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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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4화
94화 사자와 여우 (5)
빌리 필츠만 병장은 철모에 쌓인 모래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위치로! 토미들이 몰려온다!"
소대장 에리히 휜차이트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소리치느라 목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소대장의 고함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각자의 위치로 뛰어갔다.
"개떼처럼 몰려오는구만, 개새끼들."
저 멀리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돌격해오는 영국군 전차들의 모습을 보며 빌리는 이를 악물었다.
카이로에 입성하던 날, 그와 그의 전우들은 곧 전쟁이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수에즈 운하를 빼앗긴 영국은 독일의 우위를 인정하고, 협상의 손을 내밀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전쟁광 처칠은 협상 대신 전쟁을 택했다.
일본이 동남아를 휩쓸고 인도가 위협받는 중에도 그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했다.
빌리와 전우들은 처칠을 앞도 못 보는 눈 뜬 장님이라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천하무적인 줄 알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기습에 밀려 퇴각해야만 했고, 급기야 이곳 카이로까지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빌리의 부대는 카이로에 남아 최후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른 부대들은 모두 어젯밤 야음을 틈타 도시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어째서 우리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냐고, 빌어먹을.
빌리는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폼만 잡을 줄 알지 싸움은 더럽게 못 하는 이탈리아 머저리들은 진즉에 튀고, 자신들은 이곳에 남아서 놈들의 엉덩이나 지켜줘야 한다니.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롬멜 장군만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라면 분명 자기 부하들을 이탈리아군 대신 희생시킬 수 없다고 격렬하게 항의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카이로까지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쏴!"
참호 왼편에 자리 잡은 88mm 대공포가 1500m 밖에 있는 영국 전차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적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최대한 수를 줄여보자는 속셈이었다.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는 88답게 크루세이더 전차가 포탑이 날아가며 정지했다.
포탑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불기둥이 치솟는 모습이 목이 잘려 피를 내뿜는 닭처럼 보였다.
전차에 타고 있던 전차병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틀림없이 통구이가 되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빌리의 머릿속엔 전차병들도 머리가 날아가 피를 내뿜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쏴!"
재장전을 끝낸 88이 재차 불을 뿜자, 또 불기둥이 치솟았다.
벌써 두 대나 되는 크루세이더가 허무하게 격파당했다.
그러나 남아있는 전차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너무 많은 숫자였다.
***
-멈추지 마라! 전진!
무어 소령의 말대로 멈추면 죽는다.
기동성이 좋은 크루세이더 전차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마틸다와 발렌타인들이, 후미를 보병들을 태운 트럭들이 뒤따르는 형식으로 아군은 전진 중이었다.
예상했듯이, 독일군은 우릴 매우 열렬하게 환영하며 축포를 쏘아댔다. 88이라는 이름의 축포를 말이다.
88이 불을 뿜을 때마다 아군 전차가 한 대씩 폭발했다. 지금까지 벌써 3대나 당했다.
88mm 철갑탄의 직격을 받은 전차들은 하나같이 유폭을 일으켜 해치가 날아가고 불기둥이 치솟거나 포탑이 차체에서 굴러떨어지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군 전차들이 최후를 맞이할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급한 마음에 신경질을 냈다.
"야, 애덤! 속도 더 올려!"
"이미 전속력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계라고요!"
속이 타는 것은 애덤도 마찬가지였다.
이놈의 전차는 방어력 자체는 괜찮은데, 그놈의 속도가 늘 발목을 잡았다.
최고 속력이 기껏해야 26km/h라니.
그것도 지형이 안 좋으면 14km/h까지 떨어지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차라리 버마에 있을 때가 훨씬 나았던 것 같습니다!"
잭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습기와 해충들이 우글거리는 최악의 환경에, 제네바 협정 따윈 밥 말아 먹은 최악의 정신병자들과 싸워야 했지만.
적어도 일본군은 88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마틸다만으로 무쌍을 찍을 수 있었는데.
-적 참호까지 400m!
그래도 수를 앞세워 돌격한 덕분에 적 참호선까지 용케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수많은 아군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제 그들을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적 보병들이 쏜 총알이 장갑판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하지만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보병들 따위가 아니었다.
"정지!"
조금 위험하더라도 적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정지해야 했다.
전차가 멈추는 짧은 시간 동안 잭슨은 주포를 돌려 88을 겨냥했다.
놈은 다른 전차들을 사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잭슨, 조준!"
"이미 끝냈습니다!"
"그럼 쏴버려!"
40mm 유탄이 88을 향해 날아갔지만, 결과는 안타깝게도 실패.
포탄은 88 대신 적의 참호를 맞추었다.
"불명중! 잭슨 너 이 새꺄, 조준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잭슨을 야단치는 사이 토마스는 아무 말 없이 유탄을 채워 넣었다. 그와 동시에 88도 주포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릴 향해 돌아가는 주포를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장전 완료!"
토마스가 장전을 끝내자마자, 잭슨은 주포를 격발시켰다.
포탄은 88의 포방패를 맞추었다.
폭발이 일자 적 포병 두어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지는 광경이 얼핏 보였다.
그러나 포구는 여전히 우릴 조준하고 있었다.
나는 잭슨에게 장전이 끝나는 즉시 한 발 더 날리라고 지시했다.
"장전 끝!"
"쏴!"
두 번째 명중.
이번에도 같은 위치다.
이어 다른 전차들도 일제히 발포하여 88을 섬광 속에 파묻어버렸다.
최후의 한 발이 작렬했을 때, 육중한 주포가 포대에서 떨어져 내렸다. 한 전차가 유탄 대신 철갑유탄을 쏜 모양이었다.
수많은 전차들이 난타한 후에야 겨우 괴물을 잡을 수 있었다.
"됐다, 전진! 다 짓밟아버려!"
가장 큰 장애물인 88을 날려버렸으니,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
가장 든든한 방패를 잃은 독일군은 소총과 기관총을 쏘아대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쇠로 무장한 야수들에게 총알은 통하지 않았다.
이윽고 적의 참호에 도달한 전차의 무한궤도가 참호를 타 넘자, 적들은 바닥에 엎드렸다.
적들이 바닥에 엎드린 틈을 타 보병들이 참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곧 참호에선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백병전이 진행되었다.
아군과 적병이 서로 뒤엉켜 총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상대방의 턱을 작살내는 동안 나는 숨어있는 적이 없나 확인했다.
이윽고 내 눈은 위장막을 덮은 대전차포를 발견해냈다.
"정지! 좌측에 대전차포다!"
하필이면 PaK 38이다.
T-34나 KV-1 같은 소련군 전차들에게 무력하게 터져나갔던 기억 때문에 저평가되는 놈이지만, 500m에서 마틸다와 발렌타인의 정면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거리는 겨우 100m 안팎.
맞으면 무조건 뚫리는 거리다.
잭슨이 포탑을 돌리는 사이, 적 대전차포가 먼저 발포했다.
그러나 녀석의 표적은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던 2호 차량이었다.
"조준했습니다!"
"발사!"
유탄을 맞은 대전차포의 뒤에 있던 적들이 일제히 나자빠졌다.
몇 명은 살았는지 몸을 비틀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적 대전차포가 격파되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즉시 뒤에 있던 2호차로 시선을 돌렸다.
측면에 구멍이 뚫린 2호차는 이미 해치 밖으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유폭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철갑탄의 장약만으로 내부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탈출자는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데, 참호를 벗어나 질주하는 적병 여럿이 보였다.
그 즉시 공축 기관총이 불을 뿜어 도주하는 적들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참호를 정리한 보병들이 밖으로 나와 시내로 돌격했다.
참호에 뛰어들 때에 비해서 인원이 확 줄어든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뒤따르고 있는 부대들이 있으니 인원이 부족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나는 시내로 돌입하면서 눈에 띄는 모든 표적들을 향해 유탄과 기관총을 갈겨댔다.
***
카이로에 남아있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악착같이 싸우는 놈들과 희망을 잃고 일찌감치 백기를 흔드는 놈들.
시내에 진입하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앞에 나타난 이탈리아군 소대가 그랬다.
"항복하겠소! 쏘지 마시오!"
그들은 절박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백기를 흔들어댔다.
하필이면 선두가 나였던 탓에, 내가 직접 그들과 상대해야 했다.
"이봐, 영국군 양반! 우린 항복하겠소이다!"
소리치는 이탈리아군 장교의 말에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눈으로 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죄다 내팽개치고 몸뚱이만 온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품에 숨긴 무기가 있는지 검사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라서 힘들었다.
후속하던 보병들이 항복한 이탈리아군에게 다가가는데, 갑작스레 총격이 가해졌다.
백기를 보고 안도하던 보병 3명이 즉사하고, 그들을 지휘하던 장교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총탄은 11시 방향에 있는 3층 건물 옥상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함정이었나?
"11시 방향에 적 기관총 진지다. 발사!"
우선 적부터 먼저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미리 유탄을 장전해뒀기에 조준하고 쏘기만 하면 된다.
독일군은 전차가 자신들을 겨냥하자 사격을 중지하고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잭슨이 더 빨랐다.
포탄이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만든 기관총 진지에 명중하자, 조금 전 기관총을 쏜 것으로 추정되는 적병 두 명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 사이, 항복한 이탈리아군 두어 명이 대열에서 벗어났다.
도망치려고 했는지, 단순히 이 자리에 있다간 총에 맞을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군 보병들에겐 함정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항복한다면서 백기 들고 나타났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사격해오지 않나, 급기야 도망치기까지 하니 의심이 갈 수밖에.
아군 보병들은 재빨리 스텐을 난사했다.
눈앞에 있던 이탈리아군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뒤늦게 사격 중지를 외쳤지만, 이미 이탈리아군 모두 총에 맞고 쓰러진 뒤였다.
숨이 붙어있는 자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이 낳은 참사였다.
화를 낼 틈조차 없이 무전기에서 계속 전진하라는 무전이 흘러나왔다.
하는 수 없이 보병들에게 살아있는 이탈리아 병사들 옮기라고 한 뒤 애덤에게 명령하여 전차를 전진시켰다.
피로 얼룩진 거리를 지나 탁 트인 광장으로 나오자, 거대한 성채가 나타났다.
12세기에 십자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살라딘이 지었다고 알려진 카이로 성채였다.
공습과 잇단 전투로 인해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돔 군데군데에 움푹 꺼진 곳이 있긴 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위용만큼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독일군도.
쿵!
"우욱!"
눈앞의 성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근처까지 적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00m 안까지 접근한 4호 전차가 발포하여 전면에 탄흔을 남겼다.
황급히 포탑을 돌려 적을 향해 발포했지만, 발포 후에야 조금 전 쏜 포탄이 유탄이란 사실을 기억해냈다.
당연하게도, 포탄을 맞은 전차는 멀쩡하게 움직이며 우릴 향해 달려왔다.
"토마스, 철갑탄! 빨리!"
그 사이 4호 전차가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해 좌측 궤도를 파괴했다.
전면에서 관통이 불가능하니, 우선 궤도를 파괴해 발을 묶겠다는 속셈이었다.
"장전 끝!"
"적 전차 정면, 발사!"
그럼 뭐하나.
정면에서 관통할 수 없으면 말짱 꽝인데.
2파운더에 정면을 관통당한 4호 전차는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몰라 재차 발포를 명령했다.
"포탑을 노려라. 발사!"
"쏴!"
포탑에 구멍이 뚫리고 10초 뒤, 해치가 열리면서 전차병 둘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보병들은 보자 미련 없이 두 팔을 들었다.
-여기는 솔개. 백조는 응답 바람.
때마침 무어 소령의 무전이 들어왔다.
"여기는 백조, 수신."
-현 위치가 어디인가?
"현재 카이로 성채 앞이다. 적 전차와의 교전으로 좌측 궤도가 파괴되어 더 이상의 기동이 불가능하다."
-알겠다. 현 위치에서 보병과 함께 대기하라. 아군의 주력은 적 잔당들을 소탕 중이다.
"수신 완료."
카이로에 있던 추축군은 시내에 고립된 소수 잔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항복했거나 나일강 건너편으로 도주 중이었다.
아직도 시내 곳곳에서 총성과 폭음이 들렸지만, 내게는 이미 전투가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들도 총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10분 뒤,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추축군이 퇴각하면서 아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나일강에 있던 다리를 폭발시킨 것이었다.
나일강의 모든 다리가 끊어진 탓에 아군은 더 이상 적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애초 작전 목표가 카이로 탈환이었기에 구태여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할 필요는 없었다.
최후의 다리가 폭파되고 1시간 뒤, 무전기에서 오킨렉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에 남아있던 적들은 모두 소탕되었으며-말하는 도중에 총성이 들리긴 했지만-아군이 카이로를 완전히 탈환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가장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