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3화
123화 아프리카 군단의 최후 (3)
미군에게 측면을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2시간 뒤.
이번에는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던 15기갑사단 선봉대가 궤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나마 미군이 연료 보급으로 진격을 잠시 멈춘 덕분에 사단의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진짜 고난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틀 뒤에는 영국군 또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 부대에서 적군이 반격을 개시했다는 보고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연합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던 롬멜이었지만, 적들이 이렇게나 빨리 반격을 가해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빌어먹을 놈들. 학습효과가 이렇게나 빠르다니."
이미 최전방에선 지원과 퇴각을 요청하는 절규에 가까운 보고들로 가득했다.
이미 하늘에도 가증스러운 연합군 전투기들이 마구 날아다니고 있었다.
"각하, 지금이야말로 퇴각할 때입니다. 더 지체하다간 완전히 끝입니다!"
공세를 주장하던 이들도 지금은 침묵을 지켰다. 이제는 정말로 퇴각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알겠네. 퇴각하도록 하지. 전군에 적의 추격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방어선으로 퇴각하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롬멜의 입에서 퇴각이란 말이 나온 후에야 참모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허나 안도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한들, 적들이 독일군의 퇴각을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
"각하, 독일군이 공격을 멈추고 퇴각 중이라고 합니다."
적이 퇴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몽고메리의 사령부에선 안도의 기색이 돌았다.
급한 위기는 넘겼다는 안도감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가.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러나 몽고메리는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며, 지도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미군이 제때 지원해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피해가 더 커졌을지."
눈치 없는 참모 중 하나가 '미군'을 입에 담았다.
그제야 몽고메리는 지도판에서 눈을 뗐다.
"미군이 뭐? 어차피 그놈들의 도움이 없었어도 우린 독일 놈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네. 자네는 우리 병사들의 투혼과 노고를 무시하는 건가?"
"예? 저, 절대 아닙니다, 각하!"
"그럼 다시는 그런 말 입에 담지 말게! 가뜩이나 독일 놈들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가뜩이나 자존심 세고, 특히 미군을 한 수 아래로 보던 몽고메리에게 미군의 도움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는 말은 제대로 그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었다.
젠장. 그 무식하고 덜떨어진 양키들한테서 도움을 받는 지경이라니.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공격해왔을 때보다 미군이 지원 왔다는 소식에 더 큰 짜증과 위기를 느꼈다.
기자들이 이를 두고 뭐라고 기사를 써댈지 생각하니, 온몸에 열이 뻗칠 지경이었다.
얼마 전에야 겨우 총 쏘는 법을 깨우친 미군이, 3년 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독일군과 싸워온 영국군을 누르고 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진실을 아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우매한 대중은 미군이 도와줘서 영국군이 겨우 이겼다고 생각할 테고!
"양키...... 아니, 미군은 현재 어디에 있지?"
"현재 캐루안으로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벌써?
빌어먹을.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미군이 캐루안 진공을 시작했다는 말에 몽고메리는 조바심이 났다.
"모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도록."
지도를 매섭게 노려보던 몽고메리가 입을 열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경청했다.
"늦어도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는 엘 파스를 손에 넣도록 한다. 알겠나?"
"하지만 각하, 지금 피해를 입은 부대의 재편성과 보급이 아직 진행 중입니다. 따라서 내일까지는 점령이 힘들 것으로 예상......."
"그래서? 그런 이유로 미군이 캐루안에 깃발을 꽂을 때까지 우린 손가락이 빨고 있어야 한다는 소린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군보다 먼저 엘 파스를 점령해야 하네! 더는 말하지 않을 테니 묻지 말도록. 무조건, 무조건 엘 파스를 점령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이것은 대영제국 육군의 명예를 건 일이니까!"
***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소대장님."
"그래, 이 녀석들아. 너희들도 용케 살아 있었구만."
오랜만에 만난 소대원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녀석들도 고생 꽤나 한 게 분명했다.
"부상자는 전투 임무에서 제외라고 들었는데, 그새 다 회복되신 겁니까?"
"그럴 리 있겠냐, X발."
애덤의 질문에 나는 절로 한숨을 내뱉었다.
휴,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제리들이 쳐들어오니 움직일 수 있으면 모두 나와서 경계근무 서라고 하는데, 갑자기 인원 부족하다고 반강제로 트럭에 태워진 거 있지. 정신 차려 보니 전장 한복판이고, 중대장님 만나서 다시 전차에 탔다."
"어...... 그럼 다시 복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직 공식적으로 환자인데."
"나도 그러고야 싶지. 그런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쉽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이제까지 잘 싸우던 놈이 이제 좀 상황이 진정됐다 싶으니까 '저 원래 환자니까 슬슬 돌아가 볼게요.'라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냐?
'진짜 아서 그레이'라면 가능했겠지만, 나는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일반인이다.
당연히 내 낯짝은 그 정도로 두껍지 않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영국행 배에 타고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제리 새끼들 때문에 휴가도 날아가고, 이게 뭐람.
"장교들은 모두 집합!"
브랜슨 대령이 나타나 소집령을 내리자 몸이 절로 반응했다.
휘하 장교들이 모두 모이자 군단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문서를 읽어주었다.
"현 시간부로 전 부대는 최대한 빨리 정비 및 재편성을 마치고 엘 파스로 진격하라는 군단장님의 명령이다."
"지금 말입니까......?"
"아까 전에 뭐라고 들었나? 당연하지. 현 시간부로 제1대대는 30분 내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엘 파스로 진격한다. 서두르도록."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제는 30분 뒤에 출발이다. 또 개고생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어질어질했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좋으려만.
다른 장교들도 생각이 비슷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3중대의 한 중위가 손을 들고 말했다.
"하지만 대대장님, 지난 전투로 인해 손상된 장비들의 보충이 완료되지 않은 부대도 있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예외는 없다는군. 정원이든, 정원이 아니든 최대한 빨리 준비 마치고 전진하라고 하네. 이미 미군은 캐루안으로 진격 중이라 하고. 위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결론이 났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나?"
브랜슨 대령도 할 말은 많은데,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럼 말 다 한 거지.
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명령서에 '최대한 빨리'나 '미군은─'이라는 말이 들어간 걸로 봐선 틀림없이 몽고메리의 짓이다. 분명해.
이번에도 미군보다 진격이 늦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부하들을 닥달한 것이 분명하다.
빌어처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아무리 전공 세우기에 눈이 멀었다지만, 조금이라도 숨 좀 돌리면 어디 덧나냐?
***
영국군 내부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터져 나올 때, 독일군 진영에서도 비명과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야심 차게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 회심의 공세를 가했던 독일군.
처음에는 그 도박이 나름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독일군의 예상보다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경험과 숙련도에선 결코 연합군에 뒤지지 않는, 되려 연합군보다 다소 우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독일군이었지만 보급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미군과 영국군이 본국으로부터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연료와 탄약, 식량을 보급받고, 결원이 생기는 즉시 신병으로 빈자리를 채워나갈 때.
독일군은 쥐꼬리만 한 보급을 받으며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롬멜의 사정이 악화한 데에는 무솔리니의 잘못이 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비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에티오피아와 이집트를 잃었는데, 리비아까지 잃을 수 없어!"
리비아 못 잃어, 식민지 못 잃어!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헛된 야욕에 눈이 먼 무솔리니의 똥고집 때문에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향하는 보급품과 지원 병력 상당수가 튀니지가 아닌 리비아 주둔군으로 보내졌다.
덕분에 리비아 주둔 추축군은 나름대로 풍족을 누리며 이집트 방면 영국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튀니지의 추축군은 섬멸 직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젠장! 튀니지가 뚫리면 리비아는 무사할 줄 아나? 우리한테도 보급이 필요하다고!"
롬멜은 이탈리아 정부에 튀니지로의 보급을 늘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이탈리아의 답변은 묵살이었다.
"두체, 튀니지 주둔 병력이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하던데요."
"총통.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해군이라고 그냥 놀고 있는 줄 아십니까? 애초에 보급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는데 이를 어쩌겠습니까?"
"그 보급조차 대부분 리비아로 가고 있지 않소. 물론 리비아는 이탈리아의 강역이니, 두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오만, 그래도 튀니지도 조금 생각해주셨으면 하오."
보다 못한 히틀러까지 나서서 무솔리니를 달래고자 했지만,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튀니지보다 리비아 보급에 더 중점을 뒀고, 이 사실을 아는 롬멜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도 아프리카 전선을 부차적인 전선으로만 간주하고 있었기에 지원을 늘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관심사는 소련이지, 아프리카 따위가 아니었다.
"아프리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소련이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이제 곧 여름인데, 저 열등한 슬라브 놈들에게 한 방 먹여야지. 비록 지난 겨울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놈들의 모가지를 꺾어버리고 말겠네."
아프리카는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기로 합의해둔 지 오래.
따라서 열심히 싸워 전과를 올린다고 해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죄다 남의 나라 땅이 된다.
그런데 소련은?
아프리카와 달리, 전쟁이 끝나면 정복된 소련의 영토는 모두 독일 땅이 되는데?
동맹국의 식민지냐, 게르만 후손들이 살아갈 레벤스라움이냐.
이 둘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후자였다.
"아프리카 문제는 잠시 재껴두고, 동부전선부터 논의해봅시다. 장군들은 어디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당연히 모스크바가 아니겠습니까."
히틀러의 물음에 구데리안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스크바를 언급했다.
모스크바.
유럽 러시아의 수도이자 소련의 모든 철로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
이곳을 점령하면 적들의 사기를 꺾음과 동시에 소련군에게 엄청난 교통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
모스크바를 잃었으니 소련군은 이동에 큰 제약이 걸리게 되고, 그렇게 발이 묶여 약화한 소련군을 각개 격파한다.
그런 다음, 목표인 우랄산맥까지 진격해 광활한 유럽 대륙을 손에 넣는 것이다!
구데리안의 설명을 들은 히틀러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모스크바보단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 남부를 공략하고 싶었지만, 구데리안의 말도 일리가 있는 데다 그가 여태껏 거둔 전과를 생각하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됭케르크의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안기고, 전차의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모자라 동부전선에선 직접 스몰렌스크를 손에 넣지 않았던가.
비록 예정보다 훨씬 늦게 점령하긴 했지만, 다른 전선들도 모두 죽을 쒔으니 구데리안을 탓할 수도 없었다.
소련군이 예상보다 더 강력했다고밖에.
"좋소. 그럼, 그래도 진행하지."
이로써 1942년 독일군의 하계 대공세의 목표는 작년과 같은 모스크바로 정해졌다.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소련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는 동안.
아프리카 튀니지 전장에선 추축군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