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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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4화
74화 악의 태양 (3)
진주만 공습이 있던 날, 영국령 홍콩 또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령 필리핀과 괌, 웨이크섬, 말레이반도도 공격당했다.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의 진주만 및 홍콩 기습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브랜슨 중령으로부터 열흘 뒤에 있을 아군의 공세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한편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부는 대혼란에 빠졌다.
'속보, 일본군 진주만 기습 공격 감행!'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일본에 선전포고!'
'일본군의 공습에 불타고 있는 홍콩...... 사실상 사면초가'
나 역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소식에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과 역사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일본이 원래 역사보다 8개월 일찍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리라곤 꿈에서조차 몰랐다.
진주만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과 이탈리아도 덩달아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미국이 유럽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었다.
4월 8일에 일어난 말레이 해전은 원 역사처럼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아군은 역사대로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순양전함 HMS 리펄스를 잃었고,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말레이 해전의 참패 소식이 전해지자 부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역사를 아는 나는 덤덤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 이들이 믿었던 왕립해군이 참패당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
"맙소사, 우리 해군이 지다니...... 그것도 저 원숭이 녀석들에게......."
"이, 이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예정되었던 공세는 취소되었고, 추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우리는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당장 전쟁터로 가지 않게 되어 기쁘긴 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늘 엄숙한 얼굴로 다녀야만 했다.
브랜슨 중령부터 애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루종일 라디오에 붙어있었다.
예상대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아군의 참패 소식뿐이었다.
-오늘, 홍콩이 함락되었습니다. 홍콩 방어군 사령관 몰트비 소장은 항복 직전 유니언 잭과 사단기를 불태우고 전 병력에 무기를 폐기할 것을 지시했으며.......
-속보입니다. 방금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일본군이 쿠알라룸푸르를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아군은 싱가포르로 퇴각하였으며, 싱가포르는 도시로 몰린 피난민들과 일본군의 공습으로 아수라장이라고 합니다.
"......."
이어지는 패전 소식에 부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됭케르크에서 입은 손실을 메꾸기 위해 동남아 주둔 병력 상당수가 중동으로 이동한 상태인지라, 일본군이 기습해왔을 때 버마와 말레이시아는 사실상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실제 역사 이상으로 빠른 속도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할 수 있었고, 아군은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홍콩이 불과 일주일 만에 함락되고, 2주 만에 싱가포르까지 밀린 것만 봐도 전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연전연승에 부대에는 여러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깽판 치는 사이, 전력을 재정비한 독일-이탈리아군이 재차 공세를 가해올 것이라는 소문부터,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정부가 곧 독일과 휴전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군대 안에 도는 소문 상당수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헛소리들이 아니겠나.
그래서 가볍게 무시하고 지내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
"......예?"
아니, 아니. 지금 뭐라굽쇼?
"상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네. 출발은 이틀 뒤. 우리는 인도로 간다."
브랜슨 중령의 충격 발언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가 인도로 간다고?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쪽발이들이 날뛰고 있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이미 놈들은 버마에도 발을 디뎠네. 상부에서는 곧 놈들이 인도까지 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야. 지금 같은 진격 속도면 늦어도 2, 3달 뒤에는 인도 국경에 닿겠지. 버마는 사실상 포기한 상태지만, 인도만큼은 예외일세. 원숭이 놈들이 인도까지 삼키기 전에 우리가 가서 놈들을 막는다는 계획이네."
"하지만 대대장님, 우리가 떠나면 제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제리들이 한동안 공세에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하니까. 애초에 제리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으면 우리가 인도로 갈 일 자체가 없었겠지."
아군이 적진을 정찰한 결과, 독일군은 당장 공세는커녕 방어만으로도 벅찬 상태라고 한다. 이탈리아군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물론 우리가 떠난 사이에 재정비를 끝낸 적들이 반격을 가하면 곤란하니,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은 그대로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 대대는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갑자기 인도행이 결정되었다.
아니, 전투력이 뛰어나니까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허나 상부는 눈앞의 독일군보다 인도양 건너편에 있는 일본군이 더 큰 위협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버마가 무너지면 그 뒤는 바로 인도니까, 영국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자고. 매일같이 모래 먼지나 마시면서 사막에서 뺑이 치는 것보다 정글이 더 낫지 않겠나? 그곳에선 적어도 먼지 마실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브랜슨 중령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정글에서 해충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사막에서 모래 먼지 마시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아무튼 이미 인도행이 결정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인도로 가는 동안은 싸울 일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랄까.
"그럼, 이것으로 회의는 끝내겠네. 오늘 밤에는 점호를 생략할 테니, 다들 좋은 밤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
브랜슨 중령의 말대로 이틀 뒤, 대대는 이동을 개시했다.
우리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올라 동쪽으로 향했다.
3일을 쉬지 않고 달린 결과, 쿠웨이트에 도착하여 인도행 수송선에 올랐다.
우리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일본군이 버마의 수도 랑곤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일본군은 1942년 3월이 돼서야 랑곤을 함락시켰는데 말이지.
어쩌면 독일군이 실제 역사 이상으로 강해진 것처럼, 일본군도 모종의 이유로 보다 더 강해졌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전장에 갔더니 치하나 하고 따위가 아니라 치누나 치토 같은 놈들을 만나면 어떡하지?
아씨, 괜히 쫄리는데.
소대원들의 표정도 그렇게 밝진 못했다.
비겁하게 선전포고 없이 기습해온 원숭이들에게 복수한다는 생각에 잠시 사기가 불타오른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잠시였다.
날마다 전해지는 패전 소식에 사기는 점점 떨어졌고, 이제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감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럴 땐 소대장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새끼들아, 얼굴 좀 펴라. 어디 초상 났냐? 전투가 처음도 아닌 놈들이 왜 그렇게 울상이야?"
"아, 아닙니다, 소대장님!"
"걱정 마라, 이놈들아. 아무리 쪽발이들이 날고 기어도 제리들보다 훨씬 약하다고. 우린 이미 제리들과도 싸워봤잖아. 그러니까 긴장 좀 풀어. 아직 인도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저어, 아무리 쪽발이들이라지만 제리들보다 약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토마스가 조용히 반박하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녀석들은 아직 일본군과 싸워보지 못했으니까.
사실 나도 일본군과 싸워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일본군보다 독일군이 훨씬 무서운 존재라는 것쯤은 안다.
전차라곤 기껏해야 치하에 허구한 날 반자이 돌격이나 헤대는 놈들이 무섭겠냐, 아니면 슈투카에 88로 무장한 놈들이 더 무섭겠냐?
"그래서 넌 제리들보다 쪽발이들이 더 무섭다, 이거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백인'보다 '황인'이 더 무섭다고 말하기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 좀 보소.
지금은 나도 백인이지만, 전에는 황인이었던 관계로 조금 기분이 미묘한데.
"아직 싸워보지 않았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어. 적어도 놈들이 가진 전차는 우리 전차를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까."
나는 부하들에게 일본군의 주력 전차인 치하나 하고의 빈약한 주포로는 마틸다의 장갑을 정면은 물론 측면과 후면에서도 뚫기 힘들다고 알려주었다.
마틸다의 2파운더 주포는 1km 거리에서도 놈들의 전면장갑을 무리 없이 관통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까지.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녀석들도, 내 설명을 듣고 나자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눈에 보였다.
역시, 평소에 인터넷으로 밀리터리 관련 글들을 빠짐없이 섭렵한 보람이 있었다.
"소대장님,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계십니까?"
애덤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내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러러보는 시선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야 간단하지. 인터─."
이놈의 주둥이.
하마터면 또 실수할 뻔했다.
지금은 2022년이 아니라 1941년이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고!
"인터?"
"......그냥. 언젠가 일본과도 전쟁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조사를 좀 해봤지. 그게 다야."
"아니, 조금 조사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만?"
나는 경외심 반, 존경 반으로 나를 쳐다보는 부하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저 녀석들이 단순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순 조사로는 이렇게 자세하게 알기 힘들다고 의심했을 테니 말이다.
***
아서 그레이와 그의 전우들이 인도양을 건너는 동안, 롬멜은 수송기를 타고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에 도착하자 그는 곧바로 베를린으로 향했다.
일본의 참전으로, 영국군은 인도를 지키기 위해 병력의 일부를 돌린 상태.
따라서 지금 공세를 가하면 충분히 영국군을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놈의 병력과 물자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병력으론 방어는 몰라도 공세를 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본격적인 공세를 위해선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보병사단 3개와 기갑사단 1개 정도는 지원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롬멜을 맞이한 사람은 히틀러가 아닌 할더였다.
"총통께선 베를린에 안 계신다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히틀러가 베를린에 없다는 말에 롬멜은 당황했다.
"총통은 호르티와의 회담 때문에 부다페스트로 가셨네. 일주일 후에서야 돌아오실 거야."
이런. 히틀러와 만날 수 없다는 말에 롬멜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직 총통만이 그가 하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총통께 전해주십쇼. DAK 전력의 증원을......."
"그럴 수 없네."
할더는 단호한 태도로 롬멜의 요청을 기각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각당한 롬멜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계급상으론 그가 하급자였기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말투에서 울분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물론 자네와 DAK가 뛰어난 공적을 올린 것을 모르지 않네. 하지만, 이 이상의 병력 증강이 불가능하다는 게 OKH(독일 육군최고사령부)의 뜻일세. 애초에 OKH의 목표는 수에즈 운하의 봉쇄였지, 그 이상은 계산 밖의 일이야. 총통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지만."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면 우리는 진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겁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곧 있을 대소작전을 위해선 더 이상의 전력 유출은 힘들다는 게 OKH의 입장일세. 게다가 튀니지 쪽 상황도 그리 낙관할 수 없어. 당분간은 진격을 멈추고 방어에만 집중하게. 어차피 초기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롬멜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할더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국, 본국으로부터 더 많은 증원을 받아 영국군을 끝장내겠다던 롬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