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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1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81화

 181화 적과 동지 (1)

 처음 이 몸에 빙의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히틀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뉴스도 이보다 더 충격을 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 확신이 다시 깨지고 말았다.

 "맙소사, 이게 돼......?"

 신문도, 라디오도 모두 독일과 소련이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얘기뿐이다. 어째 히틀러가 죽었을 때보다 더 난리인 것 같다.

 이 세계의 독일인들은 어떤 인간들이길래 현실 세계의 나치도 실패한 일을 해낸 거지?

 "말세군, 말세야. 역시 그 빨갱이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천하의 브랜슨 대령조차 이번 소식이 무척 충격적인지 연신 혀를 차며 독일과 붙어먹은 소련에 대해 욕을 퍼부어댔다.

 "전에는 간첩들을 보내 우릴 염탐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우리 엿먹으라고 이렇게 통수를 치다니. 빨갱이들은 상도덕도 없나?"

 정치권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당장 처칠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소련의 행위는 배신을 넘어 사실상의 선전포고에 가깝다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친소파였던 루스벨트조차 직접 방송에 나와 소련의 대독 단독강화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을 냈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련은 독일과의 모든 적대행위를 공식적으로 중단하며, 양국 포로들에 대한 송환도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막가자는 얘기다.

 "대체 놈들이 무슨 수를 썼길래 소련과 강화에 성공했을까요?"

 "천하의 자네도 모르는데 일개 대대장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알겠나."

 브랜슨 대령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스탈린 거기라도 빨아준 거 아냐?"

 "......설마요."

 내가 알기로 스탈린은 일단 호모가 아니다. 내가 알기론 말이지.

 그런데, 대체 어떤 방법을 썼기에 소련이 독일과 휴전했단 말인가?

 보통의 상식으로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영국도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다르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아예 차원이 다를 텐데.

 "일단 당사자들만이 알 테고, 우리가 걱정할 건 따로 있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말을 내뱉은 후에야 브랜슨 대령이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뒤늦게 떠올랐다.

 생각해보라. 소련과 휴전했으니, 소련군과 싸우던 독일군 병사들은 모두 어떻게 될까?

 그대로 집에 갈까?

 아니면 다른 전선에 재배치될까?

 답은 당연히 후자다.

 무엇보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의 사상자 80%가 동부전선에서 발생했으며, 대다수의 병력들도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등에 소름이 돋으며 앞으로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조만간 큰일이 터질 거야. 아주 큰일이."

 ***

 "빌어처먹을 빨갱이 새끼들!"

 독일과 소련이 휴전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부터,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비단 처칠뿐만이 아니라, 모든 각료들이 격앙되어 있었다. 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앤서니 이든조차 분노로 눈이 뒤집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 강화 때문만이 아니었다.

 2차 독소 불가침조약이 세상에 발표되기 전, MI6는 극비리에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어떤 밀약이 오갔는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 미스터 갈리폴리인 천하의 처칠조차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폴란드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핀란드, 루마니아도 모자라 이탈리아와 노르웨이까지 다 처먹겠다고? 이것들이 지금 제정신인가?"

 비록 망명자 신세지만, 엄연히 정부가 존재하는 나라를 날름하겠다는 속셈도 웃기지만, 조약대로라면 소련은 제정 러시아를 뛰어넘는 영토를 가지게 되는 것은 물론, 역사상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를 손에 넣게 된다.

 이탈리아를 차지하면 지중해와 아프리카로 진출할 수 있고, 노르웨이를 통해 북해로 진출, 여차하면 영국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도 있다.

 즉, 이 조약은 영국과 유럽의 운명이 걸려 있는 조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칠은 전방위로 소련에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미 케임브리지 사건 이후로 사실상의 접촉이 끊긴 탓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자국 힘만으론 역부족임이 판명되자, 처칠은 최종병기를 소환했다.

 "대통령 각하? 처칠입니다. 각하께서도 조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알다마다요. 기가 막혀서 말조차 나오지 않더군요.

 지금 이 순간 입장이 난처해진 이는 루스벨트였다.

 소련에 유화적이었던 그는 영국과 일부 각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소지원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하지만 소련은 이에 대한 은혜를 갚는 대신, 2차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거하게 뒤통수를 쳤다.

 "각하, 지금 당장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소련을 압박해야 합니다!"

 "우선 랜드리스부터 모두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공한 식량과 무기로 저들이 우릴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응징을 주장하자, 루스벨트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 대한 모든 지원과 기술협약들을 파기하며, 현재 운송 중인 화물들도 즉시 취소시키게. 그리고 당장 크렘린에 연락하게. 소련군이 기존의 소련 국경을 넘어 진격할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즉시 대사관에 전하겠습니다."

 ***

 같은 시각, 모스크바.

 "서기장 동지. 외국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알고 있네."

 처음 조약이 채결되었을 때, 싱글벙글하던 이들이 작금의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 표정이 어긋나 있었다. 이와 별개로 스탈린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은 우리가 기존 국경선 너머로 진격하여 합병을 시도할 경우,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통보해왔으며 미국 역시 영국처럼 격앙된 분위기입니다. 본래 우리에게 제공하기로 한 모든 물자들을 취소하며 기존에 제공했던 물자들의 반환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니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영국 놈들이야 우릴 원수처럼 대하는 것은 전통이고, 미국인들의 지원이 끊기는 것은 아깝지만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손실이네."

 스탈린은 파이프에 잘게 썬 담뱃잎을 넣고 불을 붙였다.

 "독일군의 철수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나?"

 "예. 이미 키예프에서 독일군이 철수했으며, 크림반도에서도 독일군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코프 동무에게 전하게. 독일군이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바로 공격하라고."

 "알겠습니다."

 휴전 조약이 체결된 직후, 독일은 약속대로 모든 점령지에서 병력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 철군한 병력들은 서부전선으로 보내져 독일 방어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독일은 소련이 독일 국경과 맞닿는 즉시 조약을 파기하고 공격해올 것을 우려해 폴란드와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내년 봄에 소련에게 넘겨주겠다고 통보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이전 영토들을 모두 수복하는 즉시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넘겨받을 예정이었다.

 "핀란드 전선은? 그다지 잘 안 풀린다고 들었는데."

 이미 전부터 소련과 비밀회담을 가지던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이 완전히 끊기고, 소련이 다시 핀란드 전체를 합병할 야욕을 드러내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물음에 답한 이는 보로실로프였다.

 "메레츠코프 동무가 분투 중입니다. 조만간에 핀란드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고 보고해왔습니다."

 "넉넉하게 한 달 주지. 기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각오하라고 전하게."

 ***

 "철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이미 들었네. 신 동부방벽 건설 문제는 잘 진행되고 있나?"

 "병력과 노동자들을 투입해서 건설 중입니다만, 물자가 부족합니다."

 "그래도 노력하게. 저놈들이 다른 마음이라도 품으면 유사시 놈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니."

 베크는 소련이 영토를 회복하는 즉시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기습할 것에 대비해 1914년 국경을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축조할 것을 지시했다.

 베크의 지시는 합리적이었지만, 가뜩이나 물자와 인력 모두 부족한 탓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또한 소련과의 강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환호하던 국민들은, 그 대가로 정복한 러시아 영토들은 물론 폴란드까지 소련에게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했다.

 "내 아들이 러시아에서 죽었는데, 그 땅을 그냥 포기한다고? 그럼 내 아들은 왜 죽은 거야?"

 "이 매국노 새끼들! 벼락 맞아 죽을 놈들!"

 "총통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어차피 살지도 않을 땅이니, 전쟁만 끝나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소련과의 전장에서 가족이나 친구, 연인을 잃은 사람들은 정부의 결정에 분노를 표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독일 국민들을,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막아섰다. 시위대와 경찰들의 밀고 밀리는 대결은 공습경보가 울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당장은 혼란스러울걸세.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국민들도 우리의 선택에 대해 이해할 걸세."

 베크의 말은 남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비록 땅은 잃었지만, 그만큼 병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네. 그럼 된 거 아닌가?"

 "맞는 말씀입니다."

 베크는 서유럽 전선이 표시된 지도를 응시했다. 동부전선에서 철수한 병력들의 서부전선 재배치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모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는 영국과 미국에게 다시 독일의 힘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독일이 아직 패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면, 처칠과 루스벨트도 틀림없이 생각을 바꾸리라.

 ***

 "독일군이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퇴각 중입니다."

 "루마니아의 독일군은 아직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우크라이나에서의 철수가 완료되는 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잘하면 우크라이나까지 손에 넣고자 한 처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대로라면 눈 뜬 채로 루마니아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루마니아를 절대로 소련에게 넘겨줄 수 없네. 루마니아가 넘어가면 이미 소련 놈들은 발칸을 반을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처칠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산유국인 루마니아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소련의 국력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그뿐인가? 루마니아를 통해 유고와 불가리아와도 접하게 된 소련이 발칸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일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소. 아직 소련군이 우크라이나에 있는 지금 루마니아를 손에 넣어야 하오.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든 말이오."

 ***

 브랜슨 대령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고,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우크라이나를 접수하기 시작하자 덩달아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조약에 따라 독일은 소련에게 루마니아를 넘기기로 했다. 루마니아가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상부에선 즉시 우리에게 진격해 루마니아를 탈취할 것을 지시했다.

 "좆같은 제리 새끼들. 좆같은 빨갱이 새끼들."

 대전투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공격 명령이 하달되자 부대 분위기는 바닥을 뚫고 맨틀까지 떨어졌다.

 "젠장.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썩은 얼굴로 담배를 피워대는 게이츠 원사 옆에서, 나는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만에 마시는 술에서는 쓴맛만이 느껴졌다.

 빌어처먹을 전쟁.

 "당장 지난 전투에서 입은 피해도 아직 다 복구하지 못했는데 공격이라니. 암만 상황이 급하다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지. 망할 제리 새끼들이 그딴 짓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이틀 뒤 우리는 다시 전선으로 간다. 한시가 급해진 만큼 이번에는 상부도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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