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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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3화
73화 악의 태양 (2)
일본은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과 계속 협상을 이어나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미국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며, 어차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먼저 선빵을 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1931년부터 이어진 연승으로 이성을 상실해버린 일본에서 전자를 지지하는 화평파는 극소수.
대다수, 특히 군부는 절대적으로 후자를 지지했다.
"영국은 이제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하오."
"놈들이 독일과 싸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전쟁을 할 최적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문제인데......."
"미국은 덩치만 크지, 우리가 제대로 한 방 먹이면 금방 쫄아서 설설 길 거요!"
전임 고노에 후미마로를 대신해 새로 총리직에 오른 도조 히데키는 당장 전쟁을 일으키자는 육군 내 강경파들과 달리, 일단은 미국과의 협상에 주력했다.
이미 중국에서 전쟁 중인데, 미국, 영국과도 전쟁을 벌이는 일만큼은 강경한 군국주의자인 그조차 피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단호했다.
"우리의 조건은 변함이 없소이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즉시 철군토록 하시오. 철군이 완료된 후에야 석유 금수 조치를 해제하겠소."
"하지만 당장은 무리......."
"그럼, 우리도 더 이상 할 말 없소. 알아서 하시구려."
"아, 아니......."
***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는 것 같소."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로부터 미국의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전해 들은 도조 히데키는 결단을 내렸다.
미국과의 전쟁.
총리가 된 도조 본인도 우선은 전쟁 대신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국의 의도는 분명했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방 빼라.
그렇지 않으면 경제제재는 계속될 거다.
시간 지날수록 누구한테 더 손해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게다가 육군에서는 협상을 지속하는 도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도조도 고노에 놈처럼 결국 겁쟁이였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라고."
"전쟁 하자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말을 바꾸다니!"
"미국은 무섭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 이건가?"
"그냥 다 엎어버려?"
육군에 심어둔 심복들을 통해 육군 내부 정황에 대한 소식들을 들은 도조는 고민에 빠졌다.
미치겠군, 정말.
이러다간 쿠데타가 일어나 본인 목부터 날아갈 판이었다.
또한 도조도 어디까지나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미국과 협상을 한 것이지, 자신이 평화주의자여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대다수의 일본인들처럼 중국과 동남아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국은 조선과 만주처럼 대일본제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황국은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간악한 미국과 영국이 황국의 성전에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훼방을 놓고 있다. 사실상 협상을 불가능한 상황.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렇게 된 이상, 미국과 결전을 벌여 황국의 정신을 보여줘야 합니다!"
"찬성이오!"
"독일과 이탈리아가 영국을 붙들고 있으니, 우린 오직 미국과의 전쟁에만 주력하면 될 겁니다.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버마와 말레시이아의 영국군도 실전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라고 합니다. 놈들은 황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진주만을 기습하여 놈들의 해군을 괴멸시키고, 속전속결로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 일대를 장악한다면......!"
"틀림없이 강화를 요청해오겠지. 석유도 다시 수입할 수 있을 테고. 그런 다음 남은 전력을 휘몰아쳐 장제스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요."
"완벽해! 이보다 더 완벽한 전략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
1941년 4월 5일.
토요일을 맞이한 진주만은 그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다.
갈매기들은 먹이를 찾아 분주히 하늘을 날아다녔고, 시민들은 가족, 연인과 함께 나들이를 나갔으며, 수병들이 물에 젖은 대걸레로 갑판을 닦는 동안 취사병들은 점심시간에 나갈 팬케이크를 굽느라 여념이 없었다.
같은 시각,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진주만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야, 저거 좀 봐라."
"뭔데?"
"비행기들 존나게 많네. 육군 애들 훈련 크게 하는 모양인데."
"......그런데 어째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어?"
하늘을 수놓은 백여 대의 일본기에 의해 진주만은 불타올랐다.
공습이 시작된 후에야 공습경보용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수병들과 시민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대재앙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비상! 비사아앙!"
"총원 전투배치! 모두 서둘러! 이건 훈련이 아냐, 실전이다!"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고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본인의 위치로 뛰어가는 동안, 일본군 조종사들도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목표, 웨스트버지니아! 투하!"
99식 함상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은 항구에 정박 중이던 전함 USS 웨스트버지니아에 명중하여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갑판에 있던 인원들은 폭발의 충격으로 배에서 튕겨 나가 바다와 육지로 떨어졌다.
바다에 떨어진 이들은 충격으로 팔이나 다리가 부러졌다. 허나 육지로 튕겨 나간 이들은 예외 없이 즉사했다.
"목표, 애리조나! 투하!"
97식 함상공격기가 투하한 산소어뢰는 USS 애리조나에 명중했다.
물기둥에 이어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나 배를 뒤흔들었다.
"명중! 명중입니다!"
"좋았어!"
일본군의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일본군이 기습을 가해오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미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오, 온다!"
"얼른 안 쏘고 뭐 해?!"
"탄약이 없습니다, 대위님! 텅 비어 있어요!"
"뭐라고?!"
대공포에 달라붙어 적기를 조준하던 병사들은 뒤늦게 탄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얼어붙었다.
그들을 향해 제로센 조종사는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대공포를 조작하던 병사들과 명령을 내리던 대위는 벌집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붉은 선혈이 번졌다.
"목표, 펜실베니아! 투하!"
중일전쟁 최전선에서 활약한 베테랑 대위가 모는 99식 한 대가 USS 펜실베니아의 머리 위로 폭탄을 투하했다.
99식이 투하한 폭탄은 정확히 USS 펜실베니아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대폭발을 일으켰다.
탄약고에 인근에 있던 수병들은 폭발에 휩쓸려 문자 그대로 '증발'했다.
"대성공입니다! 대성공!"
"진주만이 불타고 있습니다!"
"본대로 전보 보내!"
일본군 공격대는 즉시 본대로 전보를 보냈다.
도라 도라 도라.
진주만 공습은 대성공이다.
***
"화재 진압 불가! 불이 너무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함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퇴, 퇴거 명령을 내리게. 배를 버려!"
"함내의 모든 인원에게 알린다. 배는 포기한다. 지금 즉시 퇴거하라."
불타는 전함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전, 수병들은 화재 진압을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바다 또한 안전하지 못했다.
피격된 전함에서 유출된 기름이 수면을 뒤덮고, 수면을 뒤덮은 기름에 불꽃이 튀면서 순식간에 화재가 일어났다.
온몸에 기름을 뒤집어쓴 채 바다 위를 허우적거리고 있던 수병들은 꼼짝없이 불에 타죽고 말았다.
불타는 동료 전함들 사이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USS 네바다를 향해 97식의 산소어뢰가 달려들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괴성. 이어지는 폭발.
"명중이다! 해냈어!"
"모두 뛰어내려! 지금 당장!"
전함에 어뢰를 명중시킨 일본군 조종사가 환희에 젖어 주먹을 흔들 동안, USS 네바다의 승조원들은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렸다.
수병들은 자신들의 배가 힘없이 침몰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
진주만이 불타오르기 30분 전,
간신히 본국으로부터 받은 암호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한 주미대사 노무라와 대사관 직원들은 암호문의 정체가 선전포고문이란 사실을 알고 일제히 경악했다.
선전포고문을 받아든 노무라 대사는 손의 떨림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암호문을 해독한 오쿠무라 가츠조 1등 서기관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노무라 대사만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의 상태도 비슷했다.
"올 것이 왔구만."
최근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군부에서 차라리 미국과 전쟁을 하자는 의견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미국의 저력과 일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노무라는 자신의 조국이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일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제대로 건진 게 없긴 하지만,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노무라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로 향했다.
"장관님? 일본대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 그래? 얼른 안으로 모시게."
잠시 후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노무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님."
노무라와 만난 헐은 늘 그렇듯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비록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최악이긴 하나, 상호 간의 기본적인 예절 정도는 마땅히 지켜야 했다.
"오늘은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오셨습니까?"
"저어...... 우선 이 문서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헐과 만난 노무라는 자신이 본국으로부터 받은 '제국정부의 대미통첩각서'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을 단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당연하게도, 처음 문서를 받아든 헐은 이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대사님?"
-일본 정부는 미 정부에게 미 정부의 태도로 비춰볼 때, 더 이상의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통고해야 함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누가 읽어봐도 이건 선전포고라기보단 단교 선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정무에 몸담아 온 헐조차 이 문서가 선전포고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 문서는 단교를 뜻하는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장관님."
"단교가 아니라니, 그럼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외교계에 입문하기 전, 오랜 세월을 군인의 몸으로 보냈던 노무라조차 문서의 뜻이 무엇인지 의아해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응시하며 선전포고라는 말을 꺼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더 이상 머뭇거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본 정부의 대미 선전포고문입니다, 장관님. 현 시간부로 일본은 미합중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노무라의 입에서 선전포고라는 말이 나오자, 헐의 뇌는 순간 기능을 정지했다.
선전포고라고? 이게?
문서 어디에도 '전쟁'이니, '선전포고'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이 문서가?
"그, 그게 사실입니까, 대사님?"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재차 사실을 확인하는 헐에게 노무라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헐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대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정말로 일본 정부의 선전포고문이다.
내용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중의적인 말로만 가득한 선전포고문 같지도 않은 선전포고문이지만, 아무튼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선전포고 사실을 확인했으니, 지금 당장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것.
백악관으로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화기로 손을 뻗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아든 헐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 진주만이...... 그게 사실인가?!"
노무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시여. 어찌 이 늙은이에게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우신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