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6화
136화 인간의 운명 (2)
"이런......."
마리가 눈치를 주고서야 나는 뒤늦게 내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에는 독일군과 그들의 명령을 받는 경찰들로 가득했다. 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일렬로 서서 신분증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평범하게 행동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순서를 바꿔 나와 마리가 먼저 줄을 서고, 그다음 로맹과 장 순서대로 줄을 섰다.
줄의 앞쪽에선 검은색 제복을 차려입은 프랑스 경찰관이 노부인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 중이었다.
마리가 말하길, 저 할머니가 가는 귀가 먹어서 그런지 경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당혹스러워하는 것이란다.
오랜 실랑이 끝에 먼저 백기를 올린 쪽은 뜻밖에도 경찰이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이번에도 마리가 앞서서 내 사정을 설명했다.
경찰이 신분증을 유심히 쳐다볼 때는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번에도 무사통과였다. 그는 사진 속 남자와 내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터졌다.
로맹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장의 경우, 그의 신분증을 살피던 경찰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한참 동안 신분증을 쳐다보다가 이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배 전단서였다.
곧바로 장보다 앞서 신분증 검사를 통과했던 로맹이 숨겨뒀던 권총을 꺼내 발포했다.
총알은 경찰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고, 난데없는 총성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뛰어요!"
마리는 내 팔을 잡아끌고 역 출구로 뛰기 시작했다.
경찰들과 독일군이 권총을 쏜 로맹을 향해 총을 겨눴다. 로맹이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수십 개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커헉!"
총탄은 로맹의 어깨를 맞췄다.
상처를 부여잡고 로맹이 바닥을 뒹구는 사이 장도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주변을 향해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명의 적군도 맞추지 못했다.
"Lass deine Waffe fallen!(무기 버려!)"
둘을 포위한 독일군이 총구를 겨눈 채 소리쳤지만, 그들은 무기를 버리지 않았다.
장은 방아쇠를 당겨 가까이에 있던 경찰의 무릎을 명중시켰다. 총탄이 박힌 경관이 우악스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수십 개의 총구에서 다시 한번 불꽃이 튀었다.
권총을 쏘며 발악하던 장과 로맹의 얼굴에 여러 개의 구멍이 생기더니, 살이 터지는 처참한 소리가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역을 나와 눈에 보이는 모퉁이로 들어가서 숨자마자 한 무리의 독일군들이 우르르 몰려와 역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몇 대의 트럭이 더 도착하고, 검문이 강화되자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순식간에 동료들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마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느 허름한 빵집 앞에 멈췄다.
"다 왔어요."
"여기가 목적지인가요?"
"정확히는 '정거장'이죠. 안으로 들어가요."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알림종 소리가 나면서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젊은 여성이 나왔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기른 여자였는데, 손바닥 전체로도 가려지지 않을 것 같은 널찍한 이마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주방에서 나온 여자는 나를 보곤 흠칫하더니, 이내 마리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 몇 마디를 건네자, 여자는 대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곤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뭐라고 말했죠?"
"당신을 미국인 조종사라고 말했어요. 스페인으로 탈출하는 일에 우리가 협력하기로 했다고."
"엥? 저는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인데요?"
"알아요. 하지만 루네 앞에선 영국인 티를 안 내는 게 좋아서 그래요. 당신네 정부가 메르 엘 케비르를 기습했을 때 루네의 동생이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저 여자의 이름이 루네였군.
아무튼 남동생이 캐터펄트 작전 때 죽은 탓에 그녀는 영국을 매우 증오하고 있었다. 지금부턴 말을 할 때도 발음에 주의해야겠구만.
그나저나 나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리의 태도였다.
겨우 몇 시간 전에 여태껏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동료들이 죽었는데도, 그녀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프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지?
그렇다고 본인에게 대놓고 묻기에도 뭣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사히 이곳에 도착했네요. 그쵸?"
"뭐, 그렇죠? 하지만 당신 동료들은......."
"어쩔 수 없죠. 우리에겐 이게 일상이니까. 게다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처음이 아니라는 말은 전에도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는 뜻이다.
마리는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렌즈를 문질렀다.
"스탈린 동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훌륭한 공산주의자라면 동료들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에 적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일 궁리를 해야 한다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이 정도 희생은 당연한 일이죠. 안 그런가요, 대위님?"
"......."
전에도 느꼈지만 이 여자, 역시 정상이 아니다.
동료가 죽었는데 공산주의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 채 그녀는 스탈린과 공산당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원래 무슨 일이든 간에 뭔가를 이루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하는 법이죠. 오늘 있었던 장과 로맹의 죽음도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혁명을 위해선 그들의 희생 정도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미약한 수준이죠.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 동지의 가르침을 믿으며 더욱 더......!"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싶어 그만하라고 말하기 직전, 트럭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이를 본 마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도착했네요!"
"Bonjour!(안녕하신가!)"
산적처럼 보이는 배불뚝이 남자가 나를 스페인으로 데려다줄 안내인이었다.
언질이 있었는지 그는 날 아는 눈치였다.
마리와 짧게 대화를 나눈 그는 내게 손을 건넸다.
"반갑수, 대위 양반. 난 알렉이라 하우."
"예, 아서 그레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줄 아시는군요?"
"스페인 내전 때 만나서 친해진 미국인 친구한테서 영어를 조금 배웠지. 문법은 하나도 모르지만 말이오."
알렉은 나를 트럭으로 데려가 트럭 짐칸 맨 안쪽에 있는 커다란 상자를 가리켰다.
성인 남성이 충분히 누워서 들어갈 수 있는 큰 상자였다.
"저 상자 안에 숨으면 될 거요. 참, 볼일은 바닥에 난 구멍으로 보슈. 구멍 아래에 다른 상자를 놔서 짐칸 바닥에 흐르는 일은 없을 거요. 대신 소변은 몰라도 똥을 싸려면 여간 힘들겠지만, 알아서 하리라 믿수."
"감사합니다."
"내가 멈춰서 상자를 열어주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마슈. 자, 그럼 갈 길이 머니 얼른 출발합시다."
***
어둠이 내리자 열기로 가득했던 대지는 겨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은은한 달빛이 어둠에 잠긴 대지를 비추는 가운데, 한 무리의 병사들이 일렬로 서서 조용히 움직였다.
생애 처음으로 맡는 특별임무에 마이클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두려움과 걱정도 컸지만, 스스로 자원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마이클이 임무에 지원하겠다고 밝혔을 때, 헨리 일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돌았냐? 뭐 잘못 먹었어?"
평소에도 '군생활은 덜도 말고 딱 중간만 가야 편하다', '남들 사이에 조용히 묻어서 가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그에겐 마이클의 행동이 어처구니없었다.
남들은 다 기피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에 지원하다니. 보상도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마이클 외엔 지원자가 나오지 않아 결국 제비뽑기로 '지원자'를 정해야 했다.
우습게도 제비뽑기에 걸려 지원자로 선발된 2명 중 한 명은 헨리 일병이었다.
"해가 지는 즉시 출발한다. 이번 임무의 결과가 중대 모두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마이클과 달리 헨리는 끝까지 얼굴을 펴지 못했다.
뽑기에서 당첨된 후부터 임무 투입 때까지 그는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얼굴을 구긴 채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모두 정지."
적진에 근접했을 때, 선두에서 걷던 콜먼 중위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따르던 병사들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자세를 낮추었다.
콜먼 중위는 오른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참호가 있었다.
그들은 숨죽인 채 참호로 다가갔다.
가까운 곳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참호에는 두 명의 이탈리아군 병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경계 근무 중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폴고레 사단은 정예부대지만, 아무리 정예부대라고 해도 고문관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콜먼 중위는 소대원 2명을 시켜 그들을 제거했다. 단, 총기 대신 대검을 이용해서.
총을 사용했다간 적들에게 들킬 우려가 있었기에 소리가 작은 대검을 이용해야 했다.
소대장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대검을 꺼내 잠들어 있는 이탈리아군의 심장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한 특공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있군."
마이클은 위장막에 반쯤 가려진 육중한 88mm 대공포를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88처럼 중요한 병기에는 기본적으로 경계 병력을 배치되는 것이 원칙인데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파스타 놈들은. 정예라는 놈들도 이 꼴이라니, 한심하구만."
"뭐 어때. 우리야 땡큐지."
"3분 안에 끝마치고 철수한다. 서둘러."
특공대는 망설이지 않고 88에게 다가갔다.
폭약을 설치한 다음, 충분히 거리를 둔 상태에서 기폭해 날려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하나의 거대한 쥐덫이라는 사실을.
쾅!
88을 향해 다가가던 콜먼 중위가 외딴 폭음과 함께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뢰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란 병사들이 얼어붙었을 때, 곳곳에서 함성이 들리며 총알이 날아왔다.
"È l'esercito britannico!(영국군이다!)"
"Tiro!(사격!)"
파스타 병사들이라고 비웃음 받던 이탈리아군조차 88이 얼마나 소중한 병기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만일에 대비하여 88 주변에 '안전장치'를 설치해둔 것이었다.
거기다 적을 기만하기 위해 일부러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아 침입자가 방심하게 만들었다.
"젠장, 함정이었어!"
"모두 튀어!"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알에 콜먼 중위를 포함하여 벌써 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둘러 둔덕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도처에 적이 깔린 탓에 도망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야! 너 어디 가는 거야?"
쏟아지는 총탄에 정신이 없는 가운데, 헨리는 어딘가로 뛰어가는 마이클을 발견하곤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마이클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뛰기만 했다.
총탄을 피해 바위 뒤에 숨은 마이클은 총류탄을 꺼내 총에 장전했다. 그러곤 88을 향해 겨눴다.
총류탄을 사용해본 적은 훈련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마이클은 긴장했다.
그는 최대한 정확하게 88을 겨냥한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흡!"
방아쇠를 당기자 평소의 격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반동이 느껴졌다.
쏜 총류탄은 88의 앞바퀴에 명중했다.
명중 자체는 성공했지만, 88 본체에는 이상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위험을 무릅쓰고 두 번째 총류탄을 꺼내 장전했다.
"저 멍청한 녀석이 진짜!"
헨리는 당장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임무 완수를 시도하는 마이클을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마이클을 위해 기관총을 발사하여 적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탈리아군이 헨리의 기관총 공격에 시선이 집중된 동안, 마이클은 88을 겨냥했다.
조금 더 왼쪽으로.
이번이 마지막이었기에 신중하게 발사해야만 했다.
마이클이 방아쇠를 당기자, 허공으로 날아간 총류탄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1초 뒤, 88에서 폭발이 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몸체를 맞춘 것이었다.
"좋아, 해냈다!"
"만세!"
열심히 기관총을 쏘던 헨리도 88이 파괴된 광경을 보곤 환성을 지르며 주먹을 쥐었다.
임무를 완수한 마이클은 바위 뒤에서 나와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가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날아온 총탄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마이클을 엄습했다.
"크아악!"
바닥에 고꾸라진 마이클은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들에게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둔덕 뒤에 숨어 총을 쏘던 동료들도 마이클을 보곤 소리를 질렀다.
"마이클, 조금만 더 힘내!"
"다 왔어! 조금만 더!"
기관총을 쏘던 헨리도 마이클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왔다.
마이클은 움직이는데 방해되는 소총을 내버리고 두 팔을 이용해 몸을 움직였다.
헨리 일병과의 거리는 단 30m.
조금만 더 버티면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몸을 움직이는 마이클의 앞에 수류탄이 날아와 땅바닥을 굴렀다.
수류탄을 본 마이클의 눈동자가 접시만큼 거대해졌다.
헨리도 수류탄을 보곤 지체 없이 걸음을 멈추곤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마이클은 수류탄을 잡아 적들에게 던지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수류탄이 그의 손을 떠나기 전에, 한 발의 총알이 그의 턱을 맞추었다.
턱뼈가 박살 난 마이클이 고개를 젖히는 순간, 그의 손안에 있던 수류탄이 폭발했다.
수류탄의 그의 손을 먼저 파괴했고, 이어 그의 팔과 머리통을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