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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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2화
192화 발악 (2)
"빌어먹을. 이제 삽질과는 영영 작별인 줄 알았는데."
보병들만으론 제때 전차호를 만들 수 없었기에, 전차병들도 야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파야만 했다.
그렇게 완성된 전차호로 전차를 이동시킨 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제리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생각해보십쇼. 이미 진 전쟁이나 다름없는데, 아직까지 싸우려 들다니. 정상인의 머리에서 나올 발상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야. 정상인이라면 진작에 백기를 들었겠지. 정상이 아니니까 싸우는 거지."
그런데 니들, 그거 아냐? 지금 싸우고 있는 놈들이 그나마 정상인이라는 거.
역사에서 독일은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함락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다. 승패가 정해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독일 정부가 히틀러와 같은 선택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일본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는 점이다.
원자탄이 만들어지려면 1년하고 6개월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 힘이 빠지는 듯했다.
물론 일본이 남았다고 해서 모든 부대가 죄다 아시아로 가는 것은 아닐 테고, 독일에 주둔할 부대들도 있겠지만 우리 부대는 결코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터였다.
제리들 때려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친구들이니, 태평양에 보내도 잘 싸우지 않겠나? 뭐, 이미 쪽발이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고? 그럼 반드시 가야지! 화려한 전공 기대하겠네, 하하!
......벌써부터 높으신 분들이 우릴 두고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제기랄. 괜히 군대에선 너무 잘하면 오히려 더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
"지금쯤 다 데워진 것 같습니다."
게이츠 원사가 집게로 깜부기불 위에 올려둔 통조림을 집어 들어 내게 건넸다.
그런데 잠깐. 이 통조림, 평소에 먹던 것과 달랐다.
"콘치즈잖아?"
"새로 나온 놈이라더군요. 듣기로는 무슨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인데, 맛이 너무 좋아서 전투식량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로튼 일가에게 전수해준 요리가 돌고 돌아 내 앞에 나타나다니. 마지막으로 받았던 편지에서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직원을 뽑아야 할 정도라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더니, 이제는 전투식량에까지 진출할 줄이야. 신기하다, 신기해.
"맛은 어떻습니까?"
"......그저 그런데요."
감회와는 별개로 통조림 속 콘치즈의 맛은 기대 이하였다.
자고로 콘치즈는 달콤짭짤하면서 적당히 느끼해야 하는데, 이놈은 그냥 단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데다 치즈가 엉겨 붙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 나라에 콘치즈를 전파한 사람으로선 대단히 실망스러운 퀄리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못 먹을 맛은 아니라서, 배를 채우는 용도로는 적당했다. 식사를 끝내고 영국인이라면 으레 그렇듯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던 참이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익숙한 소음이 들렸다. 희미한 총성과 폭음, 그리고 무한궤도 소리.
"전원 승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번개처럼 일어나 전차에 승차했다. 보리스가 엔진에 시동을 거는 사이, 나는 무전기를 켜서 통신상태를 확인했다. 이상 없음.
"닉, 첫 발은 철갑탄으로 해라!"
"알겠습니다!"
-여기는 들소. 들리는가?
"여기는 물개. 아주 잘 들린다.
-막 들어온 소식이다. 아군의 측면을 담당하던 유고군 쪽에서 이미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곧 적들이 이곳에도 나타날 것이다. 긴장풀지 말도록.
"수신 완료."
***
"급한 대로 끌고 왔다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로군,"
회프너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작전지도를 응시했다.
여태껏 독일 본토에 있다가 나흘 전에 헝가리 파견군으로 보내진 그의 임무는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들의 진격을 최대한 막아내는 것이었다.
회프너의 참모들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에 전력을 집중하자고 건의했지만, 회프너의 생각은 달랐다.
부족한 병력만으론 방어에 올인해봤자 결국 뚫리기 마련. 차라리 병력을 최대한 긁어모아, 적에게 역습을 가하는 편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마침 그의 수중에는 티거 중전차대대와 판터 대대가 여럿 있었다. 이들을 앞세워 공세를 가한다면, 적의 최전선을 돌파하는 일은 무리가 아닐 터.
"작전은 간단하네. 적 전선을 돌파, 그래도 우회하여 적들을 포위시키는 거지. 소박하게 2개 사단 정도만 포위하면, 적들은 알아서 물러날 걸세."
회프너는 이미 최전선의 영국군이 보급 문제로 진격이 더뎌졌다는 것과 그들의 측면을 지키는 유고군이 오합지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발칸 원정군의 규모는 서부전선의 연합군과 비교하면 극소수. 규모가 작기에 서부전선에서라면 별일 아닌 수준으로 치부될 2개 사단의 괴멸도 발칸 원정군에겐 진격을 멈출 정도의 큰일일 터였다.
"지난 루마니아에서의 치욕을 되갚아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병사들에게 마음껏 날뛰라고 전해."
***
첫 포성이 들리고 10여 분 뒤, 포격이 아군 진지를 덮쳤다.
해치를 닫을 틈도 없이, 포탄이 비 오듯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서둘러 포탑 안으로 피신한 나는 구석에 놔둔 철모를 들어 황급히 머리에 썼다.
얼마 못 가 포격으로 땅에서 튀어 오른 돌멩이와 흙덩이들이 전차 내부로 쏟아졌다.
"이제 시작이군.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게이츠 원사가 소리쳤지만, 포격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52톤에 달하는 전차가 흔들거렸다.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포격이 겨우 끝났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부터 확인했다. 족히 1시간은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겨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전차에 이상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전차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해치를 열어둔 탓에 내부가 엉망이었다.
포탑 바닥과 전차 상부에는 식물을 키울 수 있을 정도로 흙이 쌓여있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우나 고민하는데, 무어 소령으로부터 각 소대의 피해 상황을 집계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기는 물개 1. 피해 상황 보고 바란다."
-물개 2, 전조등과 공축 기관총 총열이 파손되었다. 주포와 엔진은 이상 없음.
-물개 3, 피해 없음. 다만 탄약수가 포탑 외벽에 머리를 찧어 부상당했다. 전투는 가능.
-물개 4, 좌우측 무한궤도 손상. 기동 불가. 전투는 가능하다.
제법 격렬한 포격이었지만,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전차들과 달리, 일반 보병들의 경우엔 사상자가 꽤 나온 듯했다. 곳곳에서 위생병을 찾는 목소리들이 귀에 닿았다.
"젠장, 빨리 와!"
"엄마아아아아!"
"내 팔! 내 파아아알!"
포격으로 인해 참호에서 튕겨 나가거나, 신체 일부가 절단된 병사들이 내지르는 단말마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헤드폰을 쓰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닿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전차병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꼴이 났을 테니."
"맞는 말이야. 신에게 감사라도 해야겠군."
"죄송합니다만, 감사기도를 올리기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포격이 끝난 뒤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게이츠 원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리들입니다. 빌어먹을, 더럽게 많군요."
게이츠 원사의 말대로, 독일군이 개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티거와 판터를 앞세워서.
-중대, 전투 준비!
무어 소령의 외침이 중대망에 울리는 가운데, 나는 적 선두 전차와의 거리를 대략 가늠했다. 1km 거리에 11시 방향.
상대는 그 유명한 티거였다. 하지만 이쪽도 센추리온이라 예전처럼 마냥 당하진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기억들 때문인지 티거를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1시 방향에 적 전차, 조준!"
"이미 끝냈습니다! 쏩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직 무어 소령으로부터 사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미 전투 상황이니, 과감하게 행동해도 상관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쏴!"
-쿵!
포구에서 집채만 한 화염이 솟구치고, 약실이 탄피를 배출했다. 포탑 바닥에 깔린 흙 때문에 탄피가 떨어질 때 둔탁한 소리가 났다.
먼저 쏜 보람도 없이, 포탄은 미세한 차이로 티거를 빗나갔다. 대신 티거의 뒤에서 오던 전차의 무한궤도에 맞았다.
"불명중! 재장전!"
화력 하나는 기깔나게 좋은 17파운더지만, 역시 장거리 사격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했다. 닉이 재장전하는 동안 적과의 거리는 700m로 좁혀졌다.
"장전 끝!"
부디 이번에는 명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사를 외쳤다. 포구에서 또다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발사를 외침과 동시에 눈을 감았는데도 불빛 때문에 몇 초 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맞았다! 격파!"
시야가 마비된 나를 대신해, 게이츠 원사가 결과를 알려줬다. 결과는 명중, 그리고 완파.
17파운더를 정면에서 맞은 티거는 그대로 포탑 해치가 날아가며 정지했다. 해치 밖으로 치솟는 불길은 누가 봐도 격파임을 입증했다.
"맛이 어떠냐, 이 쓰레기 새끼들아!"
"우린 더 이상 네놈들한테 지지 않는다!"
그 티거를, 그것도 한방에 격파하자 부하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반면 독일군은 믿었던 티거가 한 방에 맥없이 격파당하자, 당황했는지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사격 개시!
무어 소령의 구령에 맞춰, 중대 전차들도 일제히 사격하자,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독일 전차들이 한두 대씩 폭발했다. 어쩌다 포탄 두 발을 동시에 맞는 전차도 있었고, 반대로 포탄이 빗나가거나 입사각 때문에 튕겨내는 전차도 있었다.
독일군도 정지하여 발포를 시작했다. 센추리온은 튕겨냈지만, 코멧은 그대로 관통되어 불타올랐다. 참호의 보병들도 기관총을 발사해 전차들과 함께 달려오는 적 보병들을 상대했다.
"장전 완료!"
우리의 다음 목표는 판터였다. 전면장갑만큼은 티거보다 방호력이 우수하기에 이 거리에선 관통할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지만, 일단은 쏴보기로 했다.
"쏴!"
일직선으로 날아간 포탄은 판터의 전면장갑에 명중, 그대로 장갑을 뚫고 내부를 휩쓸었다. 포탑 해치를 열고 전차장이 나와 밖으로 뛰어내렸다. 혼자만 나온 것을 보니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전사한 모양이다.
"명중, 다음-!"
티거 한 대가 정지하더니, 차체를 틀었다. 덕분에 녀석은 자신에게 날아온 포탄을 튕겨낸 듯, 주포에 불을 당겼다.
-쾅!
놈이 쏜 포탄은 아군 센추리온에 명중했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차체 전면장갑이 관통되며 해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10시 방향에 적 전차! 빨리!"
아군 전차를 해치운 티거는 지체 없이 2탄을 발사하여 코멧을 격파했다. 놈이 다음 목표를 찾아 포탑을 회전시킬 때, 게이츠 원사가 주포를 격발시켰다.
"명중입니다!"
17파운더 철갑탄이 포탑을 직격 하자, 포탑의 장갑이 깨지면서 샛노란 화염이 삐져나왔다. 잠시 후 차체 전면부 해치가 열리면서 조종수와 무전수가 기어 나와 총탄을 피해 전차 뒤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적들을 향해 공축 기관총을 갈기던 게이츠 원사는 끝내 적들을 놓치자 분한 듯이 연신 이를 갈았다.
"쥐새끼 같은 놈들, 더럽게 빠르네."
"원사, 11시 방향과 12시 방향 사이에 4호 전차! 거리 700!"
4호 전차 한 대가 동료의 잔해 뒤에 숨어 포탑만 내놓은 채 싸우고 있었다. 17파운더 주포가 자신을 겨냥할 때까지 놈은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뒤늦게 우리의 시선을 느낀 놈이 포탑을 돌렸을 땐 이미 주포에서 포탄이 발사된 뒤였다. 포탑에 17파운더를 정통으로 처맞은 4호 전차는 침묵했다.
"좋았어! 다-"
그 순간, 우측에서 폭음이 울리며 불기운이 뺨에 와닿았다. 파편 몇 개가 살갗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불기둥을 토해내며 불타오르는 센추리온이 보였다. 물개 3이 당한 것이다.
차체에서 떨어져 나간 포탑이 땅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전차의 부품으로 추정되는 금속 물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잔해 너머로 한 무리의 전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군이었다.
"우측에 적 전차 출현! 모두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