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7화
187화 최후의 베팅 (3)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모두의 시선과 귀는 신문과 라디오에 꽂혀 있었다.
-......속보입니다.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된 지 3일째 적군의 공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수천 명에 달하는 미군이 전사하고 1만 명에 달하는 포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비상이.......
심각하다.
존나게 심각하다.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역습으로 서부전선은 대혼란에 빠졌다.
최전선의 미군은 독일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그대로 녹아내렸고 현재 퇴각에 급급한 상황.
딱 내가 아는 아르덴 대공세의 모습 그대로다.
세상에. 설마 이 세계에서도 아르덴 대공세가 일어나리라곤 상상을 못했는데.
히틀러 죽은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히틀러랑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거야? 대체 왜?
내가 나만 알고 있는 의문과 꼬리잡기를 하는 동안,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덕분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있는 병력들까지 모조리 서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고, 그 효과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매일같이 패전 소식이 이어지자, 병사들 내부에서 불길한 관측이 나돌았다.
"이러다 1940년이 반복되는 거 아냐?"
뉴스를 듣던 제레미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1940년. 아르덴 숲을 돌파한 독일은 영프 연합군의 대열을 유린하며 진격을 거듭, 됭케르크에 포위된 아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나아가 파리까지 정복했다.
겉으로 보자면 지금 상황은 그 당시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병사들이 비슷한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대장님, 이러다 진짜로 아군이 파리까지 밀리는 거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암만 독일군이 강하다 한들, 지금 전력으로 파리 재점령은커녕 됭케르크까지 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앤트워프 점령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독일군의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진 바가 없어서 속단은 금물이지만, 만약 저들이 역사에서처럼 앤트워프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항구도시인 앤트워프가 점령당할 경우,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보급을 다시 노르망디에서부터 끌고 와야 한다. 자연스레 내년으로 예정된 공세는 물거품이 되는 거고, 독일군은 자국 방어에 투입할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다.
즉, 이번 전투의 승패 여부에 따라 전황이 바뀌진 않더라도, 전쟁이 더 길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내년 여름이 되어서도 독일군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유럽 전선이 뒤로 밀릴수록, 태평양 전선도 오랫동안 계속될 테고.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다.
모두들 초조한 얼굴로 밥을 먹으며 하루빨리 전황이 변하기만을 기다렸지만, 뉴스의 내용이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되던 날,
대대에 명령이 내려왔다.
***
"공세 말입니까?"
"그렇네."
연합군 발칸원정군 총사령관 알렉산더는 본국으로부터 극비명령을 받았다.
서부전선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빠른 시일 안으로 헝가리 방면으로 공세를 가하라는 명령이었다.
마침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의 한방을 위해 헝가리 방면의 병력들까지 죄다 끌고 갔다.
그 덕분에 헝가리 방어선은 매우 취약한 상태.
지금 공세를 개시한다면, 충분히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처칠은 최대한 빨리 공세를 가하라고 알렉산더에게 지시했다.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더라도, 유일한 기름 공급처인 헝가리를 상실할 것을 우려한 독일은 틀림없이 헝가리 방면으로 병력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서부전선에 가해지는 압력 또한 줄어들 것이고, 연합군은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각하, 아직 전 병력의 재편성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했다간 되려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때를 기다리다간 너무 늦네."
참모의 반론에 알렉산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부전선에서의 공세가 마무리되는 대로 독일군은 즉시 헝가리로 병력을 돌리겠지. 그때서야 공세를 개시해봤자 얼마나 이득일 것 같나?
차라리 준비가 덜 됐더라도 독일 놈들의 관심이 서부에 쏠린 지금 공세를 개시하는 게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걸세."
비록 전 병력의 재편성과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하나, 절반가량은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크게 문제없는 상태.
알렉산더는 우선 이들 부대들을 앞세워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군 2개 사단이 빈자리를 메울 예정이네. 불가리아군과 루마니아군도 각각 3개 사단을 보내준다고 했고."
"하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아군이나 미군보다 훨씬 덜떨어집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나는 이들 부대들을 1선에 투입하겠다고 말한 적 없네. 이들은 어디까지나 후방에서 아군을 지원하는 용도로만 활용할걸세. 이들을 후방에 투입하는 만큼 후방의 아군과 미군을 전방에 더 내보낼 수 있을 걸세."
공세가 결정되자 알렉산더와 참모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작전계획을 짰다.
그와 동시에, 일선 부대들도 즉시 비상이 걸렸다.
***
"출동이다, 새끼들아!"
"짐 싸라! 당장!"
서부전선에서 고전하고 있는 아군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헝가리를 공격하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대대는 즉시 이동할 준비를 했다.
당연하게도 우리 대대는 이번 공세의 선두에 설 예정이었다.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올 게 왔구나 하는 감상만 들뿐.
"모두 잘 듣게. 이번에 계획된 아군의 공세는 서부전선에 집중된 제리들의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네."
사단장이 직접 우리 대대를 방문하여, 공세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아군은 크게 A군과 B군으로 나뉘어 A군은 미군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방면을 공격할 예정이었고, B군은 열차 편으로 유고슬라비아로 이동, 오시예크에 하차하여 유고슬라비아군과 헝가리 국경을 넘을 예정이었다.
A군의 목표는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서 떼어내 다시 루마니아와 합치는 것이었고, B군의 목표는 헝가리 국경을 돌파, 유전 지대인 발라톤 호수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대대는 B군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우리는 놈들이 고개를 돌릴 때까지 최대한 열심히 싸워 진격하기만 하면 되네. 유전이 위협받으면 제리들은 틀림없이 공세를 중지하고 헝가리로 헐레벌떡 뛰어오겠지. 그런 다음에는 최대한 버텨주기만 하면 되네. 간단하지 않나?"
너무 간단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즉, 우리 부대의 임무는 적들의 시선을 이끄는 미끼 역할이었다. 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미끼.
"잊지 말게. 우리 모두 자랑스런 대영제국의 아들들이란 사실을, 조국이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나?"
"예!"
악인지 기합인지 모를 고함을 외치는 것으로 설명회는 끝이었다.
대대는 곧바로 열차를 타러 이동을 개시했다. 새로운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군의 장갑차가 길가에 즐비한 미군의 시체를 넘어 질주하고,
루마니아의 영국군이 열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넘을 때,
전쟁의 불길이 미치지 않은 스톡홀름에서 비밀회담이 열렸다.
"또 뵙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탁자 오른편에는 미국과 영국의 밀사들이, 맞은편에는 독일 밀사들이 앉았다.
본래대로라면 이번 협상은 공세가 마무리된 직후에 열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미국과 영국 측에서 먼저 접선해왔다.
드디어 연합국이 생각을 바꾼 모양이라고 판단한 독일 정부에선 연합국의 비밀회담 요청을 즉각 승인했다. 스웨덴에 머물고 있던 독일 협상단은 부푼 마음을 안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즉시 종전과 1939년 3월 이전의 국경 유지입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독일 측 밀사들이 먼저 조건을 제시했다. 독일이 내건 조건은 무척 단순했다. 1년 전 시점에 위의 조건을 내밀며 휴전을 요구했다면, 그 루스벨트조차 이를 받아들일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독일 측 밀사들은 상대방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고민하고 있는 눈치다.
그들은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독일은 더 이상 세계와 척을 질 생각이 없고,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편입될 의향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의미 없는 전쟁을 멈추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가슴 절절한 호소였지만, 냉철한 외교관들인 이들에게 먹히지 않는 얘기였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평화로운 세상 같은 허울뿐인 사탕발림이 아닌 철저한 국인과 계산뿐이었다.
미국 측 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말은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지 않는 한, 전쟁을 멈출 수 없습니다."
"무슨 목적 말씀입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정부의 입장은 귀국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원하십니다."
독일 측 협상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조건 항복이라니, 이번에는 또 어떤 조약을 요구하실 계획입니까?"
"그거야 정치가들이 할 일이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귀측은 정말로 협상에 임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같은 말만 반복하실 거면 왜 나오신 겁니까?"
이번엔 영국 측 인사가 말문을 열었다.
"물론 저희도 같은 말만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말입니다. 서로 간의 협의점을 찾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분위기가 잠시 누그러진 후 영국 측 인사가 조건을 제시했다.
"저희 정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승낙하면 독일 정부와 협상할 의향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우선 독일 정부가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합병이 불법임을 인정하며 이 두 지역을 포기하는 것과 전후 독일 국경의 재설정, 소련과 맺은 강화조약의 파기, 범죄행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재판과 연합군의 독일 주둔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영국 정부는 독일과 종전에 합의할 의향이 있습니다."
영국 측 인사의 말에 독일 협상단이 발끈했다.
"그건 항복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소!"
소련과 맺은 강화조약을 파기할 의향쯤은 얼마든지 있었다. 애초에 소련이 좋아서 조약을 맺은 것이 아니니까.
전범들을 적국에 넘기는 사항 또한 이미 고려했다. 자국의 범죄자들을 타 국가가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굴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무조건 항복보단 낫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아니다.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뿐만 아니라 기존의 독일 국경까지 포기하고 거기다 연합군의 주둔까지 받아들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영국 측 인사의 발언에 독일 협상단은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설 기세였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협상단은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하나만 묻죠. 우리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리라 믿습니까?"
"귀국이 현명할 판단을 할 이성이 남아있다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자리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독일 측 협상단이 먼저 자리에서 퇴장했다. 그들이 떠난 직후, 영국 측 밀사가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요."
미국 측 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저들은 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전세가 독일에 유리하다간 하나, 전쟁의 방향을 뒤집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번 공세로 하여금 연합국이 계산을 달리 할 것이라고 착각에 빠져있었다.
연합국은 협상을 할 생각 따위 없었다. 이번 회담은 어디까지나 독일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을 뿐.
독일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