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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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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3화

 143화 몰락의 서막 (4)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시칠리아에서 수천 km 떨어진 러시아의 동토에서도 피 튀기는 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종수, 정지!"

 조종수가 전차를 멈춰 세우는 짧은 시간 사이, 전차장 비트만 SS 소위는 적과의 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전장에서 수차례 실전을 겪은 그는 이미 사단 최고의 베테랑 전차병으로 거듭나 있었다.

 "볼, 2시 방향에 T-34다. 거리는 800."

 "조준했습니다!"

 약실에는 이미 철갑탄 한 발이 장전된 상태였다.

 "발사!"

 우렁찬 굉음을 일으키며 발사된 88mm 철갑탄은 T-34의 경사장갑을 단숨에 관통하여 유폭으로 몰고 갔다.

 단 한 발만으로 T-34는 포탑이 차체와 분리되고, 차체도 완전히 분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명중. 아주 가루가 됐군."

 비트만은 매번 88의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몰았던 3호 돌격포로 T-34를 격파하기 위해선 측면이나 후면을 노리거나, 근거리에서 포탑링 같은 약점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쏴야만 했는데, 이 88은 명중만 했다 하면 격파였다.

 캉!

 "이런, 측면에 대전차포다! 차체 돌려!"

 측면에서 발사된 소련군의 76mm 포탄은 티거의 장갑판에 겨우 흠집만 남기고 튕겨 나갔다.

 비트만은 번개처럼 반응해 적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적은 5시 방향에 있다! 거리 600, 유탄 장전!"

 "유탄 장전 끝!"

 "쏘아!"

 일격에 적 전차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대전차포 진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일으키는 거대한 화염이 진지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했던 스탈린그라드 음악학교의 학생들은 티거의 일격에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88도 88이지만, 티거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두터운 장갑이었다.

 차체 전면이 100mm, 측후면조차 80mm나 되는 중장갑을 두른 덕분에, 어떤 대전차화기에도 거의 무적에 가까운 안전을 보장했다.

 T-34에 장착된 76mm 주포로 티거의 측면을 뚫기 위해선 못 해도 400m 안까지는 접근해야 했고, 정면에서는 100m 안에서나 겨우 가능했다.

 그전에 티거에게 격파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만.

 허나 무적의 티거라 할지라도,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2시 방향에 KV-1이다. 거리 700, 조준!"

 "조준 끝!"

 "쏘아!"

 차체 하부에 88의 직격을 받은 KV-1은 불타는 관이 되어 정지했다.

 그러나 KV-1 뒤에선 새로운 T-34 서너 대가 나타나 비트만의 티거를 향해 주포를 쏘며 돌격해왔다.

 "빌어먹을, 끝이 없군. 대체 몇 대나 몰려오는 거야?"

 비트만은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적들의 대열에 혀를 내둘렀다.

 마치 잘라도 금방 다시 자라나는 히드라의 머리처럼 적들은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전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비트만은 5대의 전차와 2대의 대전차포를 파괴했지만, 금방 5대의 전차가 나타나 주포를 쏘며 돌격해왔다. 믿기지 않는 인해전술이었다.

 "저놈들, 전쟁하러 온 게 아니라 쪽수 자랑하러 온 거 아냐?"

 "이래서야 연말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볼도 끝없는 적들의 등장에 질리는지 혀를 내둘렀다.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한 독일군이었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소련군의 끝없는 대열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군도 독일군이지만, 소련군은 더욱 절박했다.

 "우리가 뚫리면 이 다음은 모스크바다!"

 "동무들, 모스크바가 없으면 소련도 없다! 죽을 각오로 싸워라!"

 "우라!"

 자신들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소련군은 이성을 잃은 지옥의 야수들처럼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신형 중전차 티거조차도, 철옹성과 같은 소련군의 파도를 넘지 못했다. 넘을 수 없었다.

 -여기는 안톤, 케사르(카이사르)는 응답 바람.

 전투가 한창일 때, 대대본부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여기는 케사르 1, 무슨 일인가?"

 -아군의 측면을 지키던 국방군이 적의 공격에 패주했다. 케사르는 지금 즉시 B-7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젠장, 알겠다."

 측면에 구멍이 난 탓에 이대로 두면 보급로와 후방이 적에게 유린당할 위험이 있었다.

 확인된 적의 규모는 대대급.

 소수의 병력으로 대대급에 달하는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부대는 티거 중대밖에 없었다.

 "여기는 케사르 1, 모두 B-7 구역으로 이동한다. 후위는 오렌지에 맡긴다."

 티거 전차들이 서서히 물러나자, 소련군은 독일군이 물러서는 줄 알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허나 그들은 전차호를 파고 숨어있던 마르더 대전차 자주포들이 내뿜는 75mm 포탄 세례를 받고 도로 패주했다.

 이와 같은 일진일퇴의 풍경이 동부전선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히틀러는 실망을 넘어 이제는 어이가 없는 헛웃음을 흘렀다. 그와 마주하는 장군들은 히틀러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모스크바 공략을 선언한 지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도 위치에 변화가 없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린가?"

 히틀러는 장군들이 했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곧 무적의 독일군이 크렘린궁에 독일 깃발을 내걸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다, 파르티잔에 의해 보급로가 위협받고 있다, 전략적 후퇴가 필요하다는 말들로 바뀌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 중 유일하게 히틀러를 기쁘게 했던 소식은 실전에 투입한 신형 중전차 티거의 압도적인 활약상뿐이었다.

 그 외의 소식들은 모두 히틀러를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자랑스러운 게르만인들이 저 러시아 열등 민족들에게 고전 중이라니. 이 무슨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응? 괴링?!"

 "소, 송구합니다, 총통 각하."

 모스크바 공략에 앞서 대규모 폭격으로 소련군의 방어선에 균열을 일으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괴링은 히틀러의 호통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평소라면 괴링의 저런 모습에 고소해했을 괴벨스조차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특히나 며칠 전에 들려온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소식은 히틀러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틀림없이 연합군은 프랑스로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프랑스는 아무런 소식도 없고 되레 몰타와 시칠리아가 공격받았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설명 좀 해보게, 카나리스 제독. 자네가 내게 적들은 프랑스로 온다고 말하지 않았나?"

 히틀러의 분노가 괴링에 이어 자신에게로 향하자, 아프베어(Abwehr, 방첩국)의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노련한 군인이자 달변가였던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총통 각하,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을 지중해에 묶어두려는 적들의 술책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국 남부에 집결한 연합군은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방심과 속단은 금물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적들의 지중해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변함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카나리스는 마냥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히틀러도 화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면 됐네. 아무튼, 아주 머리 아프게 됐어. 이제 우리에겐 지켜야 할 곳이 더 늘어났으니 말일세."

 히틀러는 지금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원을 요청하는 무솔리니에게 연합군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대놓고 이를 비웃듯이 연합군이 지중해로 쳐들어왔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뿐이랴?

 무솔리니는 당장 지원군의 파견을 강력하게 요청해왔고 일선 지휘관들도 이탈리아가 무너질 경우 독일 남부와 발칸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올려 히틀러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총통 각하, 지금이라도 모스크바 공세를 중단하고 병력을 이탈리아로 돌려야 합니다."

 "미쳤소? 공세가 한창인데 중지하자니! 그랬다간 역으로 전선이 붕괴할 위험이 있소!"

 "모스크바 점령은 포기해야 합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공세를 중단했다간 다 잡은 승리를 놓치게 되오! 조금만 더 공격하면 틀림없이 모스크바를 손에 넣을 수 있소!"

 "그전에 연합군이 로마에 입성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끝입니다, 끝!"

 "말 다 했소?"

 공세 지속과 중단을 놓고 장군들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언성이 높아지자 히틀러가 직접 중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히틀러는 고민했다.

 이탈리아 문제는 잠시 덮어놓고 모스크바 공세를 계속해야 할까, 공세를 중단하고 이탈리아로 병력을 보내야 할까.

 이탈리아도 동부전선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전선이었다.

 비록 전력 자체는 열강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이탈리아는 추축국에서도 일본 다음으로 중요한 동맹국이다.

 그런 이탈리아가 무너지면, 추축 동맹에 가입한 국가들 전체에 큰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이탈리아가 무너짐으로써 유고, 그리스,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동맹들도 줄줄이 탈퇴를 선언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독일 남부가 위협받게 된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모스크바를 하루빨리 점령하고 즉각 이탈리아로 병력을 돌리는 것인데 지금 전황으로 봐선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일은 묘연해 보였다.

 조금만 더 공격하면 된다는 장군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볼 때 공세를 계속한다고 해도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모스크바냐, 이탈리아냐.

 그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총통 각하, 소련군의 예비 병력이 집결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규모는? 그 병력의 규모는 얼마나 되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100만 명에 육박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100만.

 이 한마디 말이 히틀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물론 보고가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히틀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소련군은 늘 예상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물량을 보여줬으니, 정말로 100만이나 되는 병력이 모였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지금도 독일군은 눈앞의 소련군을 뚫지 못해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거기에 소련군 100만 명이 더해진다면?

 공세는 고사하고 후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결정했네."

 히틀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현 시간부로 모스크바 공세를 중단한다."

 "총통 각하!"

 "어쩔 수 없어. 이 이상은 무리야. 전 부대는 공세를 중지하고 현 위치를 고수한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병력을 증파한다. 이탈리아가 무너지면 독일 남부와 발칸반도가 위험해진다."

 히틀러로서는 매우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과거 자신의 우상이었던 동지는 자신보다 더 빠르게 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

 시칠리아섬의 이탈리아군은 기억 속의 이탈리아군과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였다.

 '그 이탈리아군'답지 않게, 놈들은 병사부터 장교들까지 맹렬하게 저항했다.

 놈들은 밤에 야음을 틈타 아군의 보급부대를 공격하기도 했고, 포격과 대전차포로 우리의 발을 묶어놓은 다음 기갑부대로 공격을 가해왔다.

 여전히 전차의 성능 자체는 아군 전차들보다 뒤떨어졌지만, 세모벤테의 경우 장족의 발전을 거둔 탓에 우습게 볼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도 세모벤테들이 아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안겼는데, 독일제 75mm 주포를 장착한 놈이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선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일부 부대만의 개조품이 아닌 공식 생산형이라는 증거였다.

 상상하기 싫었던 최악의 가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망할.

 "빌어먹을 제리 놈들. 이탈리아에 독을 풀다니. 진짜 돌아버리겠군."

 세모벤테의 성능 자체는 그냥 평범한 돌격포지만, 놈들에게 더 강한 주포가 장착됐다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한술 더 떠 지금까지 잠잠하던 독일군조차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지금까지 시칠리아섬 북부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이 남하를 개시했다는 말에, 아군은 진격을 멈추고 정지해서 도로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시내가 보일 정도로 시러큐스 코앞까지 온 우리 부대도, 독일군의 역습에 대비하라는 지령을 받고 도로 퇴각해 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군도, 그 흔한 정찰기 한 대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짜로 적이 오는 거 맞아? 낌새가 없잖아?"

 아무래도 상부에서 잠깐 오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늦게서야 다시 전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내일에는 목표인 시러큐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시러큐스를 점령하면, 우리는 이제 후속 부대에 진격을 맡기고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모처럼 뜨신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겠다는 희망은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다.

 평상시에는 이게 당연한 일이지만, 언제 전투가 벌여질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이런 사소하고 당연한 행위들조차 일종의 사치가 되어 버렸다.

 "얼른 시러큐스로 가자. 따뜻한 목욕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여자들도 말이지!"

 목욕과 따뜻한 음식, 거기다 여자들 구경도 할 수 있다는 말은 과묵한 닉도 들뜨게 했다.

 보리스와 제레미는 벌써부터 이탈리아 여자와 썸탈 생각에 부풀어 올랐다.

 "소대장님은 뭐가 가장 기대되십니까?"

 "나? 나는 다 필요 없고, 그냥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어.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말이지."

 모두가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볼 생각에 부풀어 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이제 막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 우리들의 멘탈을 제대로 박살을 내준 그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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