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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6화

126화 새로운 목표 (2)

 

 

"소대장님, 얼굴 좀 펴십쇼. 오늘따라 기운이 왜 이렇게 없습니까?"

"시꺼, 인마. 니가 내 기분을 알아?"

 

소대원들의 위로도 내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진 못했다.

 

전쟁 중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이 가슴 깊은 빡침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내 휴가가......."

 

튀니지 전역이 종결된 직후에도, 나는 고대하던 휴가를 나갈 수 없었다.

 

"멀쩡하게 잘만 걸어 다니는데, 휴가라고? 완전히 다 나은 것 같은데, 굳이 갈 필요가 있나?"

 

단지 멀쩡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가는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얘기라도 하지 말던가(물론 휴가 얘기를 꺼낸 사람은 대대장이 아니라 군의관이지만).

 

왜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알 것 같다.

 

괜히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살다가 휴가가 증발해버린 그 허탈감이란 참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X발.

 

"에휴,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남자들밖에 없는 칙칙한 곳에서 아까운 시간만 날리는지 원."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저희라고 뭐 좋다고 여기에 있는 줄 아십니까?"

"헛소리 말고, 엔진 정비 끝냈냐? 곧 점심시간인데, 늦게 끝나면 식은밥 먹는다."

"말만 하지 마시고 조금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아이고, 허리야.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현기증이 나네?"

"허리랑 현기증은 관계없습니다만?"

 

가필드가 보내는 정중한 항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나는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곧 점심시간이니, 어디 적당한 곳에서 시간이나 때워야지.

 

비록 휴가는 취소됐지만, 연대는 튀니스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반면, 운이 나쁜 부대들은 튀니지 전역이 종결되자마자 리비아 전장으로 끌려갔다.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리비아에서 피똥 싸고 있을 아군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곳 튀니지에선 오히려 너무 일이 없어서 문제일 정도로 평온하다.

 

하루 일과?

아침에 일어나서 점호받고, 밥 먹고, 체단이랑 정비나 하면서 시간 때우다가 다시 밥 먹으면 끝. 참 쉽죠?

 

그동안 전장에서 생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치곤 제법 나쁘지 않다.

 

이런 나날들이 전쟁 끝날 때까지 쭉 계속되면 좋으려만.

 

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알 거다.

 

세상일은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

 

1942년 6월 28일.

 

"전차 전진!"

"이번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모스크바에서 보낸다!"

 

독일군의 하계 대공세, 블라우(Blau, 청색) 작전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작년에 실패했던 모스크바의 완전 점령.

 

실제 역사에선 모스크바 점령이 아닌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유전지대의 장악이 작전목표였던 것을 감안하면 180도 달라진 셈이다.

 

공격의 선두에는 장포신 75mm 주포를 장착한 독일군 최강의 전차, 4호 전차 F2형들이 선두에 섰다.

 

겨울과 봄 사이, 독일군은 소련의 T-34, KV-1과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4호 전차의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고, 롬멜과 DAK의 애원을 애써 무시하면서까지 이들 4호 전차들을 비축했다.

 

"경보! 파시스트 놈들의 전차들이다!"

"이런 썅! 죄다 장포신 4호들이다!"

 

비록 DAK는 항복하고 튀니지는 무너졌지만, 아껴뒀던 수천 대의 4호 전차들은 공세의 선두에 배치되어 소련군 전차병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T-34와 KV에 장착된 76mm 42구경장 주포는 사거리도 장포신 75mm보다 짧고, 관통력도 500m에서 75mm를 관통하는 게 전부였다.

 

반면 4호 전차에 장착된 75mm 43구경장 주포는 76mm 주포보다 사거리도 훨씬 길고, 1km에서 82mm의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다!

방호력과 기동성에선 T-34에 밀리지만. 긴 사거리와 높은 명중률, 그리고 뛰어난 관통력이 모든 단점을 커버했다.

 

"2시 방향에 T-34! 거리 720! 철갑탄 장전!"

"장전 완료!"

"발사!"

 

우렁찬 포성을 토해내며 날아간 75mm 철갑탄은 바늘이 창호지를 뚫듯 T-34의 전면장갑을 정확히 꿰뚫었다.

 

"명중! 적 전차 격파!"

"이게 전차지!"

 

조준경으로 적 전차 파괴를 보고하는 포수의 목소리엔 희열이 넘쳤다.

 

이제까지 단포신 4호 전차만 타며 중장갑의 T-34와 힘겨운 싸움을 해온 그들에겐 장포신 75mm 주포의 위력은 하늘이 주신 선물처럼 느껴졌다.

 

최신형 무기들을 앞세운 독일군을 앞을 가로막는 소련군을 대나무처럼 토막 내며 진격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군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필사의 신념으로 적과 맞섰지만, 용기와 투지만으론 거대한 적의 군세를 막을 수 없었다.

 

"도, 독일군이 드네프르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제133소총병사단과 제24전차사단이 괴멸당했습니다!"

"제22기계화군단으로부터 퇴각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안 돼! 무조건 버티라고 해! 내 허가 없이 퇴각했다간 전부 다 총살이야!"

 

쏟아지는 사단, 군단들의 전멸 및 퇴각 허가 요청에 스탈린은 신경질을 내며 악을 썼다.

 

"무능한 쓰레기 녀석들! 겨울과 봄 사이에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밀린단 말인가?!"

 

분노에 사로잡혀 고함을 지르는 스탈린에겐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다.

주코프도, 티모셴코도, 심지어 스탈린과 오랜 절친인 보로실로프도.

 

"앞으로 안 되겠어. 지금 전군에 명령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고! 허가 없이 퇴각하는 부대 지휘관들은 모두 총살하고, 병사들은 형벌부대로 격하시키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몰로토프!"

"예, 옙!"

"당장 미국 대사를 만나서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도록. 지금 보내주는 물량만으론 부족하다고 말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란 말일세."

"노, 노력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크렘린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들판에서 독일과 소련의 수십만 대군이 맞부딪히는 동안, 아프리카에선 연합군이 리비아의 추축군에게 일격을 먹이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 연대에겐 본국으로 귀환 명령이 내려졌다.

 

아직 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귀환 명령이 내려지자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아무튼 지긋지긋한 아프리카를 떠나 그리운 고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드디어 이 X 같은 아프리카와는 작별이구나!"

"이제야 여자들 치맛자락 구경 좀 해보겠네."

"어쩌면 휴가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다들 그리운 조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어 들떴다.

 

무엇보다도, 영국에 간다는 뜻은 우리가 리비아 전장에 투입될 일이 아예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더욱 기뻤다.

 

우린 전장이 아니라면 어딜 가던지 대환영이었다.

 

"소대장님은 영국에 가시면 뭐부터 하실 겁니까?"

"글쎄다. 일단 주말이 되면 바로 외출 나가서 여자들 구경이나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는 애덤, 너는?"

"전 일단 그동안 못 먹어왔던 것들부터 먹어볼까 합니다. 아이스크림이라던지, 케이크라던지...... 솔직히 너무 많아서 뭘 먼저 먹어야 할지 감이 잡힙니다."

"요즘 전시라 가격이 장난 아닐 텐데, 봉급으로 감당할 수 있겠냐?"

"어차피 전쟁터에선 쓸 곳도 없어서 잔뜩 모아놨잖습니까?"

"참, 그렇지. 하긴 여기선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으니 말이야."

 

토마스는 휴가를 받아 여친 집에 놀러 갈 생각이 한가득이고, 잭슨은 외출이나 외박 때 여자를 꼬셔 여친을 사귈 욕망에 부풀어 있었다.

 

게이츠 원사와 무어 소령, 브랜슨 대령도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리 얘기했듯이, 높으신 분들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우리를 영국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다.

 

***

 

"리비아까지 무너지면, 적들도 다음 목표가 이탈리아가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우리는 독일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프리카가 무너지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탈리아가 위협받게 된다.

 

베를린과 로마의 전략가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 점은 충분히 주의하고 있을 터.

 

따라서, 적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적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쏟는 관심=병력이니, 그걸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영국 왕족으로 해군 준장이자, 영국 연합작전사령관인 루이 마운트배튼은 유럽 지도 앞에 서서 분필을 들곤 시칠리아에 X 표시를 했다.

 

"일단 시칠리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을 물색해야죠. 총리께선 어디를 후보에 두고 계십니까?"

"음, 크레타가 어떻습니까?"

 

크레타는 그리스 영토로, 그리스는 독일과 동맹국이었다.

 

크레타를 점령하면, 터키를 압박함과 동시에 독일군의 관심을 발칸반도로 돌릴 수 있다.

 

잘하면 크레타를 발판 삼아 루마니아의 플로에스티 유전을 폭격하여 독일의 전쟁 수행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더욱 최고는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같은 발칸반도 국가들을 추축 동맹에 탈퇴시켜 독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운트배튼은 처칠의 구상에 회의적이었다.

 

"크레타도 탐스러운 목표이긴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어째서요?"

"크레타가 중요한 요충지이고, 언젠가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긴 합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우선 크레타처럼 거대한 섬을 점령하려면 수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한데, 이 경우 시칠리아 상륙작전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악의 경우 추축군이 지중해 전체에 방비태세를 강화하게 될 수도 있죠. 따라서 지중해와 거리가 멀고, 동시에 향후 시행될 서유럽 본토 상륙에 도움이 되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점찍어둔 곳은 바로 여깁니다."

 

마운트배튼의 손은 북프랑스 해변을 향했다.

 

"프랑스 북부에 대한 기습을 가해 독일군의 관심을 지중해에서 돌리는 겁니다. 덩달아 북프랑스 해변에 주둔 중인 독일군의 방어 태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아군의 상륙작전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죠."

"호오?"

 

나쁘지 않군.

마운트배튼의 제안이 마음에 든 처칠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은 의견이군. 그럼, 후보로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까?"

"예. 저희 분석가들이 고심 끝에 내놓은 세 후보지가 있습니다."

 

마운트배튼은 분필로 북프랑스 해변 세 곳에 O 표시를 했다.

 

"칼레, 디에프, 노르망디. 이렇게 총 세 곳입니다. 우선, 칼레는 거리가 가장 가까워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 데다, 지원도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독일군의 방어 태세가 철저한 곳이죠. 디에프의 경우 칼레보단 멀지만 노르망디보단 가깝습니다. 마지막 노르망디는 앞의 두 후보지보단 거리가 멉니다만, 그만큼 독일군의 관심도 앞의 두 곳보다는 덜합니다. 즉, 방어 태세도 두 곳보다 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으으음."

 

세 곳 모두 각자 장단점이 너무나도 확실하다. 이것 참 고민되는구만.

 

"일단 칼레는 힘들 것 같군. 거리가 가깝지만 그만큼 독일군도 득실거릴 테니, 까딱 잘못하다간 해변에 발을 딛기도 전에 물고기 밥이 될 수도 있겠어."

"그렇죠."

 

마운트배튼은 즉시 칼레에 X 표시를 그렸다.

 

남은 후보지는 이제 두 곳.

 

"노르망디는 너무 멀어요. 어차피 이번 작전의 목표는 위력정찰 겸 독일 놈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니, 굳이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노르망디도 아웃.

 

최후까지 살아남은 선택지는 디에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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