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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6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4화

124화 아프리카 군단의 최후 (4)

 

 

엘 파스 함락은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공세로 마지막 여력을 모두 소진해버린 독일군은 더 이상 아군의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독일군 공병들이 피땀 흘려 만든 콘크리트 벙커는 마틸다 헤지호그에 의해 격파되었고, 88은 공격 개시 전에 이루어진 공습과 뒤이은 포격으로 깡그리 박살.

 

사기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독일 병사들은 우리 전차들이 참호를 넘자마자 깔끔하게 GG를 쳤다.

 

"항복한다, 영국인들. 쏘지 마라."

 

얌전히 무기를 내려놓고, 급조한 백기를 들어올리는 독일군을 보니 그동안의 사투가 무색해질 정도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던 애들 맞아?

 

"저 녀석들, 사실 이탈리아군 아닙니까?"

"군복을 보면 독일군 맞는데."

"군복만 독일 놈들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토마스 눈에도 이 광경이 믿을 수 없는 듯하다.

 

그럴 만도 하지.

언제는 사자처럼 싸우던 놈들이 이제는 온순한 양이 되어 항복하는 모습이라니. 나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독일군이 이 정도인데 이탈리아군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아예 연대장이 직접 부하들을 대동한 채 항복했다. 항복하는 독일군 사이에도 장교가 섞여 있지만, 영관급 장교는 아직 없었다.

 

순조롭게 엘 파스를 점령한 후에도, 우린 쉴 수 없었다.

 

엘 파스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하기가 무섭게 사령부로부터 곧장 다음 명령이 떨어졌거든.

 

'엘 파스 장악은 후속 부대에 맡기고, 전 부대는 즉시 튀니스로 진격할 것'

 

"......몽고메리 이 양반, 정말로 저녁은 튀니스에서 먹을 생각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다.

 

아무리 사상자가 적다곤 하지만 쉴 시간은 줘야지! 밥도 먹어야 하고!

 

하지만 명령은 명령.

 

게다가 연대본부에서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몽고메리가 직접 부대를 돌아다니며 빨리 이동하라고 독촉 중이라고 한다.

 

환장하겠네, 정말.

 

"어쩔 수 없지. 일단 밥부터 먹고, 정비랑 연료 보급 끝나는 대로 출발한다."

 

군단장한테 직접 조인트 까이고 싶지 않았던 브랜슨 대령은 연료 보급이 끝나는 즉시 출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급한 대로 전투식량으로 배급된 스팸을 굽지도 않고 그대로 까서 꾸역꾸역 먹는데, 하늘 위로 아군의 정찰기가 날아왔다.

 

"어? 뭐야?"

 

그런데 이놈, 갑자기 우리 위에 종이를 한 무더기나 뿌리는 것 아닌가.

 

밥 먹다가 난데없이 종이 폭탄을 받은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그것 정체는 다름 아닌 아군이 추축군에 보내는 삐라였다.

 

'당신들은 포위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쓸데없는 저항을 멈추고 항복해라! 우리 대영제국은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당신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줄 것이다!'

 

위의 글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었다.

삐라를 주울 대상이 독일군일지, 이탈리아군이 될지 모르니 한꺼번에 두 나라 글을 삐라에 적는 센스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이걸 왜 우리한테 뿌리냐고. 우리가 독일군이냐?

 

브랜슨 대령도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뿌린 놈 오늘 조인트 까인데에 한 표하겠네."

"저는 제 월급을 걸겠습니다."

 

이런 소소한 일들을 뒤로하고, 대대는 정비와 보급이 끝나기 무섭게 튀니스로 전진했다.

 

***

 

"엘 파스가 영국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각하."

"동시에 캐루안도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들려오는 보고들은 하나같이 어디가 함락되었다, 무슨 부대가 항복했다는 등의 영양가라곤 1도 없는 소식들뿐.

 

롬멜은 태연을 넘어 달관한 듯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최후의 공세가 끝내 실패로 돌아갔을 때부터,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이미 예상하지 않았던가.

 

지휘본부 밖에선 이미 병사들이 각종 기밀문서를 소각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야, 야. 그거 통째로 태우면 잘 안 탄다. 찢어서 태워."

"대위님, 이것도 태웁니까?"

"그건 내가 따로 분류해두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전방의 병사들이 아무리 악착같이 싸운다고 해도, 일주일 뒤에는 이곳도 연합군의 수중에 넘어가리라.

 

롬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렀다.

 

"각하?"

"담배나 한 대 피우지. 담배 있나?"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참모가 건네준 담배를 태우며 롬멜은 지난날의 영광을 떠올렸다.

 

처음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총통 각하의 명령대로 단숨에 카이로까지 진격한다!

 

실제로 그들은 영국군을 무너뜨리고 카이로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에즈 운하를 넘어 아시아 땅도 밟아봤다.

 

병사들은 다음 목표는 바그다드라고 노래를 불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패배의 쓴맛뿐이었다.

 

"허탈하군."

 

튀니지는 사실상 끝났다.

 

리비아가 남아 있긴 하지만, 튀니지를 빼앗긴 상황에서 리비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 달? 두 달?

 

이 순간에도 이탈리아의 수송선들은 리비아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애원하고, 화도 냈건만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솔리니는 튀니지보다 리비아를 더 중시했고, 총통조차 이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눈에 보이는 광경이었다.

 

패배.

 

담뱃불이 손가락을 지지기 전, 롬멜은 꽁초를 멀리 던졌다.

 

"여기서의 전쟁은 졌구만."

 

롬멜은 더는 가망이 없으니, 튀니지에서의 철수를 총통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총통은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가망이 없는 전장을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롬멜은 총통의 답장이 어이가 없었다.

 

튀니지에 포위된 장병들을 탈출시켜야만 이들을 전쟁에 계속 써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총통은 여전히 복지부동이었다.

 

"병사들이 철수할수록, 적들의 진격만 빨라질 뿐일세. 철수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계속 버티는 것이 적들의 진격을 멈추는데 더 효과적이지."

 

총통은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롬멜에겐 비밀리에 시칠리아로 탈출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독일의 전쟁영웅이 포로가 되는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총통이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내 주장을 받아들여 줬으면 소원이 없겠건만.

 

롬멜은 갈등했다.

 

총통의 명령대로 시칠리아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최후까지 남아서 장병들과 함께 할 것인가.

 

"각하, 항구에 각하를 태우러 온 잠수함이 대기 중입니다."

"알고 있네."

"각하의 심정이 어떠신지는 잘 압니다만, 현실은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진심 어린 참모의 말에 롬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철수 작업은 현재 어떻게 되고 있지?"

"부상자들과 중장비 위주로 철수를 진행 중입니다만, 배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총통의 명령으로 DAK 전체가 사실상 발이 묶인 상황이지만, 롬멜의 재량으로 부상병들과 전차, 트럭 등의 중장비 철수는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한 줌도 되지 않는 숫자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전쟁에서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장비를 운용할 인원들의 철수도 함께 진행 중입니다."

"그렇군."

"비상! 비상! 적기 출현!"

 

대화는 영국 폭격기들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롬멜은 참모들과 함께 서둘러 지하실로 대피했다. 그 사이 지상에 남은 병사들은 열심히 대공포를 쏘아댔다.

 

하지만 영국군 폭격기들은 평소와 달리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 대신 삐라를 한가득 투하했다.

 

열심히 핸들을 돌려 적기를 조준하던 방공포병들도, 적기가 투하한 게 폭탄이 아니라 삐라라는 사실을 알곤 잠시 손을 멈췄다.

 

임무를 완수한 폭격기들은 곧바로 기지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땅에 수북하게 쌓인 삐라를 주워 적힌 글을 읽었다.

 

"토미 녀석들, 이미 전쟁에서 이긴 줄 아는가 보군. 폭탄 대신 삐라를 뿌릴 정도니 말이야."

 

지하실에서 나온 롬멜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에 즐비한 삐라 무더기를 응시했다.

 

그 자신도 바닥에 떨어진 삐라를 주워서 읽었다.

 

"각하, 지금 병사들을 시켜 저것들을 모두 치우겠습니다."

"됐네. 그냥 냅둬."

"예?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에 나쁜 영향을......."

"이미 사기가 떨어진 이들에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삐라 줍는 것을 막는다고 해도 떨어진 사기가 되살아날 것 같나?"

 

롬멜의 일갈에 참모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이 맞다.

삐라를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긁어모아 불태운다고 한들,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까?

 

롬멜은 몸을 돌려 지휘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짐은 당번병과 부관이 다 정리해뒀다.

 

"이만 가도록 하지. 여기 더 오래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사막의 여우는 아프리카를 떠났다.

 

수많은 상처와 절망은 품은 채로.

 

***

 

쾅!

 

"여기는 호랑이 1. 호랑이 4, 무슨 일인가?"

-여기는 호랑이 4. 지뢰를 밟은 것 같다. 우측 궤도 손상으로 기동 불가.

"젠장, 또야?"

 

이놈의 지뢰는 툭하면 튀어나와서 골치를 썩게 만들었다.

 

지뢰 때문에 멈춰 선 것도 벌써 세 번째다.

 

엘 파스를 떠나 튀니스로 가는 동안 마주친 적군은 대부분 저항 대신 항복을 택했다.

저항을 시도하던 적군도 포 몇 방 갈겨주니 금방 사기가 꺾여 백기를 들었고.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항복하기 전에 무기들을 죄다 쓸 수 없게 망가뜨리고서야 항복했다.

 

사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놈의 지뢰였다.

 

진격 전에 공병대가 나서서 수색까지 다 끝냈는데도, 툭하면 지뢰가 터져 궤도가 끊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연대본부에선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지뢰로 인해 기동이 상실된 차량과 최소한의 인원을 남기고 본대는 계속 움직이라고.

 

"서둘러라, 승리가 코앞에 있다!"

 

알겠으니까 그 말 좀 그만 하세요, 좀.

오늘 하루에만 스무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네.

 

연대장은 연대장대로 빨리 움직이라고 닥달이고, 군단장이란 인간은 툭하면 무전기로 연설이나 헤대고. 고막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나중에는 하도 지쳐서 아예 무전기를 잠시 꺼버렸다.

 

"마치 훈련 같습니다."

 

잭슨 왈, 훈련도 이보다는 더 박진감 넘칠 거라나? 솔직히 그 말에 동의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 사흘 전까지만 해도 지옥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조용할 줄이야. 앞으로의 전쟁도 죄다 이런 모습이면 소원이 없겠는데."

"제리들도 이제 지친 게 분명합니다. 이 속도라면 금방 베를린까지 가겠는걸요."

"잘하면 크리스마스를 베를린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꿈 깨라. 제리들이 X으로 보이냐? 아프리카는 몰라도, 자기네들 본진인 유럽에선 또 다를걸?"

"아니, 소대장님은 왜 그렇게 매 생각이 부정적이십니까?"

"맞아. 소대장님은 제리들을 너무 고평가하십니다."

"이것들이? 현실적으로 말한 것뿐인데 뭐가 어째? 니들이 너무 걱정이 없는 거겠지."

 

어디까지나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부하들은 이번에도 아주 발작을 일으켰다.

 

녀석들이 들으면 놀랄 말이겠지만, 아프리카는 사실 전채 요리에 불과하다.

 

히틀러도, 국방군 전략가들도 모두 아프리카를 주 전장이 아닌, 이탈리아 뒤치다꺼리 정도로만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발을 딛자, 그들은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진심으로 맞섰다.

 

본 요리인 유럽 전장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얼마나 개고생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구만.

 

시칠리아부터 안치오, 몬테카시노, 노르망디, 팔레즈, 아르덴 같은 유럽의 대전장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 들어 머리가 자주 아픈 것 같다.

특히 부상을 입은 뒤로는 더욱.

 

나중에 군의관한테서 두통약이라도 받아올까 생각하는 와중에 표지판이 보였다.

 

작은 승용차만 한 표지판에는 '튀니스까지 앞으로 15km'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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