 이거?"
"예. 가족사진인가요?"
"그렇지. 여기 이 멋쟁이가 나고, 중간에 있는 꼬맹이가 레이첼, 끝에 있는 게 내 마누라요."
"사모님께서 제법 미인이시네요. 같은 가게를 운영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나 혼자지. 마누라는 3년 전에 죽었소."
"......."
이런 젠장. 연속으로 지뢰를 밟을 줄이야.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찰리 씨는 내 실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주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메뉴판을 살폈다.
메뉴 자체는 평범했는데, 맨 끝에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콘도그.
우리나라에선 핫도그라고 부르는 놈이다.
음식 자체는 특별한 게 없지만, 미국 요리라서 영국의 식당들에선 찾기 힘들었는데.
"정하셨수? 뭘 줄까?"
"콘도그랑 콘 수프로 하겠습니다."
"콘도그랑 콘 수프? 알겠수. 좀만 기다리시구려!"
음식은 정말 빨리 나왔다.
주문한 지 3분도 되지 않아 콘도그와 콘 수프로 된 간단한 식사가 탁자에 차려졌다.
사실, 원래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아니긴 하지만.
음식의 맛은 그럭저럭 무난했다.
콘도그는 내가 아는 콘도그 맛이었고, 콘 수프는 조금 묽은 것 빼곤 평범한 맛이었다.
"어때? 입맛이 맞으시려나?"
"맛있습니다, 어르신."
차려진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들어왔다.
드디어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왔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빠, 저 왔어...... 어?"
"어?"
"대, 대위님?"
아니. 그쪽이 먼저 오라 해놓고 놀라는 건 또 뭔데.
설마 내가 진짜로 올 줄 몰랐던 건가?
"정말로 왔네요? 오늘도 행사 있다길래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행사가 취소됐어요. 덕분에 나는 오늘 하루 휴가. 호텔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한 번 와봤죠."
"그렇군요. 아, 저희 아버지 음식 솜씨는 어떤가요? 눈치 안 보고 솔직하게 얘기하셔도 돼요."
"맛있던데요, 뭘. 장사하셔도 될 것...... 참, 장사 중이셨지."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된다니까. 가게에 손님이 없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친딸 맞아?
아버지가 하는 가게 사정을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근데 냉정하게 말해서 손님이 너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이렇게나 손님이 없으면, 수익은 고사하고 적자를 면하기조차 힘들 것처럼 보이는데.
"전에도 손님들을 좀 끌어보려고 새로운 요리 개발을 시도해봤거든요. 번번이 실패로 끝났지만."
"야, 왜 전부 내 탓인 것처럼 말하냐? 너도 같이 개발했었잖아? 본인 입으로 '이건 무조건 성공한다'고 장담할 땐 언제고?"
찰리 씨도 억울한 면이 있는지 딸의 말에 열심히 반박했다.
"내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요리 안 했잖아요? 그러니까 요리가 망하지!"
"네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정확하게 만들었거든? 누가 보면 내가 레시피 무시하고 만들 줄 알겠다!"
부녀의 싸움이 점점 열전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내가 직접 진화에 나서야 했다.
"자, 자! 두 분 좀 진정하세요. 둘 다 너무 흥분하셨어."
그제야 둘은 나의 존재를 기억해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손님 앞에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지금도 신메뉴 개발은 계속하고 계신 건가요?"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 겸 찰리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머리를 긁적이던 찰리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지. 그런데 도통 결과물이 신통치가 않아."
"기껏 만들었다는 새 요리가 겨우 찐 감자에 삶은 정어리를 얹은 거니깐 그렇죠."
듣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뚝 떨어지는 요리로군.
21세기 재소자들도 그런 요리를 먹으라고 내줬다간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데.
"그럼 뭐, 너는 생각해낸 요리는 특별한 것 같냐? 겨우 피쉬 앤 칩스 위에 치즈를 얹은 게 다면서."
"아빠가 만든 괴작들보단 제가 만든 게 더 낫거든요?"
"또, 또 말대꾸하는 거 봐라, 저거.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원!"
"아빠 닮았거든요?"
이러다가 또 싸움이 날 것 같다.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어 둘의 다툼을 중재했다.
"그만, 그만. 어차피 두 분이서 서로 싸워봤자 변하는 건 없어요. 차라리 제가 알려드리는 요리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내 말을 들은 부녀는 호기심 반 의문 반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위님이요? 뭔가 색다른 요리라고 알고 있어요?"
"뭐, 많이는 아니고 조금......."
"전쟁영웅이 알려주는 요리라, 기대되는구만!"
뒤늦게서야 귀찮은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둘 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