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0화
170화 전진 그리고 전진
이른 아침,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포성이 아침의 침묵을 깼다.
"쏴!"
"쏘아!"
아군 포병대는 적이 매복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무자비한 포격을 쏟아부었다. 포격이 끝나는 즉시 공격이 예정된 터라 전차병들도 보병들도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묵묵히 포를 쏘는 포병들을 지켜보았다.
"이 포격으로 그 신형 전차들이 죄다 박살이 나면 좋을 텐데."
닉이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닉처럼 판터들이 포격으로 격파당하길 빌었다. 그래야 내가 살 확률이 올라가니까. 하지만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소대장님, 저 녀석들 제리들 아닙니까?"
"뭐? 독일군?"
보리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독일군이라고? 적들이 먼저 기습이라도 해온 건가?
하지만 이내 내 의문은 풀렸다. 보리스가 말한 독일군 비스무리한 녀석들은 아군 대열 옆에서 나란히 대기하고 있었다.
"놀래라. 저 녀석들, 제리들이 아니라 불가리아군이야. 이번 작전 때 불가리아군도 함께 한다고 하더군."
"불가리아군이라고요? 생긴 건 제리들처럼 생겼는데."
보리스가 불가리아군을 독일군으로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가까운 사이였던 불가리아는 당연히 군대도 독일군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불가리아군의 철모는 독일군의 슈탈헬름과 비슷하게 생겼는 데다 무기는 아예 독일제였다. 이러니 독일군처럼 보일 수밖에.
"얼마 전까지 히틀러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어 아양 떨던 것들이 이제는 아군이라니. 나 참."
아무래도 보리스는 저들이 동맹군인 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원래 정치란 게 다 그런 게 아니겠냐. 그래도 저 친구들은 우리한테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냥 넘어가. 괜히 문제 될 법한 말은 그만하고."
"옙."
포격이 끝나자 무전기에서 무어 소령의 목소리가 나왔다.
-중대, 전진!
이번에는 불가리아군도 우리와 함께 전진했다. 목표는 사흘 전 우리가 참패하고 물러났던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고지에 도착하자마자 포격이 가해졌다.
-주의, 11시 방향에서 공격이다!
-모두 산개!
아쉽지만, 조금 전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판터들은 죄다 멀쩡했다. 판터들의 숫자는 전에 봤던 6대보다 더 많은 10대. 그에 맞서는 아군 전차들은 불가리아군까지 합쳐서 25대.
숫자만 보면 아군이 전혀 꿀릴 게 없어 보이지만, 전차의 성능을 따지면 이쪽이 불리하다. 때문에 아군은 어제 작전회의 때 세운 전술에 따라 움직였다.
-1소대는 나를 따라 정면으로! 2소대와 3소대는 각각 좌측과 우측으로 움직여라!
"수신 완료!"
비록 전차의 성능에선 밀리지만, 쪽수는 우리가 더 많으니 수를 앞세워 측면으로 기동,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무어 소령과 불가리아군의 전차들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 우리는 서둘러 우측으로 기동했다.
쾅!
-3호차, 궤도 파손! 기동 불가!
-지뢰다! 모두 조심해!
적들도 우리가 우회해서 공격해올 것을 예상했는지 기동로에 지뢰를 묻어뒀다. 더럽게 영악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지뢰를 밟아 정지한 전차들을 향해 어김없이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을 맞고 불덩이로 화한 코멧에서 승무원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내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로 후진할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지뢰를 밟지 않길 기도하며 계속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목표, 9시 방향! 거리 600, 철갑탄!"
"장전 완료!"
첫 목표는 포탑만 돌린 채 차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판터였다.
"보리스, 정지!"
게이츠 원사는 잽싸게 포탑을 돌려 목표물을 조준했다. 조준이 끝나기 무섭게 포구로부터 불꽃이 터져 나왔다.
"맞았다! 명중입니다!"
게이츠 원사가 쏜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적의 측면에 명중했다. 엔진에서 불이 나자, 포탑의 회전도 동시에 정지했다.
"한 발 더 먹여!"
격파된 게 확실해 보였지만,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게 마음이 편했다. 철갑탄 한 발이 엔진룸에 연이어 명중하자, 그제야 해치가 열리면서 전차병들이 튀어나왔다.
"좋아, 다시 전진!"
적을 잡았으니 다시 움직여야 할 차례였다. 보리스가 전차를 움직이자 관성의 작용으로 허리를 해치 가장자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순간 고통이 엄습했지만, 차체를 스치고 지나가는 포탄의 충격파를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적이 쏜 포탄은 내 뒤에 있는 전차에 명중하여 궤도를 날려버렸다. 궤도가 망가지자, 승무원들은 지체없이 탈출을 택했다. 승무원들이 전차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2탄이 날아들어 전차를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장전 완료!"
판터 한 대가 급히 후진하며 차체를 돌리려고 시도 중이었다. 놈이 차체를 완전히 돌리기 전에, 게이츠 원사가 주포에 불을 당겼다.
포탄은 명중했지만, 궤도에 맞은 탓에 전차 자체는 멀쩡했다. 이윽고 놈도 우릴 향해 발포했고, 전차 내부로 충격이 전해졌다.
"괜찮아! 튕겨냈다!"
포탑 측면에 달아둔 모포와 텐트가 날아가긴 했지만, 목숨값에 비하면 매우 싸게 먹힌 편이었다. 게이츠 원사가 재차 발포하려는 찰나, 아군 전차가 먼저 선수를 쳤다.
포탑 측면을 관통당한 판터로부터 조종수와 무전수가 빠져나와 뒤로 도망쳤다. 전차장과 포수, 탄약수는 즉사한 듯하다.
좌측으로 돈 2소대도 포격을 개시해, 판터의 수를 착실하게 줄여나갔다. 하지만 판터들도 필사적으로 반격하여 아군 전차들의 포탑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치열한 포격이 오가는 난타전 끝에, 판터 전차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10대 중 절반인 5대가 해치에서 불을 내뿜거나, 궤도가 망가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살아남은 5대는 황급히 연막탄을 터뜨려 자신들을 숨겼다.
"적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보리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왜냐면, 아군의 피해도 독일군 못지않게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으니까.
"......많이도 당했군."
5대의 판터를 격파한 대가로, 아군 전차 13대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불가리아군의 피해는 더 심각해, 보유하고 있던 4호 전차 6대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록 피해가 컸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였다. 아군은 목표였던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퇴각했다. 판터와의 첫 전투에서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전차를 5대나 잃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큰 발전이었다.
***
제7전차연대 1대대가 독일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은 알렉산더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은 승전보 따위가 아니었다.
"이게 독일 놈들의 신형 전차로군."
승전보가 전해지고 사흘 뒤 알렉산더 앞으로 판터 전차들이 배달되었다.
후방의 영국군 사령부로 보내진 판터들은 격파된 것들 중에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 것들로, 포탄이 뚫고 지나간 자국과 불에 그을린 흔적만 빼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었다.
"제리들은 이놈들을 '판터'라고 부른다며? 우리 말로는 표범을 뜻한다고 하던데, 맞나?"
"그렇습니다."
"확실히. 표범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놈이군. 척 보기에도 우리 전차들보다 더 강력해 보이네."
알렉산더는 이미 기술자들이 판터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알아낸 사실이 담긴 보고서를 읽었다. 자세한 것은 영국 본토로 가져가서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알아낸 것만으로도 알렉산더를 감탄시키기엔 충분했다.
차체 전면장갑의 두께는 80mm, 거기에 55도 경사까지 더해져 실질적인 방어력은 130mm에 달한다. 전면장갑이 100mm인 티거보다 뛰어난 수준이었다.
거기다 판터의 주포인 75mm 70구경장 주포는 관통력만 따졌을 때 티거의 88mm 주포보다 뛰어났다. 45톤이나 되는 중량에 어울리지 않는 기동성도 특기할만했다.
"이놈들을 빨리 영국에 보내야겠어. 그래야 우리 기술자들이 이놈을 때려잡을 새 전차를 개발할 수 있지."
***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에서 완성된 판터들은 유럽 대륙을 거의 한 바퀴 돌아 영국에 당도했다.
미리 소식을 듣고 대기하던 영국 기술자들은 판터가 도착하는 즉시 달려들어 독일제 강철 표범의 피부를 벗겨내고, 강철 내장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해부가 끝난 후에는 두툼한 두께의 보고서가 완성되어 처칠의 책상으로 보내졌다.
"그러니까...... 이 판터라는 놈을 정면에서 잡으려면 17파운더 말고는 무리라는 말이군?"
1시간 전까지 각료 및 장성들과 함께 머리를 굴리며 유럽과 아시아 문제를 논의하다 온 처칠은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다고 그가 업무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17파운더를 탑재한 챌린저가 있지 않소? 그걸론 부족한가?"
"각하, 이미 챌린저는 전장에서 여러모로 쓰기 곤란한 전차라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챌린저에 탑재된 17파운더의 화력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장점은 그게 끝이었고 단점이 너무 많았다.
차체가 너무 높아 적의 눈에 쉽게 띄기 때문에 매복과 위장이 힘들고, 차체에 비해 너무 큰 포탑을 탑재한 탓에 전복 사고도 잦았다. 무엇보다 방어력이 약해서 아무리 강한 주포를 달고 있어도 먼저 맞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단점들 때문에 일선부대에선 챌린저를 애물단지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보고를 받은 처칠은 헛기침을 했다.
"그것 참 문제로군. 하는 수 없지. 빨리 우리도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수밖에."
마침 영국도 코멧의 뒤를 이을 신형 전차를 개발 중에 있었다. 현재 설계는 끝났고, 실물을 만드는 과정 중이었는데 전차에 탑재할 주포를 무엇으로 할지 아직 논의가 오가는 중이었다.
한쪽에선 17파운더보다 반동이 적고 화력은 충분히 강한 HV포의 탑재를 주장하는 반면, 한쪽에선 17파운더를 밀고 있었다. 양쪽의 주장이 둘 다 그럴듯한 탓에 처칠도 아직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판터의 등장을 보고받은 지금, 처칠은 마음을 굳혔다.
"역시 17파운더로 해야겠군. 그래야 이 괴물 전차를 정면에서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그 신형 전차가 17파운더를 확실하게 지탱할 수 있소이까?"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17파운더보다 더 큰 포를 탑재해도 견딜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믿어보시지요."
"하긴. 나보다 그들이 더 전문가일 테니 그들 말을 듣는 게 맞겠군. 그렇게 합시다."
책상에는 판터에 대한 보고서 외에 다른 서류도 있었다. 대다수의 영국 시민들에겐 유럽 전선이 1순위였지만, 처칠 같은 정치가들 입장에선 아시아-태평양 전선도 유럽 전선 못지않게 중요했다.
미군이야 원래 잘 싸우니 패스. 대영제국의 아들들도 원래 전투종족이니 패스. 영국군 산하의 인도인들로 구성된 식민지군도 나름 강군이니 일본군과 호각으로 싸우는 게 당연하니 패스.
허나 마지막 문단이 처칠의 시선을 끌었다.
"중국군이라고? 내가 아는 중국군 맞나?"
"맞습니다, 각하. 그 중국군입니다."
"그치들이 갑자기?"
중국군이라 하면, 일본군에게 밀려 수도까지 내주고 산골에 틀어박혀 농성이나 하는 민병대 수준의 잡군이 아니었던가.
그런 중국군이, 한때 영국군조차 압도했던 일본군을 밀어내고 있다고? 그것도 미군이나 영국군과의 합동이 아니라 단독으로?
처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