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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8화

 188화 붕괴의 시작 (1)

 국경을 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헝가리로 들어갈 때, 우리는 독일군이 공격해올지 몰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국경을 넘어가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경 인근의 다리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길가에는 지뢰가 없었다.

 "이러니까 더 불안한데."

 "제리 녀석들, 우리가 올 줄 몰랐던 거 아냐?"

 "어쩌면 이 모든 게 함정일지도 몰라."

 아무런 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탓에, 되려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째서 독일군은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유고슬라비아까지 적국으로 돌아선 이상,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두는 게 정상인데.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 독일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예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다.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다 끌어다 쓴 결과, 정작 헝가리에는 소수의 병력들만 남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국경을 넘을 때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거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독일은 이번 공세에 문자 그대로 영혼을 끌어다 모은 셈이다. 다른 전선은 깡그리 무시한 채.

 어떻게 하는 짓이 히틀러랑 똑같냐? 설마 히틀러가 아직까지 살아있나?

 헝가리 땅을 밟은 지 4시간이 지나자, 일말의 긴장감마저 사라지고 지루함만 남았다.

 가도 가도 눈에 뵈는 것이라곤 똑같은 풍경뿐. 산 몇 개에 나무 몇 그루, 눈이 반쯤 쌓인 허허벌판.

 황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에 절로 하품이 나왔다.

 "소대장님, 저희 언제까지 진격합니까?"

 지루함에 못 이긴 제레미가 말했다. 아까 전부터 졸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한 녀석의 목소리에서 지루함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연대본부에서 멈추라고 지시할 때까지."

 "제리들은 고사하고 어떻게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슬슬 뭐라도 보일법한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녀석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야에 마차를 탄 민간인이 들어왔다.

 마차를 모는 이는 늙은 농부였는데, 아군을 보고 다소 놀란 듯 황급히 마차를 멈춰 세웠다. 아군 병사 몇 명이 다가가자, 그는 항복한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농부는 영어를 몰랐고, 우리는 헝가리어를 몰랐기에 대화가 좀처럼 되질 않았다.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소통하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농부의 입에서 나름의 정보가 튀어나왔다.

 "독일군, 어디? 혹시 아나?"

 "독일군? 없다. 이 주변에."

 영어 몇 마디를 알아듣고 서투른 영어로 말하는 농부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이 근방에는 독일군이 없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얼마 전에 모두 떠났다고 한다.

 "서부 공세를 위해 철수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계획 때문일 수도 있지."

 무어 소령도 자세한 사정을 몰라 답답했다. 아무튼 상부에선 해 질 때까지 움직이라니 계속 움직이는 수밖에.

 하지만 농부와 만난 지 얼마 못 가, 고지 이에 진을 친 독일군이 나타났다. 놈들이 먼저 우릴 발견하곤 88로 공격을 가해왔다.

 "모두 산개해라!"

 "근처에 독일군 없다며?!"

 농부가 독일군의 명령을 받고 우릴 일부러 속인 건지, 아니면 농부가 그냥 몰랐던 것인지는 일단 재껴두고, 눈앞의 적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88의 공격을 피해 보병들이 산개하는 동안, 전차들은 일렬로 늘어서 고지를 향해 돌진했다.

 독일군도 이에 응수하여 88을 쏟아댔지만, 센추리온의 전면장갑은 88을 튕겨냈다. 독일군 진지와의 거리는 약 1km 남짓. 이 거리라면 88도 충분히 튕겨낼 수 있었다.

 "세상에, 이래서 오래 살고 봐야 하는구나. 그 88을 튕겨내는 날이 오다니."

 88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울상을 짓던 닉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반면 독일군은 열심히 포탄을 쏘아댔지만 쏘는 족족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이제부턴 우리가 한 방 먹여줄 차례지. 닉, 유탄 장전!"

 "유탄 장전!"

 닉이 유탄을 장전하는 사이 게이츠 원사는 신중하게 적 진지를 조준했다. 위장막 때문에 적 진지를 발견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조준 완료!"

 "발사!"

 17파운더의 포성은 여태껏 들었던 전차포들 중에 가장 강력했다. 헤드폰을 쓰고 있는데도 귀청이 따끔거릴 정도였으니.

 거대한 포성만큼이나 위력도 확실했다. 17파운더 포탄이 착탄하자 독일군 진지는 거대한 섬광에 휩싸였다. 진지에 있던 탄약들이 모조리 유폭한 듯했다.

 "명중!"

 "맛이 어떠냐, 소세지 새끼들아!"

 불길에 휩싸인 진지를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88만 믿고 깝죽거리다가 우리한테 역으로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소대 전차들도 거리를 두고 포격을 개시하여 적을 처리했다. 결과는 아군 손실 0, 적 포대 4개 모두 격파.

 첫 데뷔전치곤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속도가 느려 이동에 시간이 다소 걸린 것만 빼면, 완벽 그 자체였다.

 "이놈만 있다면 타이거도 두렵지 않겠는걸."

 "그러게 말입니다. 이놈이 2년, 아니 1년만 일찍 나타났어도 지금쯤 베를린에 있을 텐데."

 게이츠 원사는 이런 훌륭한 전차가 늦게 나온 것이 안타까운 듯했다. 아재요, 모르겠지만 사실 이놈도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일찍 나온 편이거든요?

 우리가 독일군 88 포대를 제압하는 동안, 후방에선 아군과 유고군이 헝가리 국경을 넘고 있었다.

 ***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초반에는.

 지금도 전황은 독일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허나, 베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슬슬 아군의 진격이 둔화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초반에 참패를 당한 미군은 독일군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들은 여전히 밀리고 있지만, 나름 악착같이 저항하여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고, 겨우 길을 뚫었다 싶으면 미군의 예비대가 나타나 다시 길을 가로막기 일쑤였다.

 거기에 영국군과 캐나다군도 독일군의 측면을 깔짝거리며 미군을 지원했다.

 "뫼즈강까지 몇 km나 남았지?"

 "이제 30km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금방입니다, 각하."

 슈파이델은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고 주장했다. 곧 선두부대가 뫼즈강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리라.

 그러나, 슈파이델의 확신에 찬 말도 베크의 불안감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만슈타인은 내게 다른 말을 하더군. 지금이라도 병력을 후퇴시켜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일세. 아직 우리가 우위에 있을 때 물러나야 피를 덜 흘릴 거라고."

 "각하, 승리가 코앞에 있습니다. 지금 한 발자국 물러서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겁니다."

 슈파이델의 강력한 주장에도, 베크는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공격을 계속할 것인가, 여기서 만족하고 물러설 것인가. 양쪽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어 어느 한쪽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자네, 스톡홀름 소식을 들었나?"

 베크의 물음에 슈파이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톡홀름에서 열린 극비회담.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같은 조건만을 반복했고, 끝내 회담은 무산되었다.

 이번 회담으로 유일하게 알아낸 것은 연합국의 조건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정부 내부에선 뭘 해도 가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이번 공세만 마무리되면, 틀림없이 연합국의 입장도 바뀔 것입니다. 각하, 그러니 공세를 계속해야-"

 "과연 그럴까?"

 "예?"

 "과연 공세가 우리의 승리로 끝나도, 저들이 휴전 협상에 응해줄 것 같냐는 말일세."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던 베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저들이 우리와 진정으로 협상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협상에 응했겠지. 하지만 저들은 매번 같은 말만 반복했지. 무조건 항복. 내가 생각하기에 연합국은 진정으로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생각 같네."

 슈파이델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베크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만."

 "각하!"

 "아네. 알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어. 하지만,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네. 내가 생각하는데, 늑대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천재지변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말이지."

 슈파이델은 당황스러웠다.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이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랐던 육군의 대선배 루트비히 베크가 맞단 말인가?

 슈파이델은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부르짖던 베크에게 이끌려 거사에 가담했다. 거사는 성공했고, 그들은 권력을 쟁취했다. 그리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베크는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나약하고 의지를 잃은 노인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자신이 존경했던 대선배의 초라해진 모습은 슈파이델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잠시 혼자 있고 싶네. 나가보게나."

 "알겠습니다, 각하."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베크의 부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하, 급보...... 아,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깨닫고 당황하는 부관과 달리, 베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평소라면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냐며 불같이 화를 냈을 테지만, 그는 이젠 화를 내는 것조차 지친 모양인지 손을 휘휘 저었다.

 "됐네. 용건이나 말해봐."

 "허, 헝가리 방면에서 연합군이 공세를 개시했다고 합니다."

 "헝가리에서?"

 슈파이델이 되물었다. 부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 연합군은 트란실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경 일대에서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헝가리 주둔군 사령부로부터 당장 지원이 필요하다고......."

 "안 돼. 지금 늑대 작전이 한창인데 그리로 돌릴 병력이 없네. 어떻게든 버티라고 전해."

 슈파이델은 이를 악물었다. 늑대 작전을 위해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모을 때, 적군이 공세를 해온다면 막기 힘들다고 우려를 표하던 장군들에게 공세 전에 작전을 성공시키면 된다고 설득하던 그였다.

 하지만, 적들이 이렇게 빨리 공세를 취해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적어도 준비에만 한 달 이상이 소요될 줄 알았는데.......

 "헝가리의 유전을 잃으면 끝장일세. 지금 당장 공세를 중지하고 헝가리로 병력을 투입해야 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당장 공세를 멈추고 병력을 헝가리로 보낸다고 해도 이동에 시간이 걸립니다. 적들도 그걸 노리고 공세를 감행한 게 분명합니다, 각하."

 슈파이델은 마음 구석의 불안을 숨긴 채 말을 이어갔다.

 "늑대 작전은 이대로 계속해야 합니다. 어차피 헝가리 방면의 적들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세를 감행해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아군이 제대로 막아준다면 적들은 틀림없이 얼마 못 가 주저앉을 겁니다!"

 베크는 고심했다. 연합군이 이토록 빨리 공세를 취해온 것도, 준비가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공격하기로 결정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슈파이델의 말대로라면 준비가 되지 않은 연합군은 얼마 못 가 공세를 멈출 것이다.......

 "늑대 작전은 계속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슈파이델과 부관을 돌려보낸 후 혼자가 된 베크는 생각에 잠겼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인 것일까. 늑대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연합군은 강화조약에 관심을 가져주기나 할까. 슈파이델은 틀림없이 연합국이 생각을 달리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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