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8화
78화 불의 잔치 (3)
"그레이! 이 멋진 녀석!"
부대로 복귀하자 나를 격하게 반겨주는 무어 대위에 의해 반강제로 껴안아졌다.
그렇잖아도 전투로 인해 땀을 많이 흘려서 찝찝한데, 마흔 넘은 아저씨한테 포옹까지 당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냥 마음으로 끝내줬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응? 알기나 하냐고?"
누가 들으면 내가 또 사고를 친 줄 알겠다.
무어 대위가 한 말은 나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 전차 1개 중대 완전 괴멸에, 대대급 규모의 적군 공격을 차단하고 수백 명 사살.
누가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대성과다.
그리고 그 전과를 이뤄낸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자기 부하가 이런 전과를 냈으니, 무어 대위가 저렇게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승리 차제도 기쁘지만, 아무튼 이로써 진급에 유리하게 되었으니까.
"정말 고맙네! 이 정도 성과를 거뒀으니, 자네도 금방 대위를 달 수 있을 거야!"
"하하, 가, 감사합니─."
"감사는 무슨 감사! 내가 오히려 자네에게 고마워해야지! 자네 덕분에 나도 진급 길이 열렸으니까!"
그렇잖아도 무어 대위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진급이 10년 동안 막혀서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내 덕분에 상부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게 됐으니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아무튼 본래 임무를 수행한 중대는 곧바로 철수할 준비를 했다.
전에도 말했듯 우리 중대에 떨어진 명령은 이곳에 계속 주둔하는 게 아니라, 아군 보병사단이 퇴각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목적을 달성했으니, 미련 없이 떠날 차례다.
***
우리는 인도와 버마 국경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작지만 학교, 교회, 병원까지 있을 건 다 있는 마을이었는데,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인도로 모두 피난을 가서 마을에는 민간인이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카키색 군복을 입은 코쟁이 남정네들만이 득실거릴 뿐.
이 칙칙한 마을에서 진급식이 열렸다.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브랜슨 중령은 대령으로, 무어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게이츠 상사도 원사 계급장을 달게 되었고,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세 얼간이 애덤, 잭슨, 토마스도 상병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나 역시 진급하여 대위가 되었다. 와우.
"대령 진급 축하드립니다, 대대장님."
"허허허, 고맙네. 그건 그렇고 19살짜리 대위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구만."
말은 이렇게 해도 브랜슨 중령은 입꼬리가 귀에 걸린 상태다.
만년 중령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대령이 되었으니 오죽할까.
인사이동 시즌이 아닌데다 다른 부대에도 빈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보직과 직급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진급한 것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자리만 생기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을 테니, 괜히 조급할 필요가 없긴 하다.
"진급 축하드립니다, 중대장님."
"고맙네. 다 자네 덕분이야."
10년 동안 진급이 막혀서 진급을 포기한 상태였던 중대장도 꿈에 그리던 소령 계급장을 달게 되어 이제 여한이 없다는 얼굴이다.
그는 아직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새 계급장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울 앞에 고정된 중대장을 놔두고, 나는 게이츠 원사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입이 찢어지다 못해 귀에 걸릴 정도다.
"아이쿠, 이게 누구 십니까? 아서 그레이 대위님 아니십니까?"
내가 다가가자 게이츠 원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새 계급장 잘 어울리시네요, 원사."
"흐흐. 쭉 상사로 남을 줄 알았는데, 팔자에도 없던 원사까지 되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위님도 진급하셔서 기쁘지 않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생각해보라.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연대 최고의 폐급이었던 내가 총리한테서 직접 훈장도 받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대위 계급장을 달게 될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서 기쁘다는 생각보단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대위를 다는 것은 군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작가들이 망상으로 지어낸 만화나 라노벨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 망상으로 치부했던 일이 정작 현실에서, 그것도 내게 일어나게 될 줄이야.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일까.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기세 좋게 독일의 휴전 제안을 걷어차고 영혼의 맞다이를 선포한 대영제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
하지만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몰타부터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수에즈, 이제는 태평양까지.
하나같이 그의 노화와 탈모를 촉진하기에 충분한 소식들이었다.
하지만 처칠이 누군가.
대책 없이 일 벌이기 좋아하고.
일이 잘되면 무조건 내 덕분, 일이 망하면 무조건 남 탓에 누명 씌우기 1티어 장인이 아닌가.
얼굴에 비브라늄 장갑을 깐 그는 연이은 패전 소식과 사퇴하란 압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총리 직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도 악화한 여론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대중들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적당한 인물 한 명을 점찍어 놓았다.
아서 그레이.
프랑스, 북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이제는 버마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그가 거둔 새로운 전과는 곧바로 처칠의 귀에 닿았다.
처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를 런던으로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슬슬 새로운 이벤트로 대중들의 시선을 돌릴 때가 되었다.
더불어 최근 부진한 전시채권 판매도 독려해야 했고.
여론 전환에는 아군의 승리만큼 좋은 것도 없다.
비록 전황을 바꿀 정도의 큰 승리는 아니지만, 아무튼 승리는 승리 아닌가.
게다가 그 승리를 이끈 주인공이 자그마치 전에 훈장까지 받았던 전쟁영웅이라고?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벌써 대위까지 진급한 전쟁영웅이라.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틀림없이 대중들도 관심을 보일 것이다.
"아서 그레이야 말로 신이 내게 내려준 선물이나 다름없어."
프랑스에선 전차 한 대로 독일군의 후방을 기습해 아군 포로들을 구출하지 않나, 시나이 반도에선 이탈리아군 장성 조반니 메세를 전사시키더니 이젠 버마에선 압도적인 열세에도 적 전차중대와 보병대대를 괴멸시켰다는 보고를 받은 처칠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친구, 대체 어떤 능력을 가졌길래 가는 곳마다 이렇게 대형 사고만 치고 다니는지 모르겠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각하. 정말 대단한 친굽니다."
비서는 처칠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면서, 대형 사고를 치는 것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주인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비서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처칠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대형 사고라고 하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겠군. '기특한' 대형 사고로 정정하지."
"눈치채셨─ 아, 아닙니다."
처칠은 본심을 내뱉다 만 비서를 째릿 노려본 다음, 다시 연설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연설하기 전, 오타가 있는지, 지난번 연설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 조금 더 그럴듯한 단어로 수정할 만한 부분은 없는지 연설문을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여러 번 체크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정도면 완벽하군.
처칠은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BBC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진급식 다음 날, 사령부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전해졌다.
"런던으로 가라굽쇼?"
"그래, 런던. 총리가 다시 자넬 보고 싶어 한다는구만."
브랜슨 대령은 티스푼으로 홍차를 휘휘 저으며 내게 말했다.
바로 어제 진급한 덕분에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웃는 얼굴로 지내리란 생각이 들었다.
"전에 시나이반도에선 조반니...... 뭐시기 라는 이탈리아군 장군 한 놈을 골로 보내지 않았나. 이번에는 쪽발이들을 도륙 내 버렸고. 총리께서 아주 껌뻑 넘어가셨다고 하네."
"과찬이십니다. 앞의 사례는 어쩌다 우연이 겹친 것이고, 뒤의 사례는 적들이 그냥 약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 정도로 평가받을 일이 아닙니다."
"또, 또 겸손한 척하기는. 자네는 자부심 좀 가져도 돼.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자네처럼 뛰어난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고."
그래도 따지고 보면 우연의 연속이 겹쳐서 일어난 일일 뿐인데, 언론과 정치권에서 너무 띄어주는 것은 아닌지 조금 부담스럽다.
시간이 지난 후에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인물로 재평가될 것 같아서 어째 찝찝한데.
"아무튼 명령이니 그리 알고 있어. 이런 오지에 쭉 있는 것보다, 간만에 사회 구경 좀 하고 오면 좋잖아?"
"그건 맞습니다, 헤헤."
사실, 나를 너무 띄어주는 것 같아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 X 같은 정글을 떠나 런던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런던에는 일본군도, 사람 피 말리는 무더위도, 독거미와 지네도 없지 않은가.
거기다 런던에 가면 맛대가리 없는 짬밥과는 한동안 작별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장에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화려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는구만.
"이 새끼, 표정 좀 봐라. 벌써부터 본심이 나오는구만?"
"아, 눈치채셨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침이 10cm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브랜슨 대령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런던에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게. 사고 쳐서 애 아빠가 돼서 돌아오진 말고."
***
런던에서 처칠이 마이크 앞에 서서 준비해온 연설문을 읊고.
아서 그레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동안.
머나먼 극동에선 또 하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건이 정말로 사실인가?"
"확실하오, 동지.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진주만 공습 계획도 빼돌렸던 나요. 그때도 동지는 나를 믿지 않았잖소."
"크흠, 흠."
조르게의 말에 허가 찔린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전에 조르게가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알려왔을 때, 허황된 정보를 가져왔다며 역으로 성을 냈었다.
허나 결과는 어땠는가.
일본이 정말로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조르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 정보가 가짜라면, 나를 쏴 죽여도 좋소. 하지만 동지도 그에 맞는 판돈을 걸어야 할 거요."
"아니, 아닐세. 자네 말을 믿네."
조르게가 정색을 하고 나오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이 정보대로라면......."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소."
조르게는 굳은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처음 이 정보를 손에 넣었을 때도, 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정보는 이전의 정보와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