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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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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4화

 164화 행운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온다

 그토록 믿었던 연합국과의 강화 협상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정부 내에선 무거운 적막감이 돌았다.

 히틀러 죽이고, 정권 잡고, 국민들을 적당히 속이면 모두가 다 끝인 줄 알았다.

 적당히 뱉어낼 것만 뱉어낸다면 전쟁에 지친 연합국은 얼씨구나 하며 냉큼 손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러고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강화에 실패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연합국은 여전히 무조건 항복 외 어떤 종류의 협상도 불가라는 방침을 고수했고, 공습도 멈추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북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하는 바람에, 이제는 남과 북 양쪽에서 싸워야 할 판이다.

 모두 계산에는 없었던 일들이다.

 "이제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

 베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최근 그는 나이를 더 먹은 것처럼 보였다. 이마의 주름살은 더 늘어났고, 머리카락은 더 가늘어졌다.

 "저들이 강화를 거절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카나리스의 말은 하나 마나였다. 그걸 지금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짜증이 확 치솟은 베크가 뭐라고 하기 전에 카나리스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들이 아주 강화를 포기할 생각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액수를 더 높이면, 저들도 혹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것들을 더 내걸 생각인가?"

 "현재 우리가 장악한 동방 영토들을 모두 폴란드에 넘겨준다고 제안하는 겁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휴전 즉시 말입니다.

 히틀러가 레벤스라움을 제창했던 것처럼, 폴란드 놈들도 발트,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영토를 탐냈습니다. 그러니 폴란드인들은 분명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독일의 아들들이 피땀 흘려 얻어 낸 땅을 폴란드 돼지들한테 공짜로 넘겨주자는 말인가?"

 할더의 물음에 카나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연합군은 우리가 동방 영토를 합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넘겨주기는 싫지만, 어차피 우리가 차지할 수도 없는 땅입니다. 따라서 폴란드한테 그냥 줘버리자는 겁니다. 그래야 저들도 우리의 제안이 진정성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으음......"

 어차피 먹지 못할 땅이니, 선심 쓰듯이 줘버리자는 말이다. 폴란드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국토도 배로 늘어나는 셈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독일의 정당한 영토' 외의 땅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줘야만 연합국도 우리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폴란드에게 소련의 영토를 넘겨주면, 우리 병사들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지.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서 말이 달라질 순 있겠지만."

 베크는 카나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음 회담 때 제시해보기로 했다.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닐세. 저들은 우리가 나치와 다를 바 없다고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어. 보다 더 진정성을 보일 방법이 없겠나?"

 "이건 어떻습니까? 힘러와 하이드리히가 죽었지만, 여전히 SS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을 해체시킨다면, 연합국도 우리가 나치가 아니라고 확신하지 않겠습니까?"

 괴르델러의 말이었다.

 "그렇군.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베크는 무릎을 탁 쳤다. SS가 해체 명령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해체를 보류했을 뿐, 어차피 SS는 전쟁이 끝나면 해체시킬 예정이었다.

 비록 위험 요소가 크긴 하나, SS를 해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너무나 컸다. 연합국으로부터 신뢰를 얻음과 동시에, 쿠데타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미 전국 각지에 있는 SS 병영을 국방군과 아프베어가 감시 중입니다. 그들이 뭔 수를 꾸미더라도 사전에 진압할 수 있습니다."

 오스터도 카나리스의 의견에 적극 찬성을 표했다. 할더, 트레슈코프, 펠기벨도 같은 의견이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

 "살아 있어서 다행이군. 고개 들게나."

 파울 하우서 SS 대장의 말에도, 디트리히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하들의 목숨을 방패 삼아 비겁하게 목숨을 건진 접니다. 그런 제가 무슨 낯으로 각하를 뵐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건 자네 탓이 아니었어."

 디트리히가 지휘하는 LSSAH는 전력으로 분투했지만, 끝끝내 영국군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겨우 남아 있던 병력과 장비들은 모두 유실되었고, 사단장 디트리히조차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칠 수 있었다.

 차량도 없이 걸어서 하우서가 이끄는 다스 라이히에 도착한 그는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찢어지고, 진흙으로 더러워진 군복과 뺨에 가득한 상처들은 그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증명해줬다.

 "각하, 계십니까?"

 하우서의 부관이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하게 뛰어왔나?"

 "지금 바로 보셔야 합니다."

 부관이 내민 전보를 받아든 하우서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아니, 이건 또 뭔......"

 "무슨 소식입니까?"

 하우서는 설명 대신 디트리히에게 전보를 건넸다. 전보를 읽던 디트리히도 덩달아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 SS 부대는 즉시 독일 본토로 복귀하거나 국방군의 명령에 따르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각하, 추가 소식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독일 본국과의 교신을 담당하던 SS 상사가 달려와 새로운 소식이 적힌 전보를 건넸다.

 독일에 있는 모든 SS 부대들이 기습을 당해 무장해제당했다는 것이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직위를 가진 간부들은 모두 체포되어 압송되었고, 체포를 면한 SS 대원들도 막사에 감금되어 엄밀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소식에 두 역전의 노장은 충격에 빠졌다.

 사유는 SS가 총통 암살에 관여했으며 현재 쿠데타를 계획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SS 대원은 즉시 총살될 거라고?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는 건가?"

 디트리히는 어이가 없었다. SS만큼 총통에게 충성을 바친 조직이 없는데, 이제는 대놓고 반역자 취급이라니!

 물론 실제로 총통을 암살한 세력이 SS 내부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지금 정권을 잡은 신정부란 작자들이 사실은 총통을 암살했고 그걸 SS에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라면?

 진실을 알아챈 SS가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을 두려워해서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디트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각하, 이건 모략이 분명합니다. 놈들은 우리에게 총통 암살이라는 누명을 씌울 생각입니다. 절대로 저들의 요구에 응해선 안 됩니다."

 "내 생각도 그렇네. 하지만 이제부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신정부의 복귀 명령을 거부한다고 해도, 본국의 지원 없이 전장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하우서가 있는 다스 라이히를 포함한 제2 SS 기갑군단은 연합군과의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

 물론 그보다 몇 배나 되는 피해를 적들에게 안겨줬지만, 전과와는 별개로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쯤은 일개 이등병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베를린의 명령을 무시한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고 명령대로 독일로 돌아가면, 되려 총통을 암살한 반역자 누명이 씌워져 감금당할 뿐.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하우서는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허, 내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말이 이럴 줄이야. 처량하구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미친 척하고 쿠데타라도 일으켜봐? 하지만 하우서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신정부에 의심을 품고 있거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장군들이 많다고 한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무슨 수로 독일까지 갈 것이며 들키지 않고 쿠데타에 필요한 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겠는가.

 하우서가 고민에 빠진 사이, 공습경보가 울렸다.

 "각하, 공습입니다! 서둘러 대피를!"

 그러나, 하늘에 나타난 영국군 항공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삐라였다. 적의 의도가 폭격이 아닌 삐라 살포란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온 하우서는 바닥에 떨어진 삐라를 주웠다. 삐라에는 항복할 경우, 인도적인 대우와 함께 적절한 치료와 따뜻한 식사, 안락한 숙소가 제공될 것이라고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병사들에게 수거해서 불태우라고 지시하겠-"

 "됐네. 그냥 내버려 둬. 가뜩이나 피곤할 텐데 뭐하러 그런 일을 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부관의 우려에도 하우서는 병사들이 삐라를 줍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두 시선은 삐라에 꽂혀 있었다. 하우서를 따라 텐트에서 나온 디트리히가 입을 열기 직전, 하우서가 먼저 말을 걸었다.

 "디트리히."

 "예, 각하."

 "자네는 나를 믿나?"

 "물론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따라올 생각이 있나?"

 디트리히는 하우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만류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각하만 보고 따라올 겁니다."

 "그렇군. 고맙네, 덕분에 결심이 섰어."

 ***

 요 며칠 간의 격전에 걸맞지 않게 전선의 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귀에 닿는 소리라곤 바람이 부는 소리와 참호에 숨은 병사들이 조곤조곤 나누는 잡담뿐.

 느낌상으론 오늘 저녁도 별 탈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이다. 경험상 긴장이 풀어진 후에야 일이 터졌거든.

 해가 뜨려면 앞으로 3시간이 더 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는 수밖에.

 "소대장님, 커피 좀 드십쇼."

 "고맙다."

 보통 때라면 차가 나왔겠지만,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을 위해 차 대신 커피가 나왔다. 쓰기만 쓰고 맛대가리는 하나도 없는 놈이지만, 이놈이라도 없으면 도무지 버틸 수 없기에 경계 근무를 설 때는 물처럼 마시고 있다.

 닉이 내게 건넨 커피는 혀가 델 정도로 뜨거웠다. 조금이라도 미지근하게 먹으려고 호호 불어서 마시고 있는데, 전방에서 엔진음이 들렸다.

 소리를 봐선 전차나 장갑차는 아니다. 그보다 더 작은 소형 차량 같은데.

 "원사, 뭐 보이는 거 있어요?"

 "아뇨, 아직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혹시 몰라 소대 전체에 경계령을 내리곤, 닉에게도 유탄을 장전해둘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엔진은 켜지 않았다. 섣불리 켰다간 되려 이쪽 위치를 발각당할 수 있어서였다.

 조용히 쌍안경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주시하는데, 수풀 사이로 퀴벨바겐 한 대가 나타나 곧장 이쪽으로 굴러왔다.

 "백기를 내걸고 있잖아?"

 퀴벨바겐에는 런닝셔츠만한 크기의 백기가 걸려 있었다. 탑승자는 운전병과 조수석의 장교, 단 두 명뿐.

 "보리스, 라이트 켜."

 "예, 소대장님."

 전차의 전조등을 켜자, 갑작스런 빛에 놀란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차가 멈춰 섰다.

 "정지! 손 들고 차에서 내려!"

 백기를 내걸고 적진 코앞까지 온 상대가 허튼수작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원칙대로 두 손 들고 차에서 내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상대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잠깐만! 우린 사절이다! 하우서 SS 대장 각하의 서신을 들고 왔다!"

 하우서? 설마 그 파울 하우서를 얘기하는 건가? 사절로 온 두 독일군 모두 SS였다.

 "당신네 지휘관과 얘기를 하고 싶다. 안내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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