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3화
103화 고난을 넘어서 (4)
튀니지로 진입한 지 일주일째.
우리는 엘케프를 앞에 두고 정지했다.
진격을 멈춘 이유는 당연히 독일군의 저항 때문이었다.
지뢰와 대전차포로 도배된 방어선을 뚫기 위해 아군은 연일 맹공을 퍼부었지만, 독일군은 악착같이 버텼다.
대전차포도 문제였지만, 이놈의 지뢰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이지, 대체 몇 개를 파묻었는지 몰라도 끝이 없었다.
게다가 간악한 독일 놈들은 지뢰를 이중으로 설치한 탓에, 대전차지뢰를 발견해 들어내는 순간 연결된 다른 지뢰가 터지면서 주변에 있던 공병들을 죄다 날려버린 일이 부지기수였다.
거기다 독일군은 공병들이 지뢰를 찾는 동안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지뢰 탐색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렇게 공병들의 피해가 커지자, 아군 수뇌부에선 지뢰가 매설된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일제 포격으로 날려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지뢰 하나 없애자고 이렇게 포탄을 쏟아부으면 나중에 전투는 어떻게 하란 거요?"
"애초에 공병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병종이 아닌가?"
"다소간의 희생은 원래 당연한 거요! 희생을 두려워해선, 승리할 수 없소이다!"
사실, 소모되는 포탄의 양도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다시 공병대를 투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겨우겨우 지뢰밭을 통과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대전차포와 콘크리트 벙커들이 아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참고로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들은 지상에만 한정된 것들로, 당연하지만 적들은 육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슈투카다!"
"모두 산개해!"
아직 독일 공군이 건재한 탓에 이따금 슈투카가 날아와 아군 대열에 폭탄을 떨구기도 했다.
한 번은 슈투카 2기서 아군 수송대열을 쓸어버린 적도 있었다.
적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 공군도 부리나케 출격했지만, 늘 상황이 끝난 후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
"이래서야 크리스마스까지 튀니지를 점령하는 것은 무리겠군."
뒤집히고 불타는 트럭들을 보며 무어 소령이 한숨 쉬었다.
지뢰밭에 잘못 들어섰다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한쪽에선 병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고, 다른 쪽에선 부상 당한 병사들이 군의관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부에서 독일군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습니다."
애초에 연말까지 튀니지를 장악하자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원 역사에서도 추축군은 튀니지로 몰린 상황에서 내리 3개월을 버텼다.
그것도 몰타가 점령되지 않아 보급이 개판인 상황에서!
그런데 여기선 몰타를 조기에 장악한 덕분에 어지간해선 보급이 끊길 일은 없다. 거기다 아직 리비아와 이집트의 추축군도 건재하다.
사실상 튀니지를 연말까지 빼앗겠다는 계획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리 녀석들, 대체 지뢰를 얼마나 깔아놓은 거야? 파도 파도 끝이 없구만."
지뢰 찾기에 돌입한 공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무어 소령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오전에도 아군은 이동 중에 지뢰밭에 걸려 2시간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또 지뢰라니. 참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퍼니 전차라도 한 대 있다면 훨씬 나을 텐데......."
"무슨 전차?"
혼잣말하는 것을 그만 무어 소령이 듣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뒤에 전차란 단어만 들은 듯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생긴 전차가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생긴 전차길래? 한 번 설명해보게."
퍼니 전차(Funny Tank).
이름 그대로 생김새가 웃기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이 전차의 용도와 필요성을 생각하면 결코 웃을 수 없다.
퍼니 전차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놈은 뭐니 뭐니 해도 지뢰 제거 전차다.
전차 앞에 거대한 쟁기나 롤러 같은 장비를 달아 지뢰를 파괴하면서 전차가 진격하는 방식인데, 노르망디 전역에 독일군의 지뢰밭을 돌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나는 땅바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려가며 '내가 구상한 전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처음엔 심심한데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던 표정이었던 무어 소령도 내 설명을 듣더니 서서히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군. 확실히 이런 전차가 있다면 아주 쓸모가 많겠어. 전에 마틸다에 폭뢰를 올리자는 것도 그렇고, 자네는 생각 자체가 남다른 것 같구만.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헤헤, 과찬이십니다."
사실 내가 구상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구상한 것이지만.
그런데 무어 소령 외에도 내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흐음,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군."
의문의 목소리에 나와 무어 소령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예전에 본 적 있는, 낯이 아주 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급장은 자그마치 중장.
그렇다는 것은.......
"가, 각하!"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경례를 했다.
눈앞의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그 유명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었다.
어쩐지 얼굴이 너무 닮았더라니.
"실례했습니다, 각하! 바로 뒤에 계신 줄 모르고......."
"아아, 됐어. 그나저나 자네들이 나누는 얘기를 조금 들어봤는데 제법 괜찮더군. 젊은 친구라 그런지 생각 한 번 기똥차구만."
"과찬이십니다, 각하!"
몽고메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 자네가 바로 그 아서 그레이구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어!"
"예? 아, 옙!"
"브룩 원수께 자네 얘기를 들었다네. 마틸다에 폭뢰를 올리자는 아이디어가 자네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며? 방금 얘기도 그렇고, 자네는 이곳보단 무기 개발 부서에 있어야 할 것 같구만."
"각하, 각하!"
몽고메리의 뒤로 부관으로 추정되는 중위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경례를 올렸다.
"각하, 지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직접 보시고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던 몽고메리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
자신의 지휘 차량으로 돌아온 몽고메리는 아군 정찰기가 찍은 사진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진 속에는 교묘하게 위장된 전차 및 차량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에는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에 주둔한 독일군 병력이 찍혀 있었다.
"여기 사진들이 더 있습니다."
부관이 건넨 사진들을 유심히 살피던 몽고메리는 이내 혀를 찼다.
"제리들 수가 부쩍 늘었군."
"예. 거기다 아군이 감청한 적의 교신을 통해 추측하건데, 독일군은 공세를 준비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방어에 급급할 줄 알았는데 공세라. 자기네들이 공세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가 방심한 줄 알고 있나 보군."
사진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몽고메리는 이내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롬멜은? 롬멜은 어디에 있지? 아직 독일에 있나?"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아군 감청반이 롬멜이 아프리카에 온 것으로 추정되는 교신을 감청한 적 있다고 합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어서 속단은 금물입니다만......."
"아냐, 틀림없이 그놈은 아프리카에 왔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계획을 세울 놈은 제리들 사이에서는 없네. 파스타 놈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사진에 찍힌 병력과 장비들이 공세 준비용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직 없었음에도,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공세를 가해올 걸 확신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당장 대비해야지. 미군 쪽에도 적의 공세에 대비하라고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2시간 뒤,
"그래, 미군의 반응은 어떤가?"
"그, 그것이...... 미군 측에선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낮다고 일축했습니다."
"이 썩을 양키 놈이!"
독일군이 조만간 공세에 나설 것으로 추정되니, 진격을 멈추고 이에 대비하라는 몽고메리의 진언을 프레덴달은 무시했다.
그리고 안일함의 대가는 재앙이었다.
***
"으, 춥다, 추워."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지면서 한기가 엄습했다.
왜 사막에서 사람이 동사하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지 알 것 같다.
1년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사막의 밤은 상상 이상으로 춥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군 생활을 보냈던 경기도 양주의 겨울과 거의 비슷할 정도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뭔 일이라냐."
몽고메리와의 짧은 만남이 있고 2시간 뒤.
겨우 지뢰밭이 뚫려 다시 진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이어진 명령은 모두 현 위치에서 참호를 파고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독일군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루 만에 뒤바뀐 상황 덕분에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막의 뙤약볕 아래서 참호를 팠다.
그뿐만 아니라 몽고메리가 직접 참모들과 함께 전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현장을 감독했다.
"어이, 거기!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나? 그렇게 느려터지게 움직여서 언제 참호를 만들겠다고?"
정작 몽고메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낀 장교들이 돌아다니면서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딱히 고함을 지를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뭐, 아무튼 참호는 완성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소대장님."
나와 마찬가지로 추위에 벌벌 떨던 잭슨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왜."
"정말로 제리들이 쳐들어온답니까?"
"나야 모르지. 위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냐?"
"아니, 제리들이 쳐들어오는 것까진 상관없는데, 불도 못 피우고 이렇게 전차 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말이 됩니까?"
평소에는 해가 지기 전에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적이 기습해올지 모르기에 불을 피우는 것은커녕 전차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상급자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다.
"별수 없잖냐. 적이 언제 기습해올지 모른다는데. 이런 야밤에 불을 피우면 수 km 떨어진 곳에서도 금방 보인다고."
"제리들과 싸우기도 전에 얼어 뒤질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
핫팩이라도 하나 있으면 훨 나을 텐데.
당연히 이 시대에 꿈도 못 꿀 이야기다.
기껏해야 손으로 팔을 비벼 추위를 떨쳐내는 게 전부다.
무엇보다 고생인 건, 오늘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춥다는 거다.
지금까지 아프리카 사막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여러 번인데, 오늘이 가장 추운 날인 것 같았다.
"안 되겠다. 토마스, 보온병 좀 줘봐."
"여기 있습니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 토마스에게 보온병을 건네받았다.
보온병은 안에 든 차 덕분에 아직 따뜻했다.
나는 보온병에서 차 한 잔을 따라낸 뒤 다시 토마스에게 건넸다.
"야, 나도 한 잔 줘."
"얼마 안 남았으니 아껴서 먹어."
찻잔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에 굳은 손바닥을 녹이는데, 전방에서 엔진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뭔가 싶어 추위를 감수하고 해치를 열었다.
밖으로 나가 쌍안경으로 전방을 살피는데,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약 2km 거리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여기는 호랑이. 범고래는 응답 바람."
-범고래 수신. 무슨 일인가?
"전방에서 엔진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소리의 정체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했는데, 어두워서 정체를 알기 힘들다."
혹시 정찰을 마치고 복귀하는 아군 차량이 내는 소리일 수도 있기에 무어 소령에게 이를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소령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토마스, 혹시 모르니까 철갑탄 장전해."
느긋하게 하품을 늘어놓던 토마스가 굳은 얼굴로 가대에서 철갑탄을 꺼내 드는 동안, 나는 소리가 정확히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확인했다.
이어 소리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물체가 나타났다.
거리는 1~1.5km 밖.
나타난 건 아군의 마틸다 전차였다.
아군인 줄 알고 안도하는 찰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군이 정찰을 나갔다는 보고가 없었는데, 저 전차는 어디서 오는 거지?
게다가 정찰하러 나간 것이라고 해도, 속도가 느린 마틸다로 정찰을 나간다고?
다시 무어 소령에게 무전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어느새 아군 진지로부터 500m 거리까지 다가온 마틸다의 포탑이 왼편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포탑 측면에 그려진 큼지막한 철십자를 볼 수 있었다.
"잭슨! 포탑 돌려!"
포탑이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 적의 주포가 불꽃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