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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2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0화

120화 여우, 사자를 물다 (3)

 

 

"전원 하차!"

"하차!"

 

트럭이 멈춰서기가 무섭게 게이츠 원사가 고함을 치며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도 마법에 홀린 듯 일제히 밖으로 뛰어내렸다.

 

"뭐하십니까, 대위님? 얼른 내리시지 않고?"

"좀 봐줘요, 난 원래 환자라고."

"전쟁영웅께서 무슨 나약한 소립니까. 빨리 내리십쇼!"

 

게이츠 원사의 채근에도 나는 조심스레 발판을 딛고 내렸다.

 

긴장해서 그런지 총을 맞은 부분이 욱신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대대 주둔지에는 정비중대밖에 없었다.

 

이미 대대는 최전선으로 달려가 독일군과 포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결국, 나와 게이츠 원사는 졸지에 보병 신세가 되어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부상병인데도 반강제로 전장에 끌려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젠 전차병에서 일반 알보병으로 전직이라니.

이 무슨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잠깐, 거기 누구야?"

 

후방에서 다가오는 우릴 본 누군가가 우릴 향해 총을 겨눈 채 소리쳤다.

 

"레몬!"

 

갑자기 왠 레몬? 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순간 그가 암구호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갑자기 끌려와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레몬!!"

"아, 암구호 미숙지!"

"제리들이다!"

 

타타탕!

 

녀석은 무작정 우릴 향해 총알을 갈겨댔다.

뒤이어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총알에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갑작스레 전쟁터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젠 아군한테 공격까지 당하다니.

 

"잠깐, 잠깐만! 사격 중지! 저 친구들, 아군이야!"

 

다행히 장교가 나타나 우릴 알아보곤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겐 후방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한다는 연락이 전해진 상태였다.

 

"지휘관은 누구냐?"

"현재는 나다!"

 

조금 전에 봤던 대위는 우릴 이곳에 내려놓자마자 다른 구역으로 가버렸기에, 현재는 내가 최선임자였다.

 

"그러니까 누군데? '나'라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제1전차대대 소속 아서 그레이 대위입니다!"

"아서 그레이? 아서 그레이라고?"

 

정체를 밝히자, 내게 신원을 요구하던 장교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혹시 그 아서 그레이와 동명이인인가요?"

"아뇨...... 본인 맞는데요?"

"그런데 왜 남들처럼 걸어 다니십니까? 전차병이신 줄 알았는데."

 

그는 내가 전차 대신 일반 보병들처럼 리-엔필드를 든 채 걸어 다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정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저희는 어느 구역을 맡으면 됩니까?"

"우측 구역을 맡아주십쇼. 원래 2소대가 맡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적 포격이 그리로 집중된 탓에 지금은 텅 빈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원사!"

"예, 대위님."

 

게이츠 원사는 즉시 병사들을 통솔해 우측 구역으로 이동했다.

 

나는 행렬의 맨 뒤에서 따라갔는데, 먼저 간 사람들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와, X발! 이게 뭐야?"

"우우욱!"

 

참호 바닥과 그 주위에는 사람의 살점과 핏자국이 널려 있었다.

 

조금 전의 장교가 말했던 포격으로 전멸한 2소대 병사들의 잔해물들이었다.

 

실전 경험이 없던 병사들은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몇몇은 구토를 일으켰다.

 

"젠장 할,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게이츠 원사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에, 초짜 병사들은 완전히 혼이 나가버렸다.

 

몇 명은 당장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무 곳에나 자리 잡아. 사격 명령 떨어질 때까지 쏘지 말고 대기해. 다들 총 쏴봤으니까 그 정도는 알겠지?"

"예, 옙."

"원사는 우측 구역을 맡아주세요. 저는 좌측을 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위님."

 

전방에선 폭발음과 기관총 사격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동시에 전차의 엔진소리도.

 

참호 안에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휴가나 제때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막상 전장에 오니 휴가 생각은 쑥 들어가고 그저 걱정만 앞섰다.

 

전차병인데 난데없이 알보병 신세라니.

게다가 주어진 무기라곤 소총과 수류탄이 전부.

 

대전차포는 한 대도 없고, 유일한 대전차화기라곤 이미 퇴물이 된 지 오래인 보이즈 대전차소총 한 정이 끝이었다.

게다가 방어 병력 중 일부는 오늘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행정병과 취사병들이다.

 

독일군이 쳐들어오면 막아낼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 전멸이나 피하면 다행인 수준이다.

 

"후우,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자연스레 입에선 한탄만 나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닌 듯했다.

 

평소엔 타자기를 치거나, 칼로 양파 껍질을 벗겨내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총을 들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최전선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나야 원래 전투병과인데다 여러 번 전투를 치러봤으니 그러려니 해도.

애초에 전장에 나갈 일이 없었던 저 친구들은 오죽할까?

 

"야, 무섭냐?"

 

나는 가까이에 있는 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계급은 일병이고, 뿔테안경을 썼으며 내 또래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무섭냐고 물었는데."

"예, 무섭습니다."

 

칼같이 대답하는 걸 봐선 확실히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그럴만도 하지.

 

"대위님은 안 무서우십니까?"

"나도 무섭지. 하지만 어쩌겠냐. 전쟁터에 온 이상, 무서워도 참아야지."

"전 힘들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 보직은 뭐냐? 편견일지 몰라도 생긴 것만 보면 타자기 하난 잘 칠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전 취사병입니다."

 

뭐야, 취사병이었어?

 

얼굴은 행정병처럼 생겼는데, 정작 보직은 취사병이라니.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구만.

 

아무튼 녀석은 나와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이 많이 풀린 듯했다.

 

우린 어느새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대위님은 전쟁이 끝나면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다. 군대에 계속 남을지, 제대해서 집에 갈지 고민 중인데. 너는?"

"저는 바로 제대할 겁니다."

"그래? 그다음에는?"

"런던에 아버지 지인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거기에 들어갈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돈은 많이 준다더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일하는 것보단 많이 받지 않겠습니까."

 

취사병은 자신이 입고 있는 군복을 가리켰다.

 

"그야 그렇겠지. 참, 네 이름을 아직 못 들었네. 이름이 뭐냐?"

"제 이름은──."

"경보! 제리들이다!"

 

바로 그때, 독일군이 나타났다.

 

독일군은 장갑차 서너 대를 대동한 채 나타나 기관총을 쏘며 공격해왔다.

 

"병사들은 아직 쏘지 마라! 더 끌어들여야 해!"

"대전차소총 발사!"

 

보이즈 대전차소총이 불을 뿜자, Sd.Kfz 251 장갑차의 전면에서 불꽃이 튀었다.

 

13.9mm 총탄을 맞은 장갑차는 곧바로 정지했고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좋아, 바로 그거야!"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맹렬한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필시 MG34나 히틀러의 전기톱으로 불리우는 MG42였다.

 

환성을 지르던 병사 한 명이 기관총에 얼굴을 난사 당해 목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나는 기관총 섬광이 이는 곳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총알이 포방패를 맞곤 튕겨 나갔다.

 

자신들이 쏜 포탄이 튕겨 나가는 광경을 본 적 전차병들이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다른 장갑차들도 일제 사격을 가했기에 우리는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대전차소총 사수가 2탄을 발사해, 독일군의 기관총좌 하나를 침묵시켰다.

 

소총탄은 튕겨내는 포방패도, 대전차소총탄은 막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4대 중의 장갑차 중 한 대를 간신히 제거한 것에 불과했다.

아직 우리 앞엔 3대의 장갑차가 남아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전차소총 사수를 향해 독일군의 사격이 집중되었다.

 

사수는 온몸에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졌고, 죽은 사수를 대신 해 소총을 잡으려던 병사도 곧 같은 신세가 되어 나자빠졌다.

 

독일군 병사들도 장갑차에서 일제히 하차하여 참호를 향해 다가왔다.

 

고개를 내밀어 사격하던가, 수류탄을 던지던가 해야 했지만.

저놈의 기관총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대위님, 아무래도 저희 X 된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라곤 전혀 모를 것처럼 보였던 게이츠 원사도 얼굴이 굳어있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이때, 한 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상체를 내밀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에 맞은 독일군 두 명이 나자빠지자, 일순간 독일군의 사격은 수류탄을 던진 병사에게로 집중되었다.

 

"크하악!"

 

용감한 병사는 자신의 용기에 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고개를 내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모두 수류탄을 던져라!"

 

게이츠 원사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내밀어 수류탄을 투척했다.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고, 참호를 향해 다가오던 독일군 십수 명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맛이 어떠냐, 소시지 새끼들아!"

 

그렇게 독일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개뿔.

 

놈들은 오히려 더 격렬하게 사격해왔다.

 

우리는 다시 두더지처럼 참호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위님, 이제 저희 어떡합니까?"

 

한 병사가 내게 소리쳐 물었다.

 

나도 모른다고, 젠장!

이렇게나 X 된 상황은 처음이란 말이야!

 

어떡하지, X발? 이대로 가다간 전멸은 시간문제다. 항복해야 하나?

 

그런데 가만.

나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상태라 항복하면 그건 그거대로 X 되는데?

 

물론 죽는 것보다 낫겠지만, 만약 저들이 나를 이탈리아군에게 넘기기라도 한다면 진짜 X 된다.

 

차라리 죽은 척을 해야 하나?

죽은 척을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않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에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쾅!!

 

무자비하게 기관총을 쏴대던 독일군 장갑차가 폭발하면서 연기를 내뿜는 것이 아닌가.

 

이어 독일군도 뭔가를 발견하곤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군 전차들입니다!"

"살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적적으로 아군 전차들이 나타난 것이다!

 

***

 

"음, 그래. 잘 알겠네. 모쪼록 조금만 더 수고하게."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부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한 롬멜은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은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린 채 독일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병사들이 수거한 영국군의 무기들 중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 무장하고 있었다.

 

"각하, 좋은 소식입니다. 제115기갑척탄병연대 선봉대가 영국군의 보급부대를 급습해 차량과 물자 상당수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좋아. 못해도 2개 소대는 걸어서 퇴각할 일이 없어졌군. 훌륭해."

 

롬멜은 머리를 굴려 이다음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참모 일부는 이쯤 되면 충분히 적에게 타격을 입혔다며 방어선으로 도로 물릴 걸 건의했다.

 

하지만 다른 참모들은 적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 더욱 더 몰아붙여야 더 큰 전과를 거둘 수 있다며 공격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서 만족하고 퇴각해 전열을 가다듬느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공격을 계속해 더 큰 타격을 입힐 것인가.

 

롬멜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민했다.

 

"미군 일부가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음."

"각하, 이제 슬슬 철수하심이......."

"무슨 말이오. 적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 공격해야지. 여기서 괜히 물러났다가 적들이 전력을 추스를 기횔 주면 어쩌자는 거요."

"그러니까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오! 우리가 놈들보다 유리할 때 퇴각해야지, 적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올 때 퇴각을 하면 너무 늦소이다!"

"조용. 결정은 내가 하네."

 

롬멜의 일갈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참모들이 즉시 입을 닫았다.

 

롬멜이 고민하는 동안, 하늘에선 공중전이 벌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치열한 싸움 끝에 스핏파이어 2기가 격추당했다.

승자들은 날개를 좌우로 흔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대로...... 공격을 계속한다."

"각하!"

"알고 있어 나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우린 두 번 다시 놈들에게 같은 피해를 줄 수 없네. 적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줄 기회는 바로 지금이란 말일세!"

 

롬멜의 결정에 따라 독일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전차가 튀니지의 들판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풍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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