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5화
135화 인간의 운명 (1)
“총통 각하, 진심이십니까?”
“그렇네, 박사.”
나치 독일의 선전부장관 괴벨스는 히틀러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는 시늉을 했다.
“전쟁이 끝나는 즉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사라질 거야.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촌락까지 모두 철거하고, 건물들은 고성능 다이너마이트와 폭격으로 모두 가루로 만들 생각이네.”
히틀러는 담담한 말투로 자신이 구상한 ‘모스크바 철거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열등한 슬라브인들의 수도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해악이니, 지도에서 완전히 삭제시켜야 한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없애고, 소련인들과 소련군 전쟁포로들을 동원해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고자 했다.
“대신, 우리 후손들이 모스크바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호수 옆에 작은 표지판 하나만 세울 생각일세. ‘한때 모스크바였던 곳’이라고. 어떤가?”
“러시아인들의 사기를 완벽하게 꺾기에 아주 탁월한 생각이십니다만, 그래도 크렘린 궁전 같은 건축물들은 그냥 가루가 되기엔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스탈린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자는 비록 공산주의자에 슬라브인이지만,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러시아인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남자일세. 그런 인재를 총살로 끝낼 순 없지. 살려서 본인 특기를 계속 이어나가게 할 생각이네. 대신, 직함이 바뀌는 것 정도는 감내해야겠지.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에서 ‘제국동방령 특별 총독’ 정도로 말일세.”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농담과 진담이 반씩 섞인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타난 하인츠 링에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링에, 표정이 왜 그런가?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일어났나?”
“매우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볍다고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총통 각하.”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말해 보게나.”
“포로로 잡혔던 영국군 대위 아서 그레이가 탈주했다고 합니다. 호송대는 습격에 전멸했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뭐라고? 이런……!”
링에의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인상을 찌푸렸다.
영국이 자랑하는 전쟁영웅을 잡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게 겨우 어제인데, 놓치고 말다니!
전황을 바꿀 정도로 심각하거나 무게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제3제국의 위신에 약간이나마 금이 가는 일이었다.
“그 귀한 선전 거리를 놓치다니. 영국인들이 좋아라 하겠구만.”
아서 그레이를 디 도이체 보헨샤우에 출현시켜 전 독일 국민에게 망신거리로 만들고자 했던 괴벨스는 일이 틀어지자 실망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체면을 좀 구기긴 했지만, 전쟁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중대한 사건은 아니다.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라고 지시하게. 의심 가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더러운 해충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고개만 돌리면 튀어나와 훼방을 놓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프랑스인들을 너무 풀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더욱 강하게 옥죄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동감일세. 참, 하이드리히,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지? 이제 다 나았나?”
“예. 하이드리히 SS 대장은 현재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했다고 들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하이드리히는 프랑스 파리로 보내질 예정이었지만, 도중 테러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현재까지 병상에 있었다.
링에의 말을 들은 히틀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빨리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인들의 기강을 잡으라고 지시하게. 체코인들을 길들였던 것처럼, 하이드리히라면 프랑스인들도 충분히 길들일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더니, 놀란 얼굴을 한 장과 마리가 서 있었다.
“깨우러 왔는데 알아서 일어났구려, 대위 양반.”
마리의 손에는 어제 봤던 것과 같은 냄비가 들려 있었다.
“아침 드슈. 1시간 뒤에 출발할 테니까 준비도 하고.”
지금까지 입고 있던 군복은 독일군 눈에 너무 잘 띄었기에 훈장만 따로 빼낸 뒤 불태워버렸다. 그리곤 장이 가져온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이 대체로 너무 커서 헐렁하긴 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군화도 벗는 게 좋을 거요. 옷은 사복인데 신발만 군화면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이니까.”
군화도 장에게 건넨 뒤, 낡은 구두를 받았다.
발에 안 맞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구두는 발에 딱 맞았다.
마지막으로 마리가 가져온 알이 없는 안경을 끼는 것으로 변장을 마칠 수 있었다.
“좋아, 훌륭하군. 누가 봐도 민간인처럼 보이는구만.”
“누가 봐도 탈주한 포로라곤 생각 못 할 거예요.”
음, 확실히 내가 독일군이어도 그냥 봐선 누구인지 모를 것 같다.
완벽하진 않아도 썩 괜찮은 변장이다.
“자, 그리고 이것도 받으시오.”
“이건 뭐죠?”
“군인이라는 양반이 신분증을 모르나? 어제 일로 지금쯤 검문소마다 확인할 거요.”
장이 내게 건넨 신분증은 한 프랑스인의 신분증이었다.
“우리가 쏴죽인 앞잡이들 신분증 가운데 최대한 당신과 닮은 놈 것을 골랐지. 어떤 것 같소?”
신분증 사진 속 남자는 내 또래처럼 보였는데, 이마가 넓고 턱이 각진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나와 비슷했다.
근데 문제는 내가 프랑스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행여 놈들이 말을 걸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으니, 절대로 말하지 말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쇼. 우리가 댁을 귀머거리라고 말할 테니까. 알겠소?”
“알겠습니다.”
“준비 다 끝났으면 갑시다. 여기서 보르도까지는 아주 머니까.”
***
장과 마리의 말대로 시내에는 독일군이 북적거렸다.
독일어는 모르지만, 곳곳 걸린 포스터의 그림을 보아하니 의심 가는 이는 무조건 신고하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림 밑에 쓰인 숫자는 딱 봐도 포상금 얘기겠고.
장은 로맹이라는 친구와 함께 앞장서서 걸었고, 나와 마리는 연인인 척 팔짱을 끼고 걸었다.
여자랑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은 인생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리진 않았다. 정말로.
소총을 멘 독일 병사들이 길을 걷던 행인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거나 신분증을 확인 중이었다.
독일군을 앞을 지날 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쫄깃해지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총성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데, 마음만큼은 이미 전장에 온 느낌이다.
그러나 역으로 가는 동안, 우리가 검문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장과 로맹은 친구인 척 서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고, 나와 마리는 연인 흉내를 내고 있어서 그런지 독일군이 말을 걸진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혼자서 걷는 청년들을 집중적으로 검문했다.
역에 도착해서야 처음으로 검문을 당했다.
MP28로 무장한 독일군 헌병들이 열차표를 예매하려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곤 프랑스어로 신분증을 요구했다.
“Veuillez montrer votre pièce d'identité(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Vous voilà(여기 있어요).”
현재의 나는 말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설정이므로, 마리가 대신해서 독일 헌병의 질문에 대답했다.
헌병은 신분증을 꺼내는 마리와 그녀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마리에게 뭐라고 물었다.
이윽고 마리가 짧게 대답하자, 헌병의 눈은 의문에서 동정으로 바뀌었다. 제대로 넘어갔구만.
우리 넷은 표를 예매한 뒤 열차가 올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역은 수많은 사람이 내는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 때문에 시끄러웠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릴 향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마리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열차를 탄 후에도 신분증 검사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말하지 마요. 알겠죠?”
“넵.”
“말하지 말라니까요? 본인이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그새 까먹은 겁니까? 그냥 듣고 가만히 계세요. 아무튼, 누가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하고, 제가 말해도 고개 끄덕이지 마세요. 말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대다수 사람은 우리한텐 관심도 안 가지겠지만, 어쩌다 눈썰미 좋은 사람한테 걸려 의심이라도 사면 저흰 모두 끝장이에요. 아시겠죠?”
이윽고 열차가 도착했다.
자금 형편상 1등석을 예매할 수 없어 3등석 티켓을 끊었다.
3등석은 따로 칸막이가 없고, 좌석도 좁은데다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야 하므로 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마리의 말대로 열차에는 늘 독일군이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열차 차장이 독일군 헌병 3명을 대동한 채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표와 신분증을 검사했다.
여기서도 마리 덕분에 의심을 사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보르도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잡아 이틀 정도.
보르도에 도착하더라도 다시 스페인까지 가야 하므로 결코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
이병 마이클 그레이는 침침한 눈으로 지평선 너머 적진을 주시했다.
한 차례의 격렬한 전투가 훑고 지나간 전장에는 죽은 이들의 몸통이 썩어들어가는 흉측한 냄새가 가득했다.
거기다 사막이란 환경 때문에 시체는 빠르게 부패했고, 앞으로 1시간 뒤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살아남은 자들을 덮칠 터였다.
“진짜 좆 같네…….”
“좆 같은 걸 이제 알았냐, 인마?”
마이클의 맞선임이자 분대 기관총사수인 헨리 콜먼 일병이 이죽거렸다.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곤 꽁초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게 집에서 부모님이 해주시는 뜨신 밥이나 먹을 것이지 뭣 하러 입대했냐? 어차피 조바심 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나라에서 알아서 데려갈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이클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사고뭉치에, 집안의 문제아를 넘어 사실상 그레이 가문의 수치로 낙인이 찍혔던 형 아서가 제정신을 차리고 전쟁영웅으로 탈바꿈한 것을 본 그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형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걸맞은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는 자부심 하나로 입대를 택했다.
마이클은 입대할 거라면 차라리 사관학교에 들어가라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끝끝내 최전방에 자원했다.
부모님이라면 틀림없이 가문의 힘을 사용해 그를 전방으로 보내지 않을 터였다.
아마도 런던이나 맨체스터의 말단 부대 행정병으로 집어놓곤, 달마다 찾아와 사관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겠지.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훈련받는 동안 전쟁은 끝날 것이고.
병사면 뭐 어떤가.
고생이야 조금 더 하겠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미 있는 일인데.
젊다기보단 어리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마이클은 스스로를 이미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를 ‘진정한 어른’이라고 부르려면 아직 멀었다. 오직 마이클 본인만 모를 뿐.
마이클의 중대는 트리폴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이탈리아군과 대치 중이었다.
파스타 병사들이라고 놀림 받던 이탈리아군이었지만, 모든 부대가 다 같지만은 않았다.
하필이면 마이클과 대치 중인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군 중에서 정예 중의 정예로 손꼽히는 폴고레 공수사단으로, 그들은 영국군의 계속된 공격을 번번이 격퇴하며 악착같이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지금까지 전차와 포격, 항공기까지 동원해 여러 번의 공격을 가했음에도 폴고레 사단의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했다.
영국군과 이탈리아군 진지 사이에는 격파된 영국 전차들의 잔해가 즐비했다.
“저 지랄맞은 88을 없애지 않고선 진격은 불가능해.”
헨리 일병이 가리킨 곳 어딘가에 그 악명높은 88mm 대공포가 있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군에게 선물한 것으로, 폴고레 사단 병사들은 이 88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예, 예…… 지금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대장 콜 필드 중위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소대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중대장님의 지시 사항이다.”
중대장의 지시 사항이라는 말에 소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보나 마나 또 이상한 일이나 시킬 생각이겠지. 오늘은 또 어떤 좆 같은 일을 시킬까.
“오늘 밤에 88을 제거하기 위해 적진에 투입할 특공대를 조직하라는 명령이다. 지원자 있나? 못해도 최소한 3명은 뽑아야 한다.”
돌았냐? 그 미친 짓을 우리가 왜 해?
병사들은 애써 소대장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잖아도 오늘도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뭣 하러 그런 위험한 임무에 자원한단 말인가?
콜 중위가 다시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놀랍게도 지원자가 나타났다.
“이병 마이클 그레이, 지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