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4화
134화 붉은 수탉 (2)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스페인과 프랑스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소. 주류 운송업을 하거든. 모친이 알자스인에다 본인도 몇 년간 독일에 살아서 독일어가 유창하지. 아, 물론 그 친구도 공산주의자요. 아주 훌륭한 스탈린주의자지. 멍청한 보슈들이랑 스페인 놈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스탈린주의자라는 것부터 이미 훌륭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건 그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이니까.
“우리가 보르도까지 데려주겠소. 보르도에서부턴 그 친구가 당신을 스페인까지 데려가 줄 거요. 스페인에서부턴 대위 당신이 직접 알아서 영국 대사관까지 가야 하지만, 미아도 아니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하리라 믿소.”
“아, 물론이죠. 스페인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이로써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이들은 대체 뭐 때문에 내게 이렇게까지 잘 대해주는 걸까?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아무리 나치에 맞서 싸우는 동맹 관계라고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영국에 대해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줄로 아는데.
이들은 공산당원이라 조금 다른가?
“대신, 조건이 있소.”
그럼 그렇지.
이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
당장 독일군들 피해서 사는 것도 힘든 마당에 영국군 포로를 단순한 선의로 스페인까지 보내줄 리가 없다.
틀림없이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 터.
“무슨 조건인데요?”
“긴장할 필요 없소. 댁한테 비용 청구하는 짓은 안 하니까. 단지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당신네 정부에게 이런 말 좀 전해 주시구려. 우리 프랑스인들에 대해 지원을 좀 늘려달라고. 대위 양반도 알겠지만 보슈들이 소비에트를 침공한 뒤로 소비에트에서 오던 지원이 모두 끊겼거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는 하지만, 아무리 우리라고 땅 파서 보슈들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정도야 당연히…….”
“단! 멍청한 우파 꼴통 새끼들 말고 공산당에 말이오. 우파 새끼들은 죄다 페탱한테 빌붙거나 몸만 사리고 있거든. 무능한 겁쟁이 녀석들 같으니라고. 지금 프랑스에서 보슈들과 싸우고 있는 이들은 다수가 바로 우리 공산당원들이오. 댁네가 우릴 곱지 않게 본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 일로 조금은 인식이 달라지지 않겠소? 그냥 돌아가서, ‘아, 제가 봤는데 이 공산당 친구들, 제법 용감하고 나쁘지 않습니다. 나치들하고 싸우는 친구들이니, 공산당이니 뭐니는 넘어가고 지원을 좀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고만 해주시오. 아무리 공산당 싫어하는 댁네 총리도 고민은 해보겠지. 기왕이면 우리 <붉은 수탉>을 콕 찍어 언급해주면 더 좋고.”
결국 그런 것이었군.
내가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게끔 돕는 대신, 나보고 가서 자기네들 지원 좀 하게 해달라고 높으신 분들께 말해달라는 건가.
나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이들은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서로 윈윈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그래봤자 저는 일개 대위라 별 힘이 없는데요.”
“같은 대위여도 전쟁영웅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것도 총리한테서 직접 훈장까지 받았다면 말의 무게가 다르지! 내가 보기엔 댁의 가치는 댁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오. 자부심을 좀 가지쇼.”
뭐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과도하게 띄어주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하네, 진짜.
사실 내가 이들의 요구대로 말한다고 해도 그걸 높으신 분들이 귓등으로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반드시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악수했다.
빨갱이들은 싫지만, 지금은 그래도 같은 배를 탄 동료이니 서로 협력해야 할 때다.
게다가 의도하진 않았어도 나를 독일군에게서 구출한 것도 사실이니까, 일단 이들에게 빚이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눈치 없이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라고 말해서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는 둘째치고, 일단은 말이라도 알겠다고 해놔야지. 그래야 탈이 없는 법이다.
장은 동료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중요 인물이므로 지하실에 계속 머물렀다. 그런 날 위해 앞서 만났던 마리가 수프가 담긴 냄비를 들고 돌아왔다.
“그레이 대위님? 음식을 좀 가져왔는데, 드셔보시죠. 슬슬 배고프실 텐데.”
“아이쿠,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반가운 일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뚜껑을 열자 주황색 빛깔의 음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깍뚝썰기한 애호박과 당근, 가지, 피망이 한데 어울려 있는 것을 보니 분명…….
“라따뚜이(Ratatouille)네요.”
“어? 바로 아시네요? 전에도 드셔본 적이 있나요?”
“하하, 뭐…….”
사실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초딩 때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때문에 알게 됐다곤 절대 말 못 하지.
그건 그렇고 실제로 먹어보기는 처음인데, 이런 말 하면 실례지만 그다지 식욕이 돋는 비주얼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도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덜도 말고 딱 건강해지는 듯한 맛.
애초에 그 맛없기로 소문난 영국 짬밥에 길들여진 탓에, 이제는 먹을 수만 있다면 맛을 따지지 않고 먹게 되었다.
베어 그릴스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이승윤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배도 채웠으니, 이대로 한숨 푹 자면 좋으려만, 안타깝게도 우리 마리 여사님께선 나를 그냥 재울 생각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위님, 질문할 게 좀 있는데 해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뭐든지 물어보세요.”
“연합군은 언제쯤 프랑스에 올 예정인가요?”
일개 대위가 알만한 질문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늦어도 2년 안에는 올 겁니다. 확신해요.”
“그래요?”
“네. 이미 추축국은 승기를 잃었어요. 아직까진 철옹성처럼 보여도, 이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죠. 적들은 절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다행이네요.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또 하나 더 해도 될까요?”
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예상 밖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듣자 하니 영국은 지금 나치들과 전쟁 중인데도 공산당원 색출에 열심이라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건가요?”
“예? 누가 그런 말을 하는데요?”
“모스크바로부터 전해지는 소식이에요. 많은 동지가 같은 적과 싸우는 영국에서 공산당원들을 색출하는데 열심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 역시 그렇고요.”
“그거야…… 소련이 먼저 자초한 일이 아닙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케임브리지 사건 말입니다. 혹시 듣지 못하신 건가요?”
짐짓 화를 내던 마리는 말을 멈추었다.
이것 봐라.
딱 봐도 아는 눈치구만.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케임브리지 사건이 터진 지도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여전히 대중들의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인식은 최악이었다.
아무리 나치의 공격을 받아 졸지에 같은 편이 되었다지만, 그전까지 나치랑 손잡고 사이좋게 주변국들을 침공하고, 자국에 간첩까지 심었던 국가인데 곱게 보일 리가.
“크흐흠, 그런데 마리 양은 영어가 유창하시네요. 유학이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화제를 돌렸다.
“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소련에 있었죠. 영어도 소련 유학 시절에 배운 겁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다.
소련 유학 때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친 이는 소련인 여성과 결혼하여 레닌그라드에 정착한 영국인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대위님은 소련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아뇨.”
“그렇다면 한 번 꼭 가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거지, 실제로 가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라니까요?”
그간 쌓아왔던 얘기를 털어놓듯 이어 말했다.
“소련에서 여전히 19세기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프랑스의 대도시들보다 더 잘 발달되어 있다니까요.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데도 소련을 이유 없이 증오하는 사람들 때문에 답답해 죽겠어요. 스탈린 동지도 이런 헛소문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실지…….”
마리 라르캉이라는 여자는 멀쩡한 외모와 반대되게 중증의 스탈린 빠돌이였다. 앉은 자리에서 1시간 넘게 소련과 스탈린 찬양을 내게 늘어놓았다.
내가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내가 영국인이라서 더욱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열렬한 공산당 찬미가를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마치 멋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러 온 사이비 신도 같군.
내 눈동자에 비친 그녀는 공산주의라는 사이비에 미친 정신병자 그 자체였다.
“따라서,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모든 게 끝난 건 결코 아니에요. 오히려 이제 막 시작일 뿐.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를 장악해야만 해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를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소련군이 프랑스까지 오려면 힘들 것 같은데.”
“그러니까 더욱 노력해야죠! 절대로 저 우파 기회주의자들이 프랑스를 차지해선 안 되니까! 그랬다간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체가 다시 위기에 빠질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대위님. 지금 총을 들고 독일군과 싸우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원들인데, 그 잘난 우파 반공주의자들은 지금 뭘 하고 있죠? 모두 페탱과 히틀러한테 들러붙어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려고 아양을 떨고 있잖아요! 그런 작자들한테 결코 미래를 맡길 수 없어요!”
“저어, 드골도 있습…….”
“그 작자는 순 사기꾼 새끼에요! 지금쯤 안전한 런던에 처박혀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나 썰고 있겠죠. 우리들이 목숨 걸고 보슈들과 싸울 동안!”
이 여자, 내가 드골과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음, 일단 굳이 내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행여 말했다간 더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 게, 실제로도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 공산주의 및 좌파 계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반공주의 및 우파 계열 레지스탕스도 있었지만, 숫자로 비교하면 공산당이 압도적이었고 활약도 더 많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독소전쟁 발발 전의 일로, 그 이전으로 넘어가면 이들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왜냐면, 독소전 이전까지 열심히 나치에게 협력했던 놈들이 바로 이 PCF 놈들이거든.
PCF는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소련을 지지하며 프랑스 정부의 대독강경노선을 비판하고 나섰다(미국과 영국 등 외국의 공산당 조직도 마찬가지였지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겨울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PCF는 열심히 반전을 외치며 소련과 소련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을 옹호했다.
오죽했으면 달라디에가 공산당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우파와는 거리가 먼 사회당에서조차 프랑스 공산당을 소련의 앞잡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을 정도다.
프랑스가 무너진 후에도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와 페탱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투쟁을 이어나가는 드골과 자유 프랑스를 비난했다.
PCF가 독일과의 싸움에 나서게 된 때는 독소전이 발발한 후로, 만약 독소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직도 나치를 찬양하며 반대편을 밀고하러 다녔을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은 바로 본인들이면서 이제 와서 자신들을 무슨 정의의 투사, 외로운 싸움꾼으로 포장하는 꼴을 실시간으로 보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새끼들은 나중에 6.25 전쟁 때도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거다!
남한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거고 북한은 아무 잘못 없다! 이 지랄을 떨었지.
생각해 보니 더 열받네?
하지만 이걸 대놓고 말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잠자코 있기로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좆같긴 해도 꾹 참고 넘어갈 때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튼 대위님, 영국에 돌아가시면 반드시 이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치들과 더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요.”
“노력해볼게요.”
퍽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