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9화
79화 불의 잔치 (4)
"도착했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소련군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운전사로부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시트에서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리무진의 회색 천장을 향해 있었다.
아직 여름인데, 이상하리만큼 춥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이 아니리라.
"총참모장 동지?"
"듣고 있네. 걱정할 필요 없어."
주코프는 옆에 놔둔 정모를 머리에 쓰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거대한 크렘린 궁전을 조용히 응시했다.
척 보기에도 화려해 보이는 이 거대한 유물은 주코프의 눈에는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거대한 용처럼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차에서 내린 주코프에게 훤칠한 키에 반듯한 용모를 소유한 소령 한 명이 다가와 절도 있게 경례했다.
주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기장 동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가시지요."
소령이 앞장서서 걷는 동안, 주코프는 젊은 소령의 뒷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소령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벌써 '시기'가 왔던 것일까?
저 동무는 얼마나 갈까? 한 달? 아니면 두 달?
길어봤자 석 달 내외겠지.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하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진다.
증발한 전임자를 대신해서 새로 들어온 이들도 일정한 주기-아닐 때도 많다-에 따라 '교체'된다.
주코프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거칠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조차 이곳에 오면 무방비 상태로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숲에 내던져진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 든다.
아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잠재적인 경쟁자이거나 호시탐탐한 기회를 노리는 맹수들일 뿐이다.
전쟁터도 이보다 더 심하진 않으리라.
***
"아, 주코프 동무. 어서 오시오. 내 기다리던 참이었소."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보드카가 든 잔을 흔들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중년의 남자가 일어서서 주코프를 맞이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기장 동지."
주코프는 조금 전에 자신을 안내한 젊은 소령처럼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 남자 앞에선 모든 행동과 발언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주코프는 되도록 오래, 느긋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이었다.
두터운 콧수염과 얼굴 가득한 마마 자국 때문에 언뜻 보면 볼품없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이 남자의 말 한마디에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이 좌지우지되었다.
제아무리 직책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탈린의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스탈린의 분노와 의심을 사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레닌과 마르크스도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증발'되었을 것이라고 주코프는 확신했다.
"그렇다고 죄송할 것까지야. 계속 서 있지 말고 좀 앉으시오. 담배 피우겠소?"
"괜찮습니다, 서기장 동지."
스탈린의 권유대로 소파에 앉은 주코프는 소파의 푹신한 감촉에 적잖이 놀랐다.
틀림없이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리라.
이런 고급품은 소련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지만.
"한창 바쁠텐데 대뜸 이리로 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내 항상 동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뿐이오."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주코프도 스탈린의 저 말이 빈말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해야 상대방이 만족해한다는 것을 알기에.
"식사는 하셨소? 바삐 오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스탈린은 주코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두 병사가 즉각 식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일단, 배를 좀 채우면서 얘기를 좀 하도록 하지. 식당으로 갑시다."
역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는 게 정답이었다.
스탈린의 전화를 받았을 때 주코프는 이제 막 식사하려던 참이었다.
역시 안 먹길 잘했군.
주코프는 오늘도 자신의 현명한 선택에 뿌듯해하며 스탈린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는 화려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코프는 스탈린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매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소련의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산해진미들이 식탁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총참모장인 주코프 본인도 소련에서 매우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편에 속했지만, 스탈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캐비어부터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등심 스테이크, 덴마크산 치즈, 얇게 저민 철갑상어 살부터 돼지 통구이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스탈린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인 돼지고기 샤슬릭도 빠지지 않았다.
식탁조차 평범한 식탁이 아니었는데, 바로 레바논에서 자란 소나무를 장인이 직접 정성 들여 깎고 조립해서 만든 고급 식탁이었다.
이 식탁을 사려면 평범한 집단농장의 구성원 전원이 1년 치 수익을 갖다 바쳐야 할 것이다.
평범한 농민들이 이렇게 사치스러운 식탁이 필요할 리 없지만, 아무튼 그만큼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스탈린과 주코프는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근데 먼저 음식에 손을 댄 이는 주코프였다.
주코프가 식욕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스탈린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식사할 때마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먼저 먹을 때까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소련 인민들의 두려움을 사는 이 남자조차 독살을 두려워했다.
주코프는 그 점이 가장 웃겼다.
맙소사,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는 남자가 겨우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다니.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이게 코미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사자가 모기를 무서워하는 것과 동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튼 주코프는 그런 스탈린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거리낌 없이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어느 누가 미쳤다고 스탈린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탄단 말인가?
스탈린이 먹는 음식은 주방장의 요리사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먼저 맛을 보고, 다시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는 감시자들이 두 번째 맛을 본다.
이런 세밀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겨우 식탁에 올라가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까 매번 걱정했다.
주코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칼로 썬 다음 포크로 살포시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흰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고, 철갑상어 살과 캐비어를 위에 올렸다.
샴페인과 와인도 제각기 다른 잔에 따라 마셨다.
샴페인은 톡 쏘는 맛이 일품이고 와인은 부드럽고 달아서 혀가 사르르 녹는 듯했다.
그제야 안심한 스탈린은 자신도 눈앞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칼과 나이프를 들었다.
둘은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묵묵히 식사했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올 때쯤에서야 스탈린이 입을 열었다.
그는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베리야가 내게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오더군."
스탈린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주코프는 반사적으로 손을 멈추었다.
베리야라면, 영국에 심어둔 간첩 조직이 일거에 박멸당하는 바람에 체면을 크게 구기는 것은 물론, 스탈린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한동안 자숙 중일 터였다.
그런 베리야가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무슨 정보인지 알고 싶소?"
"예, 서기장 동지."
"독일이 곧 우리를 침공할 거라 하더군."
주코프는 손에서 수저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저 역시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기장 동지."
주코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주코프는 베리야와 사이가 지독하게 좋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가짜 정보를 전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간 바로 처형대로 가게 될 텐데, 어느 누가 미쳤다고 감히 스탈린을 속일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주코프는 다른 것은 몰라도 군사에 관련된 일만큼은, 설사 상대가 스탈린이라 할지라도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동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주코프의 그러한 성격을 잘 아는 스탈린은 빙긋 웃어 보였다.
작년 12월부터, 독일-소련 국경 인근에 배치되는 독일군 사단의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독일의 수상한 움직임은 소련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고, 스탈린은 직접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단지 안전을 위해 영국 공군의 공습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병력을 재배치한 것일 뿐이며, 소련이 독일을 도와 영국 압박에 동참한다면 발칸반도의 항구도시 일부를 소련에 제공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의심이 많은 스탈린은 히틀러의 해명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추측했다.
제아무리 영국의 공습으로부터 병력을 잔존시키기 위함이라지만, 그런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OKH는 롬멜이 증원을 요구했을 때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엇 때문에?
중동에서 영국을 몰아낼 계획이라면 롬멜이 증원을 요청하기도 전에 병력과 물자를 보냈어야 할 터였다.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소련과의 전쟁.
그게 아니고선 이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
"정확한 침공 날짜는 어떻게 됩니까?"
"5월 15일이오."
"즉시 전 병력에 경계령을 내리겠습니다."
이전이었다면 경계령을 빌미로 독일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반대했을 스탈린이지만, 그도 최근 NKVD가 수집해서 보고한 정보들을 보곤 마음을 바꿨다.
전쟁이 정말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신, 독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하시오. 놈들이 눈치채고 개전을 앞당기면, 그건 그거대로 골치 아픈 일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
버마에서 영국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렸다.
21세기라면 비행기 덕분에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1941년.
물론 1941년에도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남아메리카에서 오세아니아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지만,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는 데다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게다가 아무리 내가 전쟁영웅이라지만, 그래도 대위에 불과한데 일개 대위 한 명 태우겠다고 요즘 같은 시국에 비행기를 대령할 나라가 있을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배를 타고 인도양과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도착한 나는 다시 열차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꽤나 지쳐 보이는구만, 그레이 대위."
나와 동승한 공군 소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행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대비해 상부에서 호위 겸 안내역으로 붙여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 너무 티 납니까?"
"물론. 하지만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여태껏 열차-배-열차만 주구장창 탔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네. 하지만, 총리와 만난 자리에선 얼굴 관리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전쟁영웅이라고 나름 특별대접을 받아, 배를 탈 때도 1등급 객실을 배정받았고 런던으로 가는 열차에서도 침대까지 딸린 4인용 칸을 배정받았다.
포츠머스에서 런던까지 가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데 말이지.
2시간 뒤, 열차는 마침내 런던에 도착했다.
우린 특별손님이었던 탓에 다른 승객들과는 다른 통로로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 드디어 우리 영웅 나리께서 도착하셨구만!"
형이 거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