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3화
93화 사자와 여우 (4)
"드디어 카이로에 도착했구만!"
"아직 몇십 km는 족히 남았습니다만?"
언덕에 올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무어 소령에게 나는 가벼운 딴죽을 걸었다.
"이 사람아, 빡빡하게 굴지 말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면 다 온 거지."
"그래도 점령은 아직 못했지 않습니까?"
"곧 점령하게 될 거니까 상관없어."
도시 외곽에 도착한 우리는 재정비를 위해 정지했다.
당장 카이로를 공격하기엔 기름과 탄약 모두 다 부족했으니까.
다른 부대들의 사정도 거의 다 비슷한 탓에 아군은 최종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도시에 있는 추축군은 열심히 도시를 마개조하고 있을 것이다.
코앞에 적들이 우릴 엿 먹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니.
어째 씁쓸하구만.
"지금쯤 적들은 바리케이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겠죠?"
"그렇겠지. 쩝, 연료와 탄약만 충분했어도 바로 공격하는 건데, 꼭 중요한 순간에 보급이 발목을 잡는구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줄 보급부대는 한참 뒤에 있다.
게다가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타 부대들에도 보급을 해줘야 하는 탓에 최전선에 있는 우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차례가 오려면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한다는데, 그 시간 동안 적들이 얼마나 많은 참호를 파고, 얼마나 많은 대포를 가져다 놓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걱정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네. 맘 편히 먹자고. 자네도 내려가서 좀 쉬게나."
"그래도 됩니까?"
"됩니까는 무슨.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일도 없는데. 나도 가서 차나 좀 마셔야겠어."
언덕을 내려와 소대로 돌아오는데, 병사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본토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이 자식들아, 줄 서! 줄!"
게이츠 원사가 성질을 팍팍 내며 병사들에게 연신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간만에 가족들로부터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눈이 돌아간 병사들은 게이츠 원사의 샤우팅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벌떼처럼 모여든 병사들에게 편지를 나눠주느라 담당 간부와 병사들은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고생하십니다, 원사."
"아, 대위님. 카이로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별로 볼 것도 없던데요, 뭐."
"그래도 기분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겨우 몇십 km 떨어진 거리에서 본 게 단 데 기분이랄 것도 있나.
"참, 대위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게이츠 원사는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편지입니다. 대위님께 온 겁니다. 바로 맨 위에 있길래 제가 맡아놨죠."
"이렇게나 많이요?"
게이츠 원사가 꺼낸 편지는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많았다.
이게 전부 다 내게 온 편지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원사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대위님은 전쟁영웅이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당연한 거죠. 저도 이만큼 편지를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게이츠 원사의 말대로 편지의 대다수는 영국 전역의 사람들이 전쟁영웅인 내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0대 소녀부터, 자식과 손자를 전장에 보낸 노인까지.
편지를 쓴 사람들은 다양했다.
편지를 쓴 사람들만큼이나 편지의 내용도 가지각색이었는데, 평범한 응원의 글부터 아슬아슬한 수위의 연애편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부담스러운 편지도 많았지만, 모두가 나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편지를 썼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운 마음만 들었다.
편지 중에는 가족이 보낸 것도 있었다.
아버지가 쓴 것이었는데, 본인의 성격만큼이나 무뚝뚝한 필체로 간결하게 쓰인 것이 특징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희 엄마도 늘 네 걱정뿐이다.
우린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신문과 라디오에서 네 이름이 불릴 때마다 좀 신기하긴 하구나.
영웅에 걸맞게 앞으로 사고 치지 말고. 몸조심해라.'
"소대장님도 편지 읽으시는 중입니까?"
편지를 읽은 다음 곱게 접어 봉투에 도로 넣는데, 잭슨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 인마. 가족들이 보낸 거야.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녀석의 손에도 편지 한 장이 들려있었지만, 표정이 어째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 녀석, 지난번에 짝사랑하던 여자한테 사귀자고 편지 보냈는데 오늘 답장이 왔습니다."
토마스가 실실 웃으며 대신 사정을 설명해줬다.
잭슨은 그런 토마스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화를 낼 힘조차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장이 뭐길래?"
"자기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앞으로 편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토마스는 전우의 불행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잭슨은 말없이 뒤돌아서 텐트로 들어가 버렸고.
불쌍한 녀석.
"너도 편지 받았냐?"
"옙. 제 건 저 녀석과 정반대입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받은 편지를 자랑스레 펼쳐 보였다.
분홍색 편지지에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정성이 들어간 편지의 예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여자친구한테서 온 거냐?"
"정답입니다."
실실 웃고 있는 녀석의 면상을 보니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꼴 받지?
녀석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편지를 읽으러 어디론가 가버렸다.
방해꾼들도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편지나 읽어볼까.
"어?"
마지막 편지는 놀랍게도 레이첼 로튼이 쓴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내게 편지를?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봉투를 뜯자 갈색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쓴 글자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가르쳐준 요리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단골로부터 반응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더니, 이제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재료가 다 떨어질 정도로 사람들이 모인단다.
21세기에 통하는 것들이 20세기에도 먹힐지 긴가민가했는데.
이걸 보니 확실히 사람 입맛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구만.
덕분에 빚도 다 갚고, 지금은 통장 잔고 쌓이는 재미에 살고 있다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곳에 와서 간만에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군, 음음.
간만에 뿌듯한 마음으로 편지를 챙기는데, 하늘에서 한 무리의 폭격기 편대가 지나갔다.
날아온 방향을 봐선 아군이었다.
폭격기들은 곧장 카이로로 날아가더니, 잠시 후 도시에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 소리는 도시에서 몇십 km 떨어진 이곳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
"우리 공군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방공호에 울려 퍼지는 RAF의 폭격 소음을 들으며 그라치아니는 불만이 잔뜩 섞인 한탄을 뱉어냈다.
"각하, 두체께선 뭐라고 답장하셨습니까."
그라치아니 다음으로 계급이 높은 이탈로 가리볼디 대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라치아니는 한숨을 토했다.
"사수하라고 하시더군."
"그렇습니까......."
가리볼디의 얼굴에 진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영국군에 의해 아군 방어선이 연달아 돌파당하자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에게 전략적 퇴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완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이로를 사수하라.
퇴각은 허용하지 않겠다.
무솔리니는 아직도 이집트 전황이 이탈리아군에게 유리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되려 한 줌도 안 되는 영국군에게 수에즈 운하까지 빼앗겼다며 그라치아니를 질책하기까지 했다.
그라치아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장군이 현재 전황이 좋지 않으므로 퇴각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무솔리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는 사수 명령만 반복할 뿐.
"에티오피아도 잃게 된 마당에 이집트까지 잃으면 우리의 체면이 뭐가 되겠나? 게다가 우리 군의 숫자가 영국군보다 더 많지 않은가! 이런데도 후퇴를 하자니, 제정신인가?!"
"두체. 우리 군의 병력이 영국군보다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장비에선 우리가 확연히 열세입니다. 아군이 가진 무기론 영국군의 마틸다와 발렌타인 전차를 격파할 수 없습니다. 오직 독일군이 보유한 장포신 3호 전차와 88mm 대공포, 50mm 대전차포만이 이 전차들을 확실하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독일군에게 요청해서 대여하면 될 거 아닌가."
"독일군도 수량이 부족해서 빌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돼지 놈들! 그럼 악으로 싸우라고 해! 성능은 밀려도 숫자는 우리가 많으니 몰려가서 싸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환장할 노릇이군.
누가 봐도 후퇴해야 할 판국인데, 그깟 자존심 때문에 후퇴조차 할 수 없다니.
무기도 무기였지만, 병사들의 사기도 문제였다.
대다수의 병사는 수에즈를 함락시켰으니,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영국군의 반격으로 도로 밀리기까지 한 탓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사기도 낮고, 무기도 열세인 군대가 숫자만 많아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전투력만큼은 믿을 만한 동맹군인 독일군 역시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무기는 영국군과 최소 동등하고, 사기도 이탈리아군보단 나았지만 독일군의 규모는 겨우 4개 사단로 숫자가 너무 작았다.
이조차 이어진 격전과 부족한 보충으로 인해 실질적인 규모는 3개 사단에도 미치지 않았다.
"롬멜은? 롬멜은 어디에 있지? 아직도 독일에 있나?"
"그렇습니다."
"제길. 앞에서 거드름 피울 땐 언제고 아직까지 독일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정작 롬멜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부터가 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지만.
"각하, 두체의 명령에만 따르다간 꼼짝없이 덫에 걸린 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일단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가리볼디가 말했다.
물론 두체의 명령에 거역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영국군의 포로가 될 판이었다.
지금이라도 도시를 포기하고,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만이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라치아니는 공습이 끝났다는 참모의 보고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하?"
가리볼디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라치아니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하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어쩔 도리가 없군."
"그 말씀은......."
"일단은 살고 봐야지. 카이로에 최소한 방어 병력만 남기고 모두 알렉산드리아로 퇴각한다. 독일군에게도 퇴각 소식을 전하게."
"알겠습니다."
원수의 결정에 늙은 부하는 속으로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
중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곧 있을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전날 전달받은 고국의 편지와 빵빵한 보급 덕분에 모두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다.
아직도 멘탈이 반쯤 나가 있는 잭슨을 제외한다면.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오킨렉 장군의 연설이 있었다.
연설 자체는 간단했다.
카이로를 탈환해야 이집트를 되찾을 수 있고, 이집트를 되찾아야 지중해를 평정할 수 있으며, 지중해를 평정해야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포병대는 열심히 카이로 시내를 포격했다.
공중에서는 웰링턴 폭격기와 블렌헤임 폭격기들이 하늘을 오가며 폭탄을 투하했다.
수 km 떨어진 이곳에서조차 땅이 흔들거릴 정도로 어마무시한 공격이었다.
"이거, 막상 카이로에 도착했더니 안에 있던 놈들 다 뒤진 거 아닙니까?"
대기가 길어지자 지루해진 토마스가 농담을 건넸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도 알잖냐. 그런 말 할 때마다 적들이 안 죽고 살아있는 거."
-......제군들이게 고한다! 조국의 평화와 자유, 미래를 위해 싸우자! 신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연설이 끝나자 포격도 끝났다.
나는 미리 받은 지시대로 중대망으로 채널을 돌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