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0화
80화 불의 잔치 (5)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구만."
"무, 물론입니다, 각하!"
처칠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쉬를 터뜨렸다.
설마 역에 직접 총리가 마중을 나와있을 줄이야.
동행했던 소령도 이건 미처 보고받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한 나라의 수장인데 적어도 부하에게 말을 하고 움직이라고.......
"전에 만났을 땐 소위였는데, 지금은 대위로군. 시간이 빠른 건지, 아니면 자네 진급이 빠른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둘 다 맞는 말이긴 하지.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1년 만에 소위에서 대위로 진급이라, 암만 생각해도 빠르긴 빠르다.
"버마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무척 지루한 여행이었을 텐데 말이야. 힘들거나 불편하진 않았나?"
"아닙니다! 무척 편안한 여행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여행 자체는 편했다.
전쟁영웅이라고 호텔 스위트룸이나 다름없는 특등실에서 두 다리 쭉 벋고 자면서 올 수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군인은 원래 불편해도 좀 참고 편하다고 해야 해. 군대란 곳이 너무 편하면 기강이 해이해지거든."
"......."
......웃어야 하나?
농담으로 한 말 같으니 웃어야겠지......?
기억을 되짚어보니 지난번에도 비슷한 소릴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일단 웃자.
그렇게 기자들 앞에서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기계처럼 웃기를 5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처칠은 나를 차로 이끌었다.
"자, 할 얘기가 많으니 어서 가자고!"
총리가 타는 차는 확실히 달랐다.
우리가 타자마자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었는데, 미세한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고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시대를 감안하면 얼마나 고가의 차량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한편 중무장한 헌병들과 경찰들을 태운 차량들이 우리를 사방에서 호위하며 달렸고, 기자들을 태운 버스는 맨 뒤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이거 누가 보면 퍼레이드 행사인 줄 알겠다.
"깜짝 놀랐지?"
겨우 숨을 돌리던 내게 처칠이 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좀 놀랐습니다. 직접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쪽발이들을 때려잡으신 영웅께서 오신다는 데 가야지. 안 그런가? 하하핫!"
"칭찬이 과하십니다."
진짜 이유는 기자들한테 좋은 사진을 찍게 하기 위해서겠지만.
원래 이 양반, 군사작전에는 젬병을 넘어 최악이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엄청 빠삭했던 인물이다.
그토록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고도 끝내 총리직을 두 번이나 꿰찬 이유가 있다.
"그나저나 실제로도 자넬 보고 무척 놀랐네. 아직 중위일 줄 알았는데, 벌써 대위가 되어 있을 줄이야."
"상부에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그럴 자격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겸손은 무슨!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대위를 달 자격이 있어! 그동안 자네가 이룬 전과만 어마어마한데!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게."
"감사합니다, 각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듣기 좋은 말에는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설사 정치적 머리가 뛰어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말이지.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다우닝가 10번지가 아니었다.
홀이 넓은 무도회장이었는데, 무도회 대신 전시채권 홍보를 위한 연설이 열리기로 한 자리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기자들이 절반이었고, 나머지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유니언 잭이 사방에서 펄럭거리는 가운데, 척 보기에도 제법 높은 자리에 있어 보이는 양복남들부터, 애들 손을 잡고 온 주부, 기름때가 묻은 허름한 근무복을 입은 노동자와 지팡이를 짚은 노인, 아직 어린 학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한데 모아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먼저 처칠이 연단에 섰고, 나는 뒤에서 잠시 대기했다.
열차에서 오늘 일정에 관해 설명을 들었던 탓에 미리 무슨 말을 하면 되는지 어느 정도 생각해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연단에 선 처칠은 헛기침하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저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 저리 능숙하게 말을 할 수 있다니.
아무리 준비를 완벽하게 했다고 해도 막상 대중 앞에 서면 떨릴 수밖에 없는데 말이지.
처칠이 연설을 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심호흡하며 미리 준비해뒀던 말들을 되새겼다.
연설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거라 생각하니 몸이 떨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처칠의 연설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 아서 그레이 대위처럼 말입니다."
처칠이 자연스레 날 소개했다.
드디어 내가 나갈 차례다.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신 뒤,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며 밖으로 나갔다.
기자들의 플래시 섬광에 눈이 부시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악수를 했고, 나는 방금까지 처칠이 연설하는데 사용했던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댔다.
무도회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사람들의 수도 들어올 때 봤던 것보다 더 많았고.
어째 일본군과 싸울 때보다 더 떨리는구만.
"반갑습니다, 여러분. 아서 그레이 대위입니다."
나는 머리에 쓴 군모를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연설을 하는 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전히 떨리는군요.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때처럼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다행히 사람들은 내 가벼운 조크에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된다.
"방금, 총리께서 아주 뜻깊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총리 각하의 연설이 워낙 뛰어나서 넋을 놓고 듣느라 저도 그만 준비해왔던 말들을 다 까먹고 말았지 뭡니까."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곁눈질을 하니, 처칠이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괜찮은 시작이다.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리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나치의 군대는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아프리카와 중동에까지 손을 뻗치려 하고 있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은 이제 인도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상황을 쭉 집었고,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수많은 대영제국의 아들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들이 있는 한, 결코 적들은 이 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이 자리에서 맹세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적이 아닙니다. 한없이 무적에 가깝긴 하지만,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내 얘기를 주의 깊게 듣던 사람들은 내가 이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하며 목을 길게 내뺐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병사들이 입을 군복과 병사들이 먹을 음식과 병사들이 자야 할 막사는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돈, 돈으로 이루어져 있죠."
현실적인 이야기긴 하나 어떤 면에서는 속물적으로 들릴 법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앞서 감정을 고조시킬 만한 이야기를 깔아두어서 거북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가 싸우기 위해선 용기도 중요합니다만, 무기도 필요합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선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무기도 없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우리는 적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싸우기 위해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전시채권을 구매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채권을 사시면, 우리는 먹고 입고 훈련을 받으며 무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무기를 들면 적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적들과 싸우면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전시채권을 사시는 것이 곧 이 나라를 지키는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자유를 위해서 하나로 뭉칩시다!"
***
"아주 훌륭한 연설이었네, 대위!"
채권 홍보 연설이 끝나고, 차에 오르기까지 처칠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말들은 다행히 사람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처칠은 활짝 웃으며 목표 금액까지는 금방 도달할 수 있겠다며 신을 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구만. 자네, 평소에도 말하는 연습을 하는 편인가?"
"그럴 리가요."
"그럼, 나중에 정치계에 몸담을 생각은 없나?"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각하."
"그래? 자네 정도 말솜씨라면 충분할 텐데. 요즘 의원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자들 보면 갓난아기들 앞에서도 말을 더듬을 놈들이 천지거든. 자네라면 틀림없이 거물이 될 수 있어!"
"과찬이십니다, 각하."
"과찬이란 말을 아주 입에 달고 다니는구만. 좀 거만해도 된다니까."
"아뇨, 감히 누구 앞인데 그럴 수는─."
"자, 자. 지루한 얘기는 이만하고. 열심히 말하느라 목이 마를 텐데, 한 잔 받겠나."
처칠은 내 말을 자르며 와인이 담긴 잔을 건넸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적색 와인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이다음 장소에서도 같은 말을 하게 될 텐데, 목을 미리 축여놔야 할 거야. 특별히 알코올이 덜한 놈으로 골랐으니, 부담가지지 말고 마시게."
"그,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총리가 마시는 와인답게 부드럽고 산뜻한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 연설 장소인 극장에 도착할 때까지 처칠과 나는 와인을 번갈아 가며 마셨다.
***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우닝가로 향했을 땐 벌써 저녁이었다.
관저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 종일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열심히 음식을 먹어치웠다.
고용인들이 음식을 열심히 나르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오직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했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로 나온 과일을 얹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비로소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 참석자가 집으로 돌아간 탓에, 마지막 자리에 남은 사람은 나와 처칠, 그리고 그의 비서 몇 명이 다였다.
"오늘 지원 사격하느라 고생 좀 했네. 자네 덕분에 채권이 금방 매진되겠어, 하핫!"
"아유, 아닙니다. 다 각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핫, 이 친구, 갈수록 맘에 드는구만!"
우리 둘 다 술을 제법 마신 탓에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이대로 디저트나 먹으면서 시간이 다 되면 숙소로 돌아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처칠이 무심코 던진 말에 술이 확 깼다.
"솔직히, 자네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땐, 이렇게나 성장할 줄은 몰랐네. 연대 최고의...... 그러니까 요즘 말로, 그, 폐급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