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5화
185화 최후의 베팅 (1)
연합군은 공세를 멈췄다.
전선 각지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교전을 제외하면, 전선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공세는 없어도 공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미국과 영국 폭격기들의 폭격을 맞았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불바다에 휩싸인 도시 위를 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했고, 이미 공습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시민들은 방공호 안에서 폭탄의 진동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했다.
공습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은 문을 열고 방공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 이번 공습에서도 집이 무사한 사람들은 집에서 하루를 보냈고, 집이 사라진 이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피난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독일 전역이 공습으로 신음하는 와중에도, 신정부 내에선 전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중이었다.
"적들은 공세를 멈췄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이번 해 말~내년 1월 초로 예정된 대공세를 위한 준비 및 휴식기에 들어간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뭔 수를 써서라도 저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와야겠군."
베크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된다면, 현 독일의 상태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지크프리트 방어선 축조에 사력을 다하고 있긴 하나, 공습과 물자 부족으로 인해 공세가 예상되는 연말과 내년 초까지는 완공이 불가능했다. 사실 지금 상태로는 공세 전까지 방어선의 70%만 완성되어도 기적이었다.
기존의 전략은 연합군이 공격해오면 방어로 시간을 끌며 적들의 전력을 소진시킨다는 계획이었지만, 루마니아의 상실과 더불어 지크프리트선 축조에 회의적인 결론이 나오자 점차 신정부에 내에선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무조건 방어가 원칙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겐 공세를 펼칠 여력이 없습니다."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상실하면서 독일군은 연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헝가리의 유전이 아직 수중에 있지만, 플로이에슈티 유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름이 적은데다 그마저도 공습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독일은 소련에 기름 수출을 재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스탈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일단 기름을 판매하겠다만 독일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양에, 그마저도 대금을 먼저 받은 후에야 보내겠다는 입장이었다.
가뜩이나 기름도 모자란 마당에, 공세를 펼친다? 어차피 죽을 거 미리 자살하겠다는 소리와 동급이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 각지에서도 이상징후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공세보다는 우선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기름 부족도 문제지만, 후방 점령지의 치안도 크나큰 골칫덩이였다. 독일과 소련의 평화조약이 발표된 직후, 폴란드와 체코 등 독일 점령지 각지에선 일련의 조직된 움직임이 아프베어에 의해 포착되었다.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 조직들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지만, 영국과 미국 등 서방 연합국의 지원을 받는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달랐다.
"저희 아프베어에선 대규모 봉기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방 점령지로의 병력 배치가 시급합니다."
카나리스가 말했다. 카나리스가 말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확률이 높은 곳은 총 네 곳이었다. 바르샤바, 프라하, 로마, 그리고 부다페스트.
카나리스는 자신이 세운 방어계획을 베크에게 설명하며, 현시점에서 최선의 방책은 방어로 연합군의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킴으로써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입니다. 적들이 방심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시기입니다."
과거 롬멜의 참모로, 신정부의 쿠데타에 가담하여 그 공적을 인정받아 대장으로 진급한 한스 슈파이델은 평소 롬멜이 즐겨 쓰던 말을 인용했다. 정작 롬멜은 친나치 인사로 분류되어 연금 상태에 있다는 게 아이러니였지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지금 우리에게 공세를 펼칠 여력은 없네. 방어전에 전력을 집중해도 모자란단 말일세."
슈파이델의 주장에 카나리스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슈파이델은 뚝심 있게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갔다.
"물론 지금 독일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방어에 올인하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연합국은 오히려 우리가 공세를 펼칠 여력도, 생각도 없다고 판단하여 더욱 거세게 공격할 것입니다."
"......계속 말해보게."
베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슈파이델의 말이 빨라졌다.
"연합군은 현재 예정된 공세 준비와 재편성 문제로 진격을 멈춘 상태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공격해오지 않으리라 단정 짓고 방어 태세도 소홀한 편입니다.
따라서 지금 공세를 가한다면, 적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연합국은 우리가 공세를 펼칠 여력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세를 늦출 것이며, 그사이 우린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또한 이후의 강화회담에서 조금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의 힘을 한 번쯤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슈파이델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연합국이 독일의 강화 제안을 거부하며 무조건 항복 운운하는 것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였다.
허나 독일이 아직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존의 인식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길 터.
"말은 좋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승리했을 경우지. 실패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
카나리스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슈파이델은 이 역시 예상 안의 일이라는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시켜야죠. 늘 실패 가능성만 염두에 두고 행동하다간 될 일도 안 되는 법입니다. 우리의 거사도 실패한 뒤의 후폭풍을 걱정하기보다는 독일을 구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저질렀던 것 아닙니까?"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카나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도 첨예하게 갈렸다. 오스터, 만슈타인, 펠기벨 등은 카나리스의 의견에 동조했고, 울브리히트와 슈타우펜베르크, 비츨레벤은 슈파이델의 의견을 따랐다.
총리 괴르델러도 슈파이델처럼 공격을 가해 연합군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최종 결정은 베크의 몫으로 넘어갔다.
베크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듣기엔 양쪽 모두 일리가 있었다.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공세로 병력과 물자를 소비하면 방어에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적들에게 재정비할 기회를 주는 꼴이므로 공세를 통해 혼란을 줄 필요가 있다.
고민하던 베크가 입을 열자, 서로 논쟁하던 장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결정했네."
"그 말씀은......?"
"적들에게 아직 독일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
참는 게 미덕이라고 하나, 너무 참으면 되려 호구로 보이기 마련.
완전 호구로 낙인찍히기 전에, 먼저 선빵을 갈겨 제대로 한 방 먹여주자는 발상에서 시작된 슈파이델의 공세안은 베크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
신형 센추리온 전차를 지급받은 우리는 애마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센추리온은 이제까지의 영국 전차 중 최고로 강력한 녀석이었지만, 훈련을 통해 적잖은 문제점들이 발견되었다.
우선, 속도가 느리다. 그동안 크롬웰, 코멧의 경쾌한 속도에 익숙해져서 더욱 느리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최고 속도가 30km/h도 채 되지 못하는 건 나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센추리온의 최고 속도는 35km/h인데, 여기선 30만 되어도 엔진에서 기괴한 소리가 날 정도다. 역사보다 일찍 등장한 대신, 엔진이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두 번째 문제는 탄약이었다. 17파운더의 위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원래라면 탄약고였을 공간에 다소 쓸모없는 부조종수석을 만든 탓에 전차에 탑재할 탄약의 양이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포탑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포탑 회전속도. 차라리 수동으로 돌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더럽게 느리다. 이 역시 빨리 나온 만큼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생긴 문제 같았다.
나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상세하게 보고서에 적어서 제출했고, 상부로부터 시급히 문제 해결을 위해 대책을 강구해보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즉, 니들이 하는 말 뭔지 알겠으니까 일단 쓰라는 말이다.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신형 전차를 타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히 강력한 주포와 두꺼운 장갑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이것들이 다 우리를 무서운 나치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까.
훈련에 너무 매진했던 건지, 뒤돌아보니 벌써 11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 정말 빠르다.
서유럽의 아군은 내년 1월로 예정된 독일 본토 공세를 위해 힘을 저축하고 있었다. 비록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위대한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얼마 후면 끝난다는 인식 덕분인지, 부대 곳곳에선 '전쟁이 끝난 후엔 무엇을 할 것이냐'를 주제로 한 토론들이 열렸다. 당연히 내게도 이런 류의 질문들이 여럿 날아오곤 했다.
"소대장님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군대에 있으실 계획입니까?"
"말했잖냐. 결정 안 했다고. 아직 전쟁도 안 끝났는데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해서야 쓰나."
"에이, 앞으로 몇 달 뒤면 전쟁 끝나지 않습니까. 원래 미래는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하는 겁니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보리스를 보며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녀석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말이다.
다만, 소설이나 만화에서 주로 이런 대사를 하는 놈들이 꼭 죽기 마련이라서 느낌이 좋지 않을 뿐.
"뭐,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 그리고 너희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어떤 거 말씀입니까?"
"제리들 말고도 쪽발이들도 아직 남아있는 거 기억 안 나냐? 제리들 다 족쳐도 쪽발이들이 항복 안 하면 전쟁은 끝 안 난다고."
"......!!!!"
표정들 좀 봐라. 아주 예술이다. 이놈들, 진심으로 일본은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제레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우리가 굳이 아시아까지 갈 필요 있습니까? 이미 아시아에서 싸우고 있는 아군도 있는데 굳이 저희까지......?"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생각해봐라. 상부가 우릴 그냥 내버려 둘 것 같냐?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최우선으로 투입되는 게 우리 부대인데?"
소대원들의 얼굴은 금방 유령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유럽 전선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갈 생각부터 하고 있었는데, 태평양까지 끌려갈 것을 생각하니 앞날이 어두컴컴해지는 기분이겠지. 마치 내일모레 방학인데 보충수업 있다는 소릴 들은 고딩들을 보는 것 같다.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경청하던 게이츠 원사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여간 쪽발이들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하는군요. 그 망할 잡놈들이 빨리 항복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힘들 것 같네요. 내가 예상하는데 그놈들, 제리들이 항복한 뒤에도 계속 싸우려고 들걸요?"
나치가 패망하고, 핵폭탄이 투하된 후에도 계속 싸우고자 했던 그 일본이다.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해 연말까지 전쟁을 지속했을 일본인데,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1943년이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려면 1년하고 8개월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다만, 독소전이 조기에 종결된 만큼, 이후로의 행방도 달라질지 모르겠다.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다면 그만큼 종전도 빨라질 텐데 말이지.
하지만 나조차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원 역사에 궁지에 몰린 독일이 최후의 한방을 시도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