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3화
83화 불의 잔치 (8)
내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에 뒤집어졌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사우나를 하고 나온 것처럼 몸이 상쾌했다.
호텔에서 가져다준 조식-빵과 홍차, 베이컨, 치즈, 버터-을 먹고, 뉴스를 들으면서 양치를 하려고 라디오를 켜는데, 당황한 듯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새벽, 독일이 대대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독일-소련 국경 일대에선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푸흡!!!"
나도 모르게 양칫물을 라디오에 뿜고 말았다. 다행히 라디오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나저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니.
아니, 역사에서도 독일은 소련을 공격했으니 이상할 게 없지만.
그런데 오늘은 5월 15일이잖아! 6월 22일이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말이 된다.
실제로도 독일은 5월 15일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로 삼았지만,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이라는 뻘짓으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선 그리스는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덩달아 유고슬라비아도.
즉 발칸 전선 자체가 없어졌으니, 독일이 원래 계획대로 침공한 셈이 된다.
애초에 일본이 8개월 일찍 진주만을 공격한 일을 생각하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네."
2차 세계대전의 전후를 나누는 독소전이 아닌가.
역사가에 따라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자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2차 세계대전 그 자체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게 시작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게 분명하다.
당연히 한창 독일과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는 영국에게는 더 크겠지.
아무튼 처칠은 또 바빠지겠군.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으니, 지금쯤 이에 대한 변수를 생각해내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
독일의 암호인 에니그마를 일찌감치 해독하는 데 성공한 영국 정보부는 독일군 사단들이 일제히 동부로 이동 중인 것과 히틀러가 휘하 장성들에게 소련 침공 작전 준비를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이를 두고도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어쩌면 우리의 눈을 속이기 위한 놈들의 함정일 수 있소. 자신들이 소련을 침공할 것처럼 꾸미고선, 갑자기 터키를 공격할지도 모르오. 터키 역시 소련 국경과 가깝지 않소."
"아니, 뭘 자꾸 의심하십니까? 눈에 보이는 정보 그대로를 믿으면 된다니까? 나치들은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소이다."
"그 머리가 좋지 않다는 놈들에게 우린 수에즈까지 밀렸잖소. 놈들을 우습게 봐선 곤란하오."
"갑자기 이집트 얘기가 왜 나옵니까? 거 참."
허나, 독일이 정말로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기만책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
이제 정부가 할 일은 독일의 소련 침공이 전황에 어떤 변화를 줄지에 대해서 예측하고 논의하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이게 현재 불리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신중한 논의가 필요했다.
"정말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줄이야."
"역시 지금까지의 행동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한 기만책이 아니었군."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처칠은 즉시 전쟁성으로 달려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우선 자신들이 생각하던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영국 정부의 예측 중 최악의 가정은, 독일이 전력을 휘몰아쳐 중동으로 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1. 터키를 침공하던, 아니면 동맹으로 끌어들이든 간에 터키를 발판 삼아 시리아와 이라크로 남하한다.
2. 이에 발맞춰 이집트 방면의 병력도 공세를 개시한다.
3. 영국군을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하여 괴멸시킨다.
4. 이란을 통과해 인도로 진격, 버마 방면의 일본군과 연합하여 인도를 장악한다.
5. PROFIT!
"최악의 수를 피했으니 다행이군. 그렇다고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오. 소련이 독일에 굴복하게 된다면, 미치는 파장이 어마어마할 테니."
처칠 역시 독일이 중동이 아닌 소련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긴 했지만, 본인의 말대로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혹시라도 소련이 무너지면, 소련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자원과 인력이 고스란히 독일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될 거요. 소련인들이 새 주인님 말을 고분고분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무튼 소련을 꺾은 독일은 지금보다 체력이 몇 배로 커지겠지."
전쟁 초반, 설마 무너질 리라 싶었던 프랑스도 어이없이 쓰러졌다. 소련이라고 이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역사의 교훈은 만에 하나도 계획 단계에서는 꼼꼼히 따져보라고 했다.
먼 역사였다면 이걸 무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영국이 감내하고 있는 어려움은 불과 몇 년 전에 프랑스가 독일에 어이없게 무너지고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안이했던 태도가 지금의 결과란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유럽의 강대국이 역사적으로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긴 했어도 만에 하나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양상도 그러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덩치가 커진 독일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은 없다.
처칠의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가정을 들은 참석자들은 소련의 인력과 자원을 흡수해 한층 더 강력해진 독일을 떠올리곤 몸서리쳤다.
"현재 전황은 어떻소?"
"독일과 소련 국경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일이 기습을 가하긴 했지만, 며칠 전 소련이 전군에 경계령을 내린 덕분에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놈들도 독일이 쳐들어올 거란 사실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갑자기 확 밀리거나 하는 일은 당장에 없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처칠은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수록 독일은 소련을 꺾기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럴수록 전방의 아군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 테고.
독일군과 소련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가 되면, 두 나라는 늘어난 희생으로 국력이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적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바로 그때, 위대한 영국이 뒤통수를 친다면......!
"이제야 길고 어둡기만 했던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 같소. 하하핫!"
기분이 좋아진 처칠은 호탕하게 웃으며 시가에 불을 붙였다.
부디 스탈린의 백성들이 히틀러의 졸개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쏴죽여주기를.
그렇게 하여 대영제국의 아들들이 목숨을 구하고, 독일을 지킬 기둥들이 사라지기를.
***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의 젊은 영웅, 아서 그레이를 소개합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나.
쏟아지는 환호들.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로웠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익숙하게만 느껴진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린 영웅 아서 그레이입니다."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미리 준비해둔 멘트를 날렸다.
"이거이거, 주변에 미인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 잘 안 나오는군요. 마치 꽃밭에 온 듯한 기분입니다."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제는 가벼운 농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번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편.
특히, 여성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다, 암.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한 비상 회의로 인해 처칠은 더 이상 나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미리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며 사람들 앞에 서서 채권을 사 애국할 것을 호소했다. 적당한 위트도 섞어가면서 말이지.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태도에서도 여유가 넘치고. 이 일이 아주 익숙해졌는가 보지?"
"하하하, 원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슬슬 익숙해져야죠."
"좋은 자세야. 그럼, 다음 손님들을 만나러 가자고."
"넵."
점심 때는 시장 및 국회의원들과 만나 우아하게 칼질을 하며 식사를 했다.
"그래, 나이가 올해로 몇이라고?"
"19살입니다, 시장님."
"19살에 대위라, 빨라도 너무 빠르구만. 멀미 나겠어, 이 친구야."
"이미 멀미약 먹었습니다."
"으하하하하! 이 친구,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구만!"
꺄르륵.
한편 병원에서는 얼굴에 웃음기를 조금 거두고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내가 방문한 병원은 전장에서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된 병사들과 독일군의 공습으로 부상 당한 시민들을 주로 치료하는 곳이었는데, 환자 대부분이 팔이나 다리를 잃은 중상자들이었다.
"어디서 부상 당했나요, 상병?"
나는 얼굴 한쪽에 화상을 입고, 오른팔에 깁스를 한 부상병에게 다가가 물었다.
상병이란 계급은 침대 한쪽에 놓인 군복을 보고 추측한 것이었다.
"튀니지에서 부상 당했습니다. 88의 포격에 당했거든요."
"88이라, 정말 끔찍한 놈이죠. 저도 그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상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악수를 했다.
빨리 쾌차하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양쪽 다리가 절단된 남자는 선원이었는데, 유보트의 공격으로 인해 자신이 타고 있던 배와 자신의 두 다리를 잃고 말았다.
나는 남자가 사연을 이야기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할 수 있는 게 말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허허, 대위 양반이 미안할 거 없수."
병원을 돌아다니며 환자들 한 명 한 명과 인사하고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다음날에는 런던 지하철을 타고,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다녔고, 오후에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연설(?)을 했다.
학생들은 그보다 내가 전차를 탄다는 사실과 적들을 몇 명이나 죽였냐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저녁에는 깔끔하게 다림질을 한 예비용 군복을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며 일일이 답변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달려서인지, 급속도로 피로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단 몇 분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숨 좀 돌리고 싶었다.
런던의 밤하늘은 버마의 밤하늘보다 탁하고 어두웠다.
솜사탕 뭉치 같은 구름이 달을 지나치는 광경을 구경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신사분? 실례지만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만 전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어?!"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기시감에 몸을 돌리니, 기억 속의 얼굴들 중 한 명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레이첼 양?!"
"여기서 또 만나네요, 대위 나으리.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데, 운명 아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