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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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3화
133화 붉은 수탉 (1)
"로맹, 준비 다 끝났냐?"
"그래. 다 끝났어."
준비는 모두 다 끝났다.
남은 일은 이제 기다리는 것뿐.
로맹 블랑은 버릇처럼 MAS-36의 노리쇠를 만지작거렸다.
같은 곳에 자리 잡은 뤽 드베르가 중얼거렸다.
"정말 이곳으로 보슈(Bosche, 독일인의 멸칭)들이 오는 거 맞아?"
"아마도."
"아마도? 뭐야, 확실하게 말해."
두루뭉실한 로맹의 대답에 뤽은 팍 신경질을 냈다.
뤽의 총 다루는 솜씨는 예술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인간성은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매사에 자주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렸으며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놈이랑 같은 조가 되다니.
아직 독일군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로맹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의 말이 맞을 거야. 그러니까 이곳에 왔겠지. 너도 여기로 오는 데 동의했잖아?"
"지난번에는 분명 온다고 했는데 밤이 되도록 보슈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임무였지만, 좀처럼 긴장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로맹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담배를 입에 물기 무섭게 뤽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냐? 담배 피우려고 하잖아."
"보슈들이 눈치채면 어쩌려고?"
뤽의 말에 로맹은 어이가 없었다. 독일군이 무슨 사냥개도 아니고, 담배 연기를 맡고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은 대낮이라 불빛 때문에 들킬 염려도 없다.
"고작 담배 하나 때문에 들키겠어? 걱정 말라니까."
"그러다 들키면 어쩌게?"
"안 들킨다니까!"
언성이 커질 무렵, 저 멀리서 엔진음이 들렸다.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보슈들이다."
장의 말대로 독일군이 오고 있었다.
뤽은 땅바닥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다시 들었다.
그가 사용하는 총은 조준경이 달린 소련제 모신나강으로, 직업이 사냥꾼이었던 아버지가 물려준 물건이었다.
건너편에 자리 잡은 장이 왼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사정거리 안으로 오는 즉시 발포.
로맹도 주먹을 흔들어 수신을 알렸다.
독일군과의 거리는 시시각각으로 줄어들었다. 60m, 50m, 30m, 10m.
로맹은 선두 퀴벨바겐의 운전병을 조준했고, 뤽은 뒤따르는 트럭의 운전병을 조준했다.
그리고 발포.
***
"커흑!"
총을 들고 트럭 밖으로 뛰어내리던 병사는 조금 전의 동료처럼 목덜미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나머지 병사들도 서둘러 트럭 밖으로 나가다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Runter!(엎드려!)"
"Wo schießt du?(어디에서 쏘는 거야?)"
트럭을 따라오던 퀴벨바겐의 운전병도 관자놀이에 총알을 맞고 즉사했다.
탑승자들은 급히 몸을 숨기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조수석에 탄 한 병사가 차에서 뛰어내리며 기관단총을 갈겨댔다.
총알이 다 떨어져 탄창을 교환할 때,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수류탄이 폭발하자, 기관단총을 쏘던 병사와 차량에 숨어있던 탑승객들이 모두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갔다.
눈을 떴을 땐 누군가의 내장이 트럭 짐칸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수류탄에 당한 독일군의 것이었다.
아무리 적군이라고 하지만,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총성은 갑자기 들렸던 것처럼 갑자기 멎었다.
끝난 건가 싶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겨냥하고 있는 여러 개의 총구와 한 무리의 건장한 남자들이 보였다.
"Descendez(내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뭐라고 말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레지스탕스들이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총으로 무장하고 독일군과 싸우는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 말곤 없으니까.
"Attends, tu es britannique?(가만, 영국인 아냐?)"
"Êtes-vous Britannique?(영국인이라고?)"
"Je pense que c'est vrai(맞는 것 같은데)."
뒤늦게 내 군복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곤 자기들끼리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총구는 나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말투나 표정에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어, 혹시 누구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Vous êtes britannique. Tu parles anglais(영국인 맞네. 영어를 쓰잖아)."
"Pourquoi les Britanniques sont-ils ici?(영국인이 여기 왜 있어?)"
"Je ne sais pas(낸들 알겠냐)."
"Qu'est-ce qui se passe tout le monde?(다들 무슨 일이야?)"
아랍인처럼 수북한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다가와 뭐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를 바라보곤 흠칫 놀랐다.
"영국인?"
"네, 영국인입니다!"
다행히 그 남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이제야 좀 살겠네.
지금까지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아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고작 말이 통하지 않았을 뿐인데 길을 잃은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네. 꼼짝없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줄만 알았는데. 아무튼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일단 이곳에서 벗어납시다. 언제 보슈들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남자는 내 말을 단칼에 끊은 뒤, 독일군의 손에 들린 소총을 집어 들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Obtenez votre arme(무기 챙겨)."
***
레지스탕스의 본거지는 교전이 일어난 곳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허름한 헛간.
내부에는 지하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짚단을 치우자, 나무로 된 문이 드러났다. 이게 비밀통로의 유일한 출구였다.
"좁으니까 조심하고. 내 뒤만 따라서 오쇼."
남자를 따라 좁은 통로를 기다시피 하며 걸어갔다. 통로가 워낙 좁은데다 불빛도 없어서 두더지가 된 기분이었다.
발과 허리에 슬슬 무리가 갈 즈음, 문이 나타났다.
남자가 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곧바로 안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Patate(감자)?"
"Orque(범고래)."
끽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우리는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이곳은 다른 건물의 지하실로 헛간에서 지하통로를 통해 쭉 이어진 것이었다.
여자는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해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가 뭐라고 열심히 말하자, 여자는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소개하지. 이쪽은 마리 라르캉. 우리들의 참모지. 참고로 우리 조직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친구요."
"만나서 반가워요. 편하게 마리라고 불러요."
여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아서 그레이 대위입니다."
"참, 내 소개를 깜빡했군. 나는 <붉은 수탉>의 '서기장'인 장 모리스요. 만나서 반갑소이다."
"저도 반갑......."
음? 잠깐, 붉은 수탉?
그건 또 뭐야? 게다가 서기장이라니?
그제야 지하실 내부에 붙은 여러 포스터와 깃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 떡하니 그려진 포스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까.
화룡점정으로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 옆에 붉은색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쓰인 PCF(Parti communiste Français, 프랑스 공산당)까지.
내가 말을 않자 장이라는 남자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이오. 설마 내가 진짜 서기장일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난 어디까지나 보슈들을 증오하는 프랑스인 중 한 명일 뿐이외다."
"그렇군요. 그 <붉은 수탉>이 조직의 이름인가요?"
"그렇소. 제법 괜찮은 이름 아니오? 참고로 내가 지었다오."
장은 탁자에 놓인 와인을 집어 들더니 철제 컵에 따라 내게 건넸다.
"우선 한잔하시오. 할 얘기가 많을 텐데, 목은 축여야 하지 않겠소."
***
올해 마흔 살인 장 모리스가 <붉은 수탉>을 조직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보슈들이 소비에트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아니나 다를까, 사흘 뒤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이 내려왔소.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파시스트들과 싸울 준비를 갖추라고. 그렇게 우리는 총을 들었지."
장은 내게 그동안 자신들이 거둔 성과에 대해 자랑스레 떠벌였다.
독일군 장교를 납치해 주요 정보를 탈취한 뒤 산 채로 강에 던져버렸다던가, 독일군에게 협력하는 매국노의 눈을 뽑아버렸다던가 등등.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허풍이나 구라 같아서 말이지. 철로에 폭탄을 설치해 독일군을 500명 넘게 죽였다던가, 몰래 독일군 기지에 침투해 전투기 서너 대를 폭파했다고 하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걸 누가 믿어?
다만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을 보면 적어도 그가 독일군과 싸워왔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이를 입증하듯이 지하실 곳곳에 놓인 무기 중 상당수가 독일제였는데, 노획한 무기들 가운데 화염방사기도 있었다. 저건 또 어떻게 구했대?
"아무튼 제법 놀랐소. 평범한 수송대인 줄 알았는데, 거기에 당신이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라디오에서 이름을 들었던 양반이라니. 이래서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다니까."
"제가 그렇게까지 유명인인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적당히 능청을 떨며 그가 따라주는 와인을 마셨다.
와인에 자부심 강한 프랑스인데도 물을 탄 것처럼 밍밍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맛이 그랬다.
"와인 맛은 어떻소? 영국에서 먹던 것과 다르겠지?"
"음, 확실히 많이 다르네요."
"당연하지. 갈수록 와인이 귀해져서 양을 늘리려고 물을 탔으니까."
뭐야, 진짜로 물 탄 거였어?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장은 어차피 파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마시는 거니까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와인 양을 늘리기 위해서 물을 타는 짓을 프랑스인들이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여러모로 환상이 깨지는구만.
장의 말이 끝난 다음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과 이번 작전의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하는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얘기가 끝나자 그가 내게 물었다.
"잘 들었소. 앞으로의 계획은 뭐요? 무슨 계획이라도 세워둔 거 있소?"
"솔직히 말해서 없습니다."
"없다고?"
장은 내 대답이 뜻밖이었는 듯 눈을 찌푸렸다.
표정은 또 왜 그래?
누가 보면 원수라도 쳐다보는 줄 알겠네.
"애초에 계획이 있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하죠. 당신들에게 구출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포로수용소에서 얼마나 오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안 했거든요?"
"하긴, 그건 그렇군.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이대로 우리랑 함께 지내면서 보슈들을 썰고 다닐 건가?"
"영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군. 그렇다면 당신을 영국으로 돌려보내야겠구만."
"......예?"
"왜 그렇게 놀라는 거요? 영국으로 보내주겠다는데, 혹시 프랑스에도 조금 더 있고 싶은 거요?"
"아니아니...... 영국으로 보내주겠다고요? 저를?"
"그렇소. 왜, 문제 있소?"
다 방법이 있다는 듯이 그는 입꼬리를 실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