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6화
76화 불의 잔치 (1)
X발, X발, X발, X발!
태어나서 이토록 빨리 뛰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사격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발포하였고, 그걸 신호로 모든 병사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멋모르고 나타났던 일본군은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후퇴, 후퇴해라!"
난데없이 기습당한 일본군은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하천 건너편에는 십수 명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물러난 후에도 사격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목청껏 사격 중지를 외쳤지만, 아직도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하는 저능아들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흥분해서 제멋대로 사격을 해대는 거다. 정말이지!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으로 제지하는 수밖에 없다.
빡친 나는 그중 한 명에게로 뛰어가 뒤통수를 힘껏 걷어찼다.
"카학!"
"야 이 개새끼야! 내가 사격 중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탄약이 무한대로 있는 줄 아냐?"
내 눈빛이 워낙 서슬 퍼렜는지 옆에서 신나게 쏴 재끼던 녀석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게 뒤통수를 걷어차인 놈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입으로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탄약이 낭비된 것도 문제였지만, 적들을 보다 더 깊숙이 끌어들여 전멸을 유도할 수도 있었는데 그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적들에게 아군의 위치를 노출했다.
이러니 속이 안 터질 수가 있나.
보병들을 지휘하는 중위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부하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자, 나는 그쯤 해두기로 했다.
내가 사격하면 사격하고 멈추면 멈출 것을 일러둔 다음, 내 전차로 돌아왔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나 왔다."
녀석들도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봤는지 눈에 띄게 공손해졌다. 눈치 하나는 빠른 녀석들이다.
혹시나 싶어 공축 기관총 장탄수를 확인해 보니, 이 녀석들도 멋대로 쐈다.
하지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멋대로 쏘던 놈이 얻어터지는 걸 봤으니 이제부턴 주의하겠지.
"여기는 코뿔소. 도마뱀은 응답 바람."
-여기는 도마뱀, 무슨 일인가?
"방금 적과 교전을 벌여 보병 십여 명가량을 사살했다. 현재 적들은 물러난 상태다."
-알겠다. 현 위치에서 계속 대기하기 바란다.
"수신."
무전을 끊고 얼마 뒤, 포탄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예상하고 있던 적의 포격이었다.
***
다나카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뺨에 묻은 누군가의 피를 소매로 닦아냈다.
이런 젠장.
앞에 적이 매복하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으로 소대장을 비롯하여 14명이 죽고 7명이 총상을 입었다.
앞에 있던 병사가 방패가 되어주어 다나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오오카미 대위는 즉시 본부에 무전을 넣어 영국군의 매복 사실을 알렸다.
잠시 후,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곧 아군의 포격이 시작될 터이니, 뒤로 물러나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중대원들은 서둘러 뒤로 200여 m가량 물러섰다.
잠시 후, 정말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포병들이 운용하는 41식 산포 4문이 시차를 두고 불을 뿜었다.
독일 크루프사에서 만든 M08 산악포를 라이센스 생산한 41식 산포는 1908년부터 사용된 구식 야포였지만, 그 위력만큼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포탄이 적진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다나카는 포격의 위력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포탄이 착탄 할 때마다 나는 폭음에 중대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전원 착검!"
오오카미 대위가 착검을 명령했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일본도를 뽑아 손에 들고 있었다.
"착검!"
다나카도 30년식 총검을 꺼내 38식 소총에 끼웠다.
전원 전투 준비를 마쳤다.
"포격이 끝나는 즉시 공격한다! 모두 일어서!"
***
땅에 처박힌 포탄이 터지자,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솟아오른 야자수가 꽈드득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나무가 쓰러진 곳은 하필이면 아군 보병들의 참호 바로 위.
천만다행히도 병사들 모두 참호 바닥에 엎드려 있는 데다, 나무가 중간에 멈춘 탓에 참호의 보병들이 모두 압사당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적의 포격에 맞는 것도 아니고, 잘못했으면 운 없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나저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군에겐 야포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인지, 낙하하는 포탄의 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포격은 느닷없이 시작된 것처럼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용할 수 있는 포탄을 전부 다 쓴 거겠지.
참호에 숨어있던 보병들이 나무 사이로 몸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나는 전차 상태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이상 없음.
그렇다면 다른 전차들은?
"여기는 코뿔소 1, 각 차량들은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코뿔소 2, 이상 없음.
-코뿔소 3도 이상 없음.
-코뿔소 4, 좌측 궤도 손상. 기동은 가능하다.
좋군, 좋아.
소대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보병들도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병사 2명이 나무 파편에 등을 다쳐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고, 기관총 한 정이 손상되어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땐 경미한 수준의 피해다.
"토마스, 유탄 장전해. 곧 놈들이 올......."
"소대장님, 적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직 말도 다 못 끝냈는데 적들이 몰려왔다.
일본도를 빼든 장교를 필두로 1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반자이!"
말로만 듣던 반자이 돌격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일본군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의 무리처럼 보였다.
허나 목소리만 크면 뭐 하나.
가장 중요한 전차가 없는데.
아무리 노력과 정신력이 중요하다지만, 노력과 정신력만으로 모든 일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 교훈을 적들에게 알려줄 차례다.
"사격 개시!"
전차들이 먼저 불을 뿜고, 보병들이 잇달아 사격한다.
사격이 시작되자, 세상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던 일본군은 그대로 불의 비에 휩쓸려 버렸다.
유탄이 폭발하면서 보병들의 대열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고, 공축 기관총이 참빗처럼 적들을 쓸어넘겼다.
***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오오카미 대위는 머리에 구멍이 뚫려 고꾸라졌다.
병사들은 건너편에 있는 적들에게 닿기 위해 일제히 하천에 뛰어들었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하천에는 죽은 병사들의 시체로 작은 둑이 쌓여 있었다.
시체가 어찌나 많은지 군화가 물에 젖지 않도록 시체를 밟고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발에 걸린 돌부리가 다나카의 목숨을 구했다.
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를 향해 날아오던 총알은 뒤에 있던 병사를 맞추었다.
허파에 구멍이 뚫린 상병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
다나카는 바닥에 배를 붙인 상태로 기어서 움직였다.
서서 움직이는 병사들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는 쓰러진 동료 뒤에 숨거나 다나카처럼 땅에 엎드린 채 총알을 피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다.
그냥 학살일 뿐.
다나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고, 그중 죽을 뻔한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의 전투들은 그래도 아군이 이겼었지만, 이번 전투는 아군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공격은 누가 봐도 실패였다.
중대장은 죽었고, 살아남은 병사보다 황천으로 떠난 병사들이 더 많았다.
이제까지 목숨줄을 부여잡고 있는 인원은 겨우 스무 명 남짓.
몰살을 피하려면 지금 당장 퇴각해야 한다.
다나카는 몸을 돌려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일어서서 뛰다간 몸에 바람구멍 뚫리기 딱 좋았다.
그런데 기어서 가자니 속도가 너무 느렸다.
열심히 기어서 움직이고 있는데 한 병사가 그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
묵직한 통증에 절로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우욱!"
그의 몸을 밟고 도망치던 병사는 등과 머리에 총탄을 맞고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다나카는 쓰러진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탓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큼지막한 붉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으로 터진 안구가 죽처럼 흘러내렸다.
"우아아아!"
놀란 다나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차 하는 생각에 그는 서둘러 몸을 엎드렸지만, 몸이 지면에 닿기 직전에 한 발의 총알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성이 그쳤다.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아직 죽지 않은 부상병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 소리, 그리고 벌레 소리뿐이었다.
언뜻 봐도 100명이 넘는 일본군이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반면, 아군은 사상자가 전무했다.
일본군과의 첫 전투는 이렇게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참내, 일본 놈들도 별거 아니잖아?"
"프랑스군보다 더 쉬운 상대인 것 같은데."
긴장이 풀린 잭슨과 토마스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무어 대위에게 무전으로 전투 결과에 대해서 보고했다.
예상대로 내 보고를 받은 무어 대위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잘했네, 그레...... 코뿔소. 수고했다. 현재 남은 탄약은 어느 정도인가?
"전투 2회 분량은 남아있다."
-알겠다. 현재 보병사단의 철수가 진행 중이니, 끝나면 연락이 올 예정이다. 계속 현 위치를 사수할 수 있도록, 이상.
"수신 완료."
***
"보고드립니다, 12중대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입니다."
"뭐라고? 전멸?"
부관의 보고를 받은 나카야마 고로 대좌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지나에서 싸울 때도 1개 중대가 전멸당한 일이 없었는데.......
"중대장이라는 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자기 중대를 전멸당하도록 놔둔단 말인가?"
화가 난 나카야마 대좌가 성을 내며 말하자, 부관은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변명하듯 얘기했다.
"저...... 연대장님, 12중대의 장교들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흥, 그래도 비겁하게 혼자만 살아오진 않았군."
다른 나라 군대 같으면 중대의 모든 장교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놀라거나 비통해야 정상이지만, 일본군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겐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 전투에서 패해 돌아오는 것보다 더 명예롭고 군인의 본분을 다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광기가 만든 왜곡된 무사도의 결말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적은 보병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전차 4대가 함께 매복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보병들만으론 힘들겠군."
제아무리 상부부터 말단까지 미쳐있는 일본군이라 할지라도, 일개 보병들만으로 전차를 상대로 이기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차에는 전차로 상대해야 하는 법.
"우리도 전차를 동원하면 되지. 제9전차대대 휘하 3중대를 투입하도록."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