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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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2화
162화 동상이몽 (2)
"......그렇습니까."
역시,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건가.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를 악물었다.
"두 번째 제안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희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도 해방할 의향이 있습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은 1914년의 국경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이탈리아에서도 무조건적인 철수를-"
"그것도 불가입니다."
"아니, 어째서 말입니까?"
자신의 말을 자른 상대방의 무례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대신, 슈타우펜베르크는 당황하고 말았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그가.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독일 측 인사들과 달리, 미국과 영국의 협상가들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요. 결코 그 어떤 종류의 협상도 불가하고 오직 무조건 항복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혹시 모르시는 겁니까? 저희는 히틀러와 나치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부득이하게 국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히틀러를 계승했다고 하나 전쟁이 끝나는 즉시 나치와 그 잔재를 청산할 계획입니다."
"예, 그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원칙은 원칙입니다. 이미 저희의 본국은 귀국의 항복 외에는 어떤 타협도 할 생각이 없고, 저희는 그것을 귀국에게 재확인시켜드리려 온 것입니다."
협상단도 슈타우펜베르크가 꺼낸 독일의 제안 안이 나름의 장점을 가지곤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일 뿐 본국의 방침이 최우선이었다. 무조건 항복 외엔 어떤 협상도 불가.
"귀국께서 진정으로 전쟁을 끝낼 의향이 있으시다면, 항복이라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슈타우펜베르크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 저희가 귀측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경우, 국민들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지난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십니까? 당신들은 독일에서 제2, 3의 나치가 나타나 다시 유럽과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드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리고 소련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련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항복해버린다면, 러시아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동유럽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그리고 놈들은 틀림없이 칼끝을 돌려 서유럽을 노리게 되겠죠.
우리의 조건은 단순합니다. 즉시 정전 및 최소한의 영토만 인정해준다면, 우리는 방패가 되어 소련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낼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거절하실 겁니까?"
슈타우펜베르크의 장광설도 연합국 협상단에겐 별다른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항복이 늦어질수록 요구사항이 더 가혹해질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죠."
***
"......그게 무슨 소리인가?"
베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그는 하이드리히와 그 수하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것에 대해 자축하고 있던 참이었다.
"협상이 실패했다고? 아니, 어째서?"
협상이 실패하리라곤 예상도 못했던 그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분명히 저들이 혹할만한 조건들은 모두 내걸었는데?
"혹시 우리가 히틀러를 계승했다고 나치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이미 저들도 우리가 겉으로 표방하는 것과 달리 나치와 거리를 두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인가! 왜 협상을 거부한 거지?"
협상이 실패했다는 소식에 당혹스럽기는 카나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항복 외에는 그 어떤 종류의 협상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무슨......!"
베크는 어이가 없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양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고?
거기다 무조건 항복? 그냥 닥치고 지배나 받으라 이건가?
"저들은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자리에 동석한 전 라이프치히 시장이자, 지금은 임시 총리로 임명된 카를 괴르델러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만약 연합국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거요."
전황은 불리하다.
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했고, 소련군도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이탈리아에는 파르티잔들이 들끓고 있다.
그뿐인가?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맹국들조차 슬슬 발을 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미 그리스와 유고는 영국과 밀당 중이고,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동부전선으로 보낼 병력들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며 추가적인 지원군 파견을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핀란드조차 미국 측 협상단과 몰래 만나고 있다.
국민들도 전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합군은 독일 영토에 발조차 디디지 못했고 독일은 여전히 유럽의 광활한 대지를 지배하고 있다.
'꼭 1918년처럼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항복을 선언한다면?
1차대전 때도, 국민들은 적들이 독일 영토에 들어오지도 못했는데도 항복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를 두고 내부의 유대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것이라는 소문이 진지하게 돌았고, 적지 않은 국민들이 그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치가 집권했고, 결국에는 오늘에 이르기에 되었다.
그런데 이전처럼 항복을 해버린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택도 없는 소리.
"항복은, 절대로 항복은 안 되오. 그랬다간 국민들이 우리 머리채를 붙잡고 개처럼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닐 거요."
단순히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괴르델러의 안색은 동사자의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강화를 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나치 놈들이 아니라 우리가 될 겁니다!"
"하지만 저들이 협상할 생각이 없는데 어찌한단 말인가."
베크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답답했다.
히틀러를 죽이고 정권을 잡으면 모든 일이 수월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들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얼굴이 상기된 채 뛰어온 오스터를 본 카나리스가 퉁명스레 물었다. 이미 협상이 파토났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큰 나머지, 이젠 어떤 소식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동부전선에 관련된 소식인가?"
"아닙니다. 프랑스 소식입니다."
가까스로 진정한 오스터가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
덜커덩!
"내려, 이 새끼들아!"
"뛰어! 뛰어!"
상륙정 도크가 열리자마자 미 육군 병사들은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가 바닷물에 젖은 모래사장 위를 힘껏 내달렸다.
함포 공격에서 살아남은 기관총 벙커들에게서 총알이 날아왔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프랑스 북부의 독일군 병력들이 죄다 남부로 내려가고, 히틀러의 죽음으로 독일 전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연합군은 북프랑스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했다.
결과는 대성공.
"손들어!"
"빨랑 튀어나와 새끼들아!"
해안을 지키던 병사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걸었다.
"어이, 이 녀석들 좀 봐. 제리들이 아닌데?"
"동양인이잖아? 쪽발이들인가?"
"러시아어를 하는데?"
정예병력들은 모두 남부로 보냈기에, 독일군은 해안방어에 소련군 포로들로 이루어진 동방부대를 배치했다. 살기 위해 독일 군복을 입었던 그들은 독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연합군이 상륙하자, 그들은 잽싸게 항복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인지한 후에도, 독일군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제공권은 오래 전에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기갑부대도 얼마 없었다. 기갑부대는 모두 남프랑스와 러시아 전선에 있었다.
"후퇴한다."
"예?"
"어차피 우리들만으론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전차나 돌격포도 없이, 뭔 수로 놈들과 맞서 싸운단 말인가? 전군에 퇴각 명령이나 전하게."
노르망디에 상륙한 지 사흘만에 연합군은 캉을 점령하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
"야, 야. 표정 좀 풀어라. 얼굴이 그게 뭐냐?"
히틀러 사망 소식이 꽤 오랫동안 달아올랐던 부대 분위기는 출정 소식이 전해지면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고, 부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했다.
"내가 말했잖냐. 히틀러 하나 죽었다고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부하들을 보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이 녀석들은 진심으로 전쟁이 곧 끝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협상이나 휴전 같은 소식들은 하나도 없었고, 돌아온 것은 출정 명령이었다.
전쟁이 끝나는 줄 알고 기뻐했는데, 다시 전쟁터로 가라는 소릴 들었으니 맥이 빠질 만도 하지.
그런데 니들, 이건 알고 있어라. 여기서 전쟁 끝나도 아직 태평양이 남아있거든?
"현재 독일군은 여기, 보르도에서 리옹까지, 그리고 스위스 국경까지 전면적으로 퇴각한 상태다."
작전 회의에서 브랜슨 대령이 지도판을 펼쳐놓고 전황을 설명했다.
"거기다 나흘 전에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아군이 상륙했다. 어제 캉을 점령하고, 지금은 파리를 향해 내달리는 중이지.
앞뒤로 공격받고 있는 입장이니, 독일군도 자기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발을 빼려는 준비 중이다. 이미 다수의 병력들이 독일 국경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고, 추가적인 장비나 병력의 지원은 뜸한 상태다.
즉, 지금이 공격하기 최적의 순간이라는 소리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지휘봉을 내려놓은 브랜슨 대령은 사단본부에서 세운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우리 대대는 리옹으로 향하는 아군을 지원할 겸 스위스로 도주하는 독일군의 퇴각을 막기 위해 크게 우회하여 공격할 예정이었다.
"작전 개시와 동시에 리옹의 레지스탕스들도 일제히 봉기할 예정이다.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 리옹을 해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적들도 퇴각하기 바빠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은커녕 마을과 도로 몇 개만 겨우 이어진 형편없는 상태라고 하네. 반면, 이쪽은 포병과 공군 모두 놈들보다 우월하지. 별다른 변수가 없으면 아주 손쉬운 사냥이 될 걸세."
이후에도 독일군의 예상되는 방어 지점이 어떻느니, 공군의 지원이 어떻니 어쩌고저쩌고가 계속되다가, 회의 막판에야 우리 중대의 담당 범위가 정해졌다.
"무어 소령."
"예."
"자네가 지휘하는 1중대는 아군 보병 연대를 지원해 114번 도로를 따라 공격하게 될 걸세.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
같은 시각,
LSSAH는 리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총통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로, 부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가뜩이나 이어진 격전과 퇴각으로 부대의 타격도 큰데, 새로 수립된 정부가 곧 SS를 해체할 것이란 소문까지 돌자 가뜩이나 어두운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들 사이에서도, 사실은 총통을 죽인 범인들이 새 정부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진지하게 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나치당의 고위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는가? 총통 암살에 관여해서라곤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총통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가?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네."
사단장 디트리히는 여느 때처럼 지도를 들여다보며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적들부터 막는데 집중하도록 하지. 아직 소문이 사실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니. 안 그런가?"
"맞습니다, 각하!"
"적들이 공격해온다면 틀림없이 114번 도로를 따라 공격해올 겁니다. 따라서 가용 가능한 병력들을 배치해 적습에 대비해야 합니다."
"흠, 그랬다간 인근의 302보병사단에서 난리를 칠 텐데."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사단에 남은 티거들을 모두 배치하는 겁니다. 티거의 화력이라면 보병 1개 연대를 배치한 것과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 현재 사단에 남은 전차는 총 몇 대지?"
"모두 합쳐 9대입니다. 그중 티거는 단 3대뿐입니다."
사단 내의 모든 전차가 겨우 9대뿐이라니. 처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디트리히는 쓴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티거가 3대라도 있다니 다행인 건가.
"티거는 전부 이쪽에 배치하게. 어차피 연료도 부족해서 멀리 갈 수도 없으니까. 알겠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