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8화
98화 엇갈린 운명 (4)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진입하던 날, 하늘에선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
거대한 수송선마저 작은 조각배처럼 흔들거릴 정도로 파도가 심했다.
멀미약이 없었던 탓에, 배에 탄 인원들은 지독한 뱃멀미에 시달렸다.
배가 흔들거릴 때마다 울렁거림이 심해졌는데, 나는 만일에 대비하여 화장실 코앞에 머물렀다.
속이 올라올 경우 바로 변기에 구토를 할 수 있게끔.
장교, 그것도 대위씩이나 돼서 바닥에 토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
"아씨, 날씨가 이래서야 밖에 담배 피우러 가지 못하겠네."
오직 한 사람, 게이츠 원사만이 모두가 뱃멀미로 쓰러진 상황에서도 멀쩡했다.
브랜슨 대령도, 무어 소령도 뱃멀미 때문에 방에서 나오질 않는데, 게이츠 원사는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녔다.
"이런, 대위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넵."
나는 대답할 힘조차 없어 겨우 손을 들어 보였다.
시체처럼 뻗어버린 병사들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 다니는 게이츠 원사를 볼 때마다 그저 감탄밖에 안 나왔다.
"원사는 안 어지러워요?"
"사실 저도 제가 뱃멀미에 내성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약간만 뛰어도 어지럼증이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롤러코스터를 타고서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설마 게이츠 원사가 그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부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건 그렇고, 애들 상태가 죄다 이래서야 오늘 청소랑 점호는 힘들겠군요. 빨리 날씨가 좋아져야 할 텐데."
"......."
이 상황에서 청소랑 점호를 생각하다니.
원사들은 죄다 저런가?
오랫동안 군대밥을 먹어서 뇌까지 군대에 절여진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 밖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처음엔 천둥이 친 줄 알았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하지만 소리의 정체는 천둥 따위가 아니었다.
"유보트다! 유보트!"
수병 한 명이 선실 안으로 들어와 조금 전의 굉음이 천둥소리가 아니라 유보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 말을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맙소사, 그 유보트라고?
나는 어지럼증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창가로 뛰어갔다(정확히는 기어갔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둥근 창문을 통해,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향해 치솟는 연기와 주홍색 화염을 볼 수 있었다.
뱃멀미로 다 죽어가던 병사들이 유보트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정신을 차렸다.
사실, 육지가 아닌 해상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배가 침몰할 경우에 대비해 구명조끼 입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병사들은 배처럼 기어서 통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배가 침몰할 경우, 재빨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허나 지금 같은 몸 상태론 계단을 다 오르기도 전에 물에 삼켜질 것 같았다.
유보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가 속도를 올리자, 흔들거림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자 참지 못하고 구토를 일으키는 병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으웨엑!"
"으악, X발!"
"봉지에 대고 토해!"
뻗어있던 전우의 머리 위로 토사물을 쏟아내는 병사며, 그런 병사의 안면에 주먹을 날리는 병사. 마지막으로 그런 병사들을 향해 봉지에 대고 토하라고 소리치는 게이츠 원사까지.
개판이 따로 없었다.
수송 선단을 호위하는 구축함들이 유보트를 향해 발사한 폭뢰가 터질 때마다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실 안에만 있었기에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이 X 같은 상황이 지나가길 바랄 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 유보트의 습격이 더는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포츠머스에 도착해 육지 땅을 밟았을 때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햐~ 역시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지. 바다는 살 곳이 못 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대장님."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다니던 땅이 이렇게나 소중한 것이었다니.
왜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고 싶어 했는지 알겠다니까.
그러나 육지에 오른 감격을 만끽하기도 전에, 우리는 곧바로 열차로 갈아타고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막사에 짐을 풀고 다음 날.
훈련장으로 이동하니 신형 전차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게 바로 신형 순항전차 크롬웰이다. 멋있지?"
우리의 교육을 맡은 중령이 목을 힘을 주며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너희가 몰던, 느려터진 보병전차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속도 적응 못 해서 사고 치지 말고."
***
중령이 말한, 속도 적응 못 해서 사고 일으킨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단 이틀이면 충분했다.
지금까지 대대의 모든 전차병이 몰았던 전차는 속도가 굼벵이 수준인 마틸다 시리즈였다.
반면 새로 탑승하게 된 전차는 최고 속도가 마틸다보다 2~3배 이상 빠른 크롬웰이다.
이제까지 느리게 움직이는 보병전차에 익숙했던 조종수들이 속도가 빠른 크롬웰을 타게 되자 적응을 못 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야, 야! 클러치 살살 밟으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냐?"
"죄송합니다!"
"저, 저 새끼 저거 또 내 말 개무시하고 액셀 밟고 있네!"
차량간 거리도 못 맞춰서 줄줄이 들이박질 않나, 전속력으로 기동하다가 멈출 타이밍을 못 잡아서 도랑에 그대로 처박질 않나.
덕분에 훈련장에선 늘 악을 쓰는 교관들과 그들의 호통에 멘탈이 나가버린 조종수들의 사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애덤은 사고 한 번 일으키지 않고 빠르게 새 전차에 적응했다.
교관들이 조종수 중에서 가장 낫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랑 싸잡아서 폐급 소리 듣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래서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다니까.
크롬웰과 마틸다의 대표적인 차이점에는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화력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장교 병사 가릴 것 없이 마틸다의 2파운더와는 차원이 다른 6파운더에 모두 고평가를 내렸다.
사거리도 짧고, 특히 유탄 위력이 수류탄 수준에 불과했던 2파운더와 달리 6파운더는 환상적인 물건이었다.
사거리도 훨씬 긴 데다, 유탄의 위력도 충분해 보병들을 상대하는데 더 효과적일 터였다.
전차포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관통력은 말할 필요가 없었고.
2파운더의 관통력이 500m에서 52mm, 100m에서 68mm에 불과한 반면, 6파운더는 500m에서 82mm, 100m에서 97mm를 관통한다!
무엇보다도, 주포가 짧아 사정거리도 그만큼 짧은 2파운더와 달리 6파운더는 1km 거리에 있는 표적까지 충분히 맞출 수 있다!
이로써 나치들의 전차들을 상대할 때 예전처럼 똥꼬쇼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허나, 장점만 있는 전차는 없는 법이다.
지금까지 희망편을 얘기했으니, 이제 절망편을 시작할 차례로군.
"여기는 3호차, 엔진 불량!"
"또 엔진 불량이야? 미치겠군, 정말."
역사보다 3년 일찍 세상에 나타난 대가는 미칠 듯이 잦은 고장이었다.
기동 간 훈련을 하는데 전차가 퍼져 주저앉은 경우가 이틀 동안 8번.
그중 3번만 조작 미숙으로 인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엔진 불량으로 인해 벌어졌다.
크롬웰에 장착된 미티어 엔진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라, 자주 고장을 일으킨다는 것이 교관들의 설명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엔진에 무리가 덜 가도록 속도를 40km/h로 제한하는 게 다였다.
사실, 생각을 조금만 해 보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참사다.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만든 과제보다 시간에 쫓겨 빨리 내놓은 과제, 이 둘 중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까?
당연히 전자가 교수님께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초딩들도 아는 상식이다.
역사에선 3년을 들여 만들어낸 물건을 여기선 1년 남짓한 기간 안에 만들었으니, 완성도가 개판일 수밖에.
게다가 장갑도 실제 역사보다 더 두꺼워졌다.
장갑이 두꺼워질수록 방어력은 증가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중량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 역사보다 빠른 설계 및 생산으로 허접한 엔진 + 늘어난 중량으로 인한 변속기의 부담 증가라는 환장의 콜라보니, 고장이 안 날 수가.
"속도가 빠르면 뭘 하냐? 전투 도중에 고장 나서 뻗어버리면 그대로 끝인데."
속도가 빠르고 화력도 강한 전차를 타게 되어 기뻐하던 병사들도, 행보관의 샤우팅보다 잦은 엔진 고장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전황이 그렇게 심각하진 않아서 기술자들이 전차를 손보는 동안에 우리가 전장에 갈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우리가 전장에 가지 않는다고, 우리가 있는 곳이 전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9월 1일.
이제까지 일본에 밀리기만 하던 미국은 둘리틀 특공대를 보내 일본 본토 폭격을 감행했다.
같은 날 저녁, 우리는 야간 전투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
신문에 실리는 것은 물론, 촬영해서 뉴스영화로 상영할 예정이었기에 다들 훈련에 진지하게 임했다.
이번 훈련을 위해 전차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좋은 놈들만 투입했고.
훈련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전차가 예정된 지점에 오면, 대전차포가 발포했고, 전차병들은 대전차포의 섬광을 향해 예광탄을 발사했다.
대전차포 본체가 아니라 그 앞에 착탄하게끔 각도를 조절해서 발포한데다, 포탄도 연막탄이라 사고가 날 일은 없었다.
아무튼 연막탄이 터지자 나는 기총사수에게 마무리를 명령했다.
"기관총 사격 개시."
"사격 개시!"
5인승 크롬웰 전차에 맞춰 추가된 레이먼 가필드 상병이 내 명령을 복창하며 기관총을 발사했다.
꼬리를 물고 연기 속으로 날아드는 예광탄 줄기가 스타워즈의 광선검처럼 보인다.
"좋아,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이땐 복창할 필요가 없는데.
뭐, 열심히 한다는 증거니까 상관없나.
"고지가 코앞이다. 2호차와 3호차는 좌우 적 매복에 주의하고 4호차는 나를 따라 그대로 전진한다."
이제 저 고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둔덕만 점령하면 훈련은 끝이다.
그런 다음 기자들 앞에서 적당히 폼 좀 잡아주다가 인터뷰 몇 번 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그런데.......
쿠아아앙!!!
"어? 뭐야?!"
고지를 향해 다가가던 중, 훈련장 끝자락에서 뭔가가 날아와 착탄했다.
이어진 폭발로 깜깜했던 훈련장이 일순간 대낮처럼 환해졌다.
난데없는 폭음과 섬광에 놀란 애덤은 도중에 전차를 멈추었다.
"이것도 훈련입니까?"
"아니, 이런 건 예정에 없었는데."
뭐야, 대체? 혹시 위에서 준비한 '깜짝 선물'인가?
실전 같은 훈련을 위해서 참가자들한테 비밀로 하고 폭약을 터뜨려봤습니다, 같은?
관중석에서 우리의 훈련을 카메라로 담던 기자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저들은 이 모든 게 다 훈련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훈련인가?
실전 같은 훈련을 위해 몰래 묻어둔 폭약이 예상외로 강력해서 큰 폭발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휘하 차량들에게 정지를 명한 뒤, 통제실에 무전을 넣었다.
"여기는 부엉이, 방금 그 폭발은 뭔가? 이것도 훈련 일부인가?"
-우리도 모른다. 현재 사태 파악 중이다.
돌아온 통제실의 답변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통제실도 모른다는 것은, 훈련을 위해 묻어둔 폭약이 터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대체 뭐지?
일단 중단 명령이 없었으니, 훈련 매뉴얼 대로 다시 움직여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조금 전 무전을 주고받았던 통제실이 섬광과 함께 폭발하며 잔해들이 관중석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훈련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