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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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9화
99화 엇갈린 운명 (5)
두 차례의 폭발이 일어난 후에야 공습경보가 울렸다.
공식적인 명령은 없었지만, 이미 공습경보가 울린 시점에서 훈련은 중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훈련 도중에 공습경보가 울린 적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다들 우왕좌왕했다.
우릴 지도해야 할 교관들과 통제관들이 방금 폭발로 죄다 증발한 탓에 혼란은 더욱 컸다.
"일단 전차에서 내려! 모두 인근 참호로 피신해!"
"옙!"
혹자들은 장갑판의 보호를 받은 전차 안에 있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메뉴얼에는 전차에서 피신하여 인근 방공호나 참호로 피신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당장은 매뉴얼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괜히 메뉴얼을 무시하고 따로 행동하다가 사고라도 터지거나, 공습이 끝난 후 왜 매뉴얼 대로 움직이지 않았냐고 쿠사리 먹으면 뭐라고 반문하게?
서둘러 전차에서 승차해 코앞의 참호로 들어간 우리는 바짝 엎드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분명 공습인데, 왜 하늘에는 적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리고 방금 폭발이 적 폭격기에서 투하한 것이라면 연달아 폭탄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이런 의문이 드는데 이번에는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훈련장 맞은편에 위치한 민가가 섬광에 휩싸이며 폭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V1 로켓인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귀를 막은 채 웅크리고 있던 애덤이 반문했다.
이 녀석, 귀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작게 혼잣말한 것까지 알아듣냐.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쓸 필요 없어."
"그런데 소대장님, 이상한 게 있습니다."
이번에는 잭슨이 말문을 열었다.
"뭔데?"
"분명 공습인데, 어째서 적기가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야 이 멍청아,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하늘 높이 있으니까 안 보이지! 네 눈은 무슨 망원경이라도 되냐?"
이에 토마스의 반문.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할 말을 잃었는데, 잭슨의 답변이 더 가관이었다.
"아, 그런가?"
"그래! 폭격기가 우리 눈에 보일 정도로 낮게 날 리가 없잖아! 생각을 좀 해라!"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냥 높이 나니까 안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놈과 그걸 또 수긍하는 놈이라니.
이럴 때 쓰는 말이 유유상종이었나?
난데없이 만담을 늘어놓는 두 녀석과 그걸 또 집중해서 듣는 두 녀석을 무시한 채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 예감이 맞다면, 이건 폭격기에 투하하는 폭탄이 아니라 V1 로켓이 맞다.
크롬웰이 3년 일찍 나온 것처럼, V1도 3년 일찍 개발된 건가?
이유는 몰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당시 기술력으로 못 만들 녀석도 아니니.
그러고보니 독일군의 공습이 멎었다는 뉴스를 전에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정부에선 우리 공군이 적의 폭격기 공장을 폭격해서 적들에게 폭격기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선전하던데.
만약, 독일군이 전술을 바꾼 거라면?
폭격기가 부족해서 공습을 못 한 게 아니라 폭격기와 그것을 조종하는 조종사들을 아끼기 위해서라면?
그렇다고 공습을 안 할 수 없으니, 대신 V1 로켓을 개발한 것이라면?
***
"......끝난 건가?"
마지막 착탄음으로부터 5분이 지났다.
더 이상 폭음이 들리지 않자, 병사들은 슬슬 몸을 일으켰다.
아직 공습 해제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지만, 공습이 끝난 듯싶었다.
20분 가까이 좁은 참호에서 웅크리고 있었더니 뼈마디가 쑤셨다.
"소대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가필드의 물음에 나는 눈앞의 전차를 가리켰다.
"일단 격납고로 돌아가야지. 이대로 놔둘 수 없으니...... 음?"
가필드의 뒤에서 구덩이에 처박힌 뭔가가 보인다.
길쭉한 몸통에 작은 원통형 물체가 달려있다. 설마.......
나는 서둘러 그 물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말도 없이 내가 뛰어가자, 소대원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역시."
예상대로, 구덩이 안에 처박힌 물체의 정체는 V1 로켓이 맞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터지지 않고 땅에 가만히 처박혀 있었다.
"우와! 이게 뭡니까?"
나처럼 구덩이에 처박힌 V1을 발견한 토마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폭탄 같지는 않고...... 적의 신형 전투기인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아직 V1이라는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니 생긴 것만 보고 전투기라고 오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전투기는 아닌 것 같고, 적의 로켓병기가 아닌가 싶네. 그것도 신형."
"로켓병기라고요? 전투기가 아니라?"
"그래. 저놈이 전투기라면, 조종사가 들어갈 캐노피가 있어야 하는데 안 보이잖아. 프로펠러도 없고."
역사보다 3년 일찍 나온 V1 로켓이라니.
골치 아프게 됐군.
개판 5분 전인 명중률 때문에 이름만 요란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별거 아니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지만, 이 역시 명중률 하나만 보고 하는 소리다.
명중률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독일 공군에 의한 직접적인 폭격보다는 더 효율이 높았던 게 V1이다.
독일의 모든 폭격기가 1년 동안 이룬 전과를 3개월도 되지 않아 따라잡은 것은 물론, 연료 소모율은 폭격기의 8분의 1 수준에 불과한데다 무엇보다 인명 손실률은 자그마치 0%!
애초에 사람이 탑승하지 않는 무인 로켓이니 당연한 일임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전적이 아닐 수 없다!
전쟁 말기,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이 V1, V2 로켓에 매달린 이유가 있다.
조종사도 없고, 연료도 부족한 마당에 이 극강의 가성비를 어떻게 무시해?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독일 입장에서 좋은 거지, 당하는 입장에선 영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속도가 느려서 일반 전투기나 심지어 대공포로도 격추가 가능하다곤 하지만, 야간에는 또 그게 힘든데.
게다가 V1이 나왔다는 것은 곧 V2도 나올 수 있다는 소리다.
V1보다 투입 시기가 늦어서 별 활약이 없었던 V2지만 성능상으론 훨씬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소대장님, 뭘 또 그렇게 고민하고 계십니까?"
오래도록 말이 없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가필드가 말을 걸었다.
"응? 아, 별거 아냐. 그냥 잠시 딴생각 좀 했네."
생각에 잠겨있느라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우선 전차부터 회수해야 한다.
전차를 격납고에 집어넣은 뒤, 나는 무어 소령에게 훈련장에 처박힌 정체불명 적의 신형 병기에 대해 보고했다.
이어 내 안내를 받아 현장에 온 무어 소령은 조금 전의 소대원들처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코앞의 V1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상부에 전해야겠군. 적의 신형 병기가 눈앞에 있다고."
***
"적의 신형 로켓 병기라고?"
"그렇습니다, 각하."
비서가 내미는 사진과 보고서를 받아든 처칠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나치 새끼들, 이번엔 또 무슨 흉악한 물건은 만든 거야?"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처칠은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돌아버리겠군.
이제야 겨우 일이 좀 풀리는가 했더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이 터질 줄이야.
"다행히 사상자는 적은 편입니다. 아직 확실시된 것은 아닙니다만, 정보부에선 이 무기의 명중률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합니다."
보고서에는 신형 로켓병기의 탄착 지점과 이를 토대로 분석한 명중률에 대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나마 명중률이 낮아서 다행이군. 하지만, 놈들이 명중률이 올라가게끔 개량할 수도 있지 않나? 아니, 놈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 전에 철저히 부숴버려야겠어."
"예, 이미 프랑스에 파견된 요원들이 현지 저항 세력과 접촉하여 발사기지의 위치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 처리가 빨라서 좋군. 해리스에게 연락해서, 놈들의 발사 지점이 확인되는 즉시 폭격기 띄우라고 해. 놈들이 로켓을 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부숴주지."
상대방이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무기가 나를 찌르기 전에 뚝배기를 깨버려야 한다는 것이 전쟁의 국룰.
빌어먹을 나치들이 더 무시무시한 개량품을 만들어내기 전에 하루빨리 이것들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각하,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소련 관련 정보입니다만."
"아, 그래. 어떻게 되었나?"
비서가 하는 얘기를 들은 처칠은 그제야 얼굴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래, 그래야지! 암, 그렇고 말고!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니까?!"
***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미 소련대사 콘스탄틴 오우만스키는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문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는 자신이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대사?"
헐은 겉으론 영문을 모르는 척하며 은근슬쩍 오우만스키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당황하고 있군.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은 오우만스키는 미 정부에 소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필요한 지원품 명단을 보냈다.
오우만스키는 미 정부가 틀림없이 소련의 요청을 받아들이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나치와 전쟁 중인 동맹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미국이 이를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다.
소련이 망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에 돌아올 테니까.
멍청한 제국주의자인 처칠은 그 간단한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루스벨트라면 다를 것이다.
그랬는데.......
"저희가 요청한 물자 중 비전투물자만 지원하겠다니요?"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미 정부는 오우만스키의 예상과 달리, 소련이 요청한 지원품 중에서 식량과 의약품 등 비전투물자만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것도 소련이 요구한 총물량의 50% 정도만.
물론 독일과 전쟁 중인 소련에 이 정도 지원도 소중한 것이었지만, 애초에 미국이 더 많은 지원품-특히 군사물자-을 보내주리라고 생각했던 오우만스키는 생각보다 적은 지원에 당황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원 물품이 너무 적은 것이......."
"허, 아니, 대사.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귀국이 저희에게 물건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원품의 양이 적지 않냐고 말하려던 오우만스키는 헐의 반론에 도로 침묵했다.
"저희가 어려움에 처한 귀국을 위해 지원하겠다는데, 이제는 그 지원이 너무 작다고 말씀하시다니. 심히 부적절한 발언으로 생각됩니다만."
"오, 오해입니다, 장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헐이 강하게 나오자 오우만스키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애초에 지금 아쉬운 입장은 어디까지나 소련이지 결코 미국이 아니다.
"저는 단지 이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없느냐고 묻고 싶은 것뿐입니다. 다소 염치없는 발언이지만, 저희 소련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소련의 지원 요청을 받은 FDR은 곧바로 소련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지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각료들과 처칠이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케임브리지 사건이 터지자, 미국에서도 반공 열풍이 일었고, FBI는 평소 감시 중이던 용의자들을 체포했다.
일부는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지만, 일부는 정말로 소련에 포섭되어 지령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각료들은 그 사실을 언급하며 소련에 무제한적으로 물자를 지원하는 행위가 무척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저 빨갱이들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미합중국도 염탐하려고 했습니다. 항의는 못 할망정, 놈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신다면 분명 국민들의 반발이 거셀 겁니다."
"소련이 독일과 맞서 싸우는 동맹국이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 소련은 저희 미합중국의 적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저들의 지원 요청을 무시했다가 소련이 정말로 독일에 무너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겠소?"
"각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저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선 안 됩니다. 최소 식량과 의약품 정도는 지원하되, 필요 이상의 물자를 지원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딱 저들이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물자만 보내면 됩니다."
"소련이 망해도 문제지만, 소련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도 미국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처칠까지 FDR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줘선 안 된다고 진언했다.
결국, 루스벨트와 그의 각료들은 소련에 비전투물자만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것도 너무 많다고 불만을 가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안심하시지요, 대사. 이것은 결코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니까요. 상황에 따라서 지원품의 물량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말을 끝낸 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우만스키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헐이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간 후, 오우만스키는 고민에 빠졌다.
이 정도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스탈린 동지는 결코 여기서 만족하지 않을 텐데.......
애초에 스탈린에게 자기만 믿어달라며 큰소리쳤던 이는 오우만스키 본인이었다.
오우만스키는 뒤늦게 과거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서 그레이가 밝혀낸, 케임브리지 5인조의 정체는 소련을 위협하는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