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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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7화
167화 새로운 전장
"여태껏 프랑스에 잘 있다가 난데없이 발칸으로 가라니 충분히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제군들, 장소만 바뀔 뿐 우리가 할 일은 그대로니까 안심해도 좋다. 우린 이미 프랑스 이전에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도 제리들을 때려잡지 않았나.
제군들도 알다시피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추축국에서 탈퇴하고 독일에 선전포고한 상황이다. 우리가 그리스에 내려서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북상한다고 해도, 제리들은 손가락이나 빨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목표는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제리들은 전쟁을 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기름을 모두 이 두 곳에서 충당하고 있지.
이 두 나라를 우리가 점령해버리면, 제리들은 기름이 없어 발이 묶이게 되네."
몽고메리의 말대로, 산유국인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전쟁 기간 내내 독일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아무리 뛰어난 무기라 할지라도, 기름이 없으면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다. 1944년 8월, 루마니아가 추축동맹에서 탈퇴하자 독일은 극심한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급한 대로 헝가리의 유전에 의지했지만 그마저도 1945년 봄에 소련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티거, 판터 등 독일이 자랑하는 각종 중장비들을 움직일 수가 없어 자폭시키거나 내다 버려야만 했다. 단지 기름이 없다는 이유로.
헝가리와 루마니아만 손에 넣는다면, 독일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것이다.
처음 발칸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 당황해하던 이들도, 설명을 듣고 나자 조용해졌다. 여기에 몽고메리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어차피 제리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때문에 이들 두 나라에 많은 병력을 할애할 수 없네. 우리가 잽싸게 움직여 깃발을 꽂아버리면, 기름이 바닥난 제리들은 손가락만 빨아야겠지.
계획대로라면, 크리스마스가 시작되기 전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겠지. 내 말 이해했나?"
"예, 각하!"
전쟁 끝나고 집에 간다는 말만큼 흥분되는 말도 없는 법.
곧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이 주는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잠자코 몽고메리의 설명을 듣던 무어 소령이 내게 물었다.
"정말로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까?"
"이론대로라면 불가능하진 않겠습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예감으론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스와 유고, 불가리아와 달리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독일과 가깝다. 거기다 독일도 이 두 나라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을 터.
이미 독일군도 나름대로 이 두 곳을 지키기 위해 작전을 짜기 시작했을 것이고, 아군이 국경에 다다랐을 무렵엔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을 것이다.
즉, 몽고메리의 말대로 올해 안에 전쟁을 끝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두뇌가 말하고 있다. 무어 소령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 생각도 그렇다네. 내년 봄이나 여름이라면 몰라도, 올겨울 안에 종전이라니, 누가 봐도 무리지."
거기다 독일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아직 일본이 남아있다. 다행히 미국의 도움으로 벌크업에 들어간 중국이 나름 선전 중이라곤 하나, 실제 역사에서도 소련의 참전 전까지 결사 항전을 부르짖던 일본이다.
당장 독일을 꺽고 태평양으로 달려가도, 일본의 항복까지 받아내려면 족히 1년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휴가를 열심히 즐기도록.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 알겠나!"
"예!"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은 몽고메리의 말만 믿곤 연말에 집에 돌아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과연 일이 이들의 예상대로 풀릴련지.
***
예상대로, 독일은 손가락만 빨면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 그리스와 유고, 불가리아가 떨어져 나간 판국에 헝가리와 루마니아까지 잃으면 우리는 끝입니다."
"다행히 헝가리와 루마니아 주둔 병력들은 모두 건재합니다."
"당장 행동을 개시하도록."
베를린으로부터 지령이 떨어지자마자 헝가리와 루마니아 주둔군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이 뭐라도 해보기도 전에, 이미 수도의 주요 시설들은 독일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사전에 매수된 지휘관들은 상부의 출동 명령을 거부하거나 되려 독일군과 협력하였다.
그 결과,
"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호르티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관저를 점령한 독일군 소령에게 물었다. 소령은 호르티의 질문에 즉각 대답했다.
"각하께오선 이곳에 그대로 머물게 되실 겁니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저희가 모든 편의를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알겠네."
헝가리 섭정 호르티는 가족들과 함께 관저에 감금당했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 폐하의 이동 시에는 저희 군 1개 중대가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필요하거나 불만인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와 총리 이온 안토네스쿠 역시 가족들과 함께 사실상 감금당하고 말았다.
***
"거봐,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니나 다를까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그리스나 유고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예상대로라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고생길이 훤한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나저나 발칸이라니, 참......"
휴식 겸 철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처럼 외출이 허가되어 병사들은 주말마다 밖으로 나가 프랑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이따금씩 위문공연도 와서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상황이 얼마 못 가 급변하고 말았다.
"일주일 뒤에 말입니까?"
"그래, 일주일 뒤. 골치 아프게 됐다."
한숨을 푹 내리쉬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브랜슨 대령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헝가리와 루마니아가 손 한 번 쓰지도 못하고 독일에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이자, 런던에선 난리가 났다. 이러다 유고와 그리스까지 같은 꼴 나는 거 아니냐고.
거기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가해진 폭격은 높으신 분들의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스는 무리더라도, 독일과 국경을 접한 데다 헝가리 바로 밑에 붙어있는 유고라면 말이 다르다. 유고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 발칸반도로 진입해 독일군의 후방을 치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덕분에 우리는 예정보다 열흘 일찍 발칸으로 출발하게 됐다. 이미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주둔군은 그리스로 출발했다고 하니, 우리가 첫 빠따인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니 슬슬 익숙해져야지. 안 그런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대대장님."
국군에서 복무할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철두철미하고 시간표대로 딱딱 맞춰 생활할 것 같은 군대는 사실 예정에도 없던 일과 임기응변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20세기 영국군도 다를 게 없었고.
평시에도 온갖 일이 터져 나오는 법인데, 하물며 전시에는 또 어떻겠는가.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병사들한테도 얘기해두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발칸에 가면 전쟁 끝날 때까지 이곳에 올 일이 없을테니까."
"알겠습니다."
***
"작전은 모두 성공입니다. 우리 군의 피해는 경미하며,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도 저항을 포기하고 우리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이걸로 급한 불은 끈 셈이군."
카나리스의 말에 베크는 조용히 뇌까리며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허나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당장 전세를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불씨는 되살아나 더 큰불로 번질 터.
하루라도 빨리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전황을 타계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일까?
베크는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조금 전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안 되지. 안 돼.
독일의 존망을 걸고 거사를 일으킨 우리가, 항복을 한다고? 사형수를 형 집행 전에 죽이고 대신 형장에 서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직 항복을 논하기엔 이르다. 국방군의 전력은 여전히 강력하며, 적들도 우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베크는 지도를 응시했다. 프랑스를 빼앗겼지만, 보급선이 길어진 연합군의 진격이 서서히 둔화되면서 독일군은 방어선 형성에 성공했다. 적들이 멈춰 서 있는 지금, 독일군은 인력과 물자를 쏟아부어 방어선을 강화했다.
소련군의 경우, 드네프르 강을 따라 구축된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고전 중이었다.
공업지대와 농지가 위치한 우크라이나 동부를 소련에게 도로 내준 것은 뼈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켜야 할 곳은 많은데, 병사는 부족하니까.
영토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전선을 뒤로 크게 물린 덕분에, 아군은 동부전선 재건에 투자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발칸의 경우,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큰 피해 없이 제압함으로써 당장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국민들의 사기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일각에선 유고도 점령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대신 공군을 동원해 베오그라드를 가루가 되도록 폭격을 가하긴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괴르델러의 물음에 베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총리도 알다시피, 저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간 1918년이 되풀이될 걸세."
"그렇지요."
"따라서 당장은 버틸 수밖에 없어. 물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해지겠지만...... 불가피한 희생이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우선 주요 거점들을 끼고 방어에 올인하며 적들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준다면, 저들의 생각도 분명 달라지겠지. 국민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는 친구들이니, 전쟁이 길어지는 게 저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냐.
자신들의 피해가 커지고, 우리가 굳건하게 버틸수록 런던과 워싱턴의 인간들도 전쟁 대신 평화협상만이 유일한 방법이란 걸 깨닫게 될 걸세. 적어도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싫어도 우리 말을 듣게 될 거야."
즉, 적국 국민들이 전쟁에 지쳐 반전을 외치기 전까지 버티겠다는 뜻이다.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괴르델러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이 길이 독일을 위한 길일까?
전쟁을 멈추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던 자신들이, 이제는 항복을 피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는 현실에 괴르델러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런 괴르델러의 복잡한 속마음을 모르는 베크는 곧 전장에 투입될 신형 무기 얘기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이걸 좀 보게. 며칠 전장에 보내질 신무기들일세."
베크가 꺼낸 사진은 두 장으로, 하나는 망치처럼 생긴 요상한 물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련군의 T-34를 닮은 전차였다.
"여기 이놈은 판처파우스트일세. 우리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휴대용 대전차무기지. 일회용이라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명중만 한다면 그 어떤 전차도 격파할 수 있어."
"이놈은 뭡니까? T-34를 닮은 것 같은데......"
"우리 군의 신형 전차일세. 정식명칭은 5호 전차 판터. 기존의 4호 전차보다 더 강력한 녀석이지. 이놈들이 우리 독일의 승리에 중요한 발판이 되어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