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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2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9화

 179화 협상 (1)

 몰로토프가 나타났을 때, 스탈린은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으니 무례를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몰로토프를 보며, 스탈린은 분노나 짜증 대신 의아함을 느꼈다.

 한 번도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는 몰로토프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 부산을 떠는 것일까?

 이윽고 몰로토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게 과연 사실인가, 몰로토프 동무?"

 스탈린은 자기도 모르게 수저를 식탁에 떨어뜨렸다. 은으로 된 식기가 식탁에 충돌하면서 와인과 보드카가 든 잔이 흔들거렸다.

 "사실입니다, 서기장 동지. 저도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독일 파시스트 놈들이 협상을 요청해오다니.

 스탈린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시선을 접시로 떨어뜨렸다. 아직 접시에는 그가 다 못 먹은 캐비어와 돼지고기 샤슬릭이 남아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끝내고 이야기하지. 나가보게."

 "예, 서기장 동지. 실례했습니다."

 ***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스탈린은 충성스러운 사냥개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충복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리야와 몰로토프, 흐루쇼프, 마지막으로 절친인 보로실로프까지.

 스탈린이 자리에 앉자 몰로토프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스톡홀름에 있는 우리 대사관을 통해 독일이 비밀 협상을 제의해왔습니다."

 "베리야 동무?"

 스탈린은 베리야를 쳐다봤다.

 "몰로토프 동무의 말은 사실입니다, 서기장 동지."

 "그렇군. 알겠네. 계속하게."

 평소 몰로토프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일부러 그를 면박 주기 위해 사실임을 뻔히 알면서도 베리야를 통해 확인하곤 했다. 몰로토프는 적잖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넘어갔다.

 "독일 놈들이 아무 조건 없이 우리에게 협상을 요청해왔을 리는 없을 테고...... 놈들이 제시한 조건은 뭐지?"

 "모든 소련 영토에서의 즉각적인 철수와 이에 대한 배상으로 자국의 기술력 전수를 제시했습니다."

 몰로토프의 말에 스탈린은 코웃음을 쳤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건 알 텐데?"

 "예. 물론 이외에도 양보할 게 더 있다고 언급은 했습니다만, 자세한 논의는 만나서 얘기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음......."

 스탈린은 고민에 빠졌다. 이미 연합군이 프랑스와 발칸을 탈환한 이상, 독일의 패망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니 놈들의 제안을 거부한다고 한들, 소비에트 연방은 결국엔 전쟁의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말한 '더 양보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갔다.

 "잠시 생각을 해봐야겠군. 동무들은 내가 부르기 전까지 나가 있게나."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넷은 군말 없이 집무실을 떠났다. 혼자가 된 스탈린은 서랍을 열어 보드카를 꺼냈다.

 그는 보드카를 잔에 따랐지만,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 보드카 잔을 들고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파시스트 놈들이 어째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이미 베리야를 통해 독일과 서방 연합국의 협상이 파토났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에, 스탈린은 독일의 협상 제의의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영미와 협상이 불가능해졌으니,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제안했겠지. 또는 민주국가인 서방 연합국들과 달리 독재자인 자신의 허가만 떨어지면 뭐든지 통하는 소련이라서 협상이 오히려 통할 거라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스탈린은 지금 독일의 신정부가 히틀러의 나치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히틀러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히틀러의 측근들과 나치당 고위직들을 감금하거나 처형한 것도 그렇고, 나치당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대신 새로 고안한 국기를 사용하려는 것도 수많은 증거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보기엔 히틀러의 나치나 지금의 신정부나 거기서 거기였다.

 지금 권력을 잡은 놈들도 독일이 잘나갈 때는 히틀러 밑에서 열심히 충견 노릇을 한 작자들이 아니던가.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다면, 진작에 했어야지.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된 상황에서야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건, 그저 자기들의 얄팍한 목숨이나 지키기 위해서겠지!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스탈린은 독일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당장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에 막혀 진격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일선 지휘관들을 매일같이 닦달하긴 하지만, 그도 독일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구축한 방어선이 탄탄해 돌파가 힘들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가장 우려하는 일은, 연합군이 결국엔 독일과 손잡고 소련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비록 이전까지의 협상을 모두 거절했다곤 하나, 언제 마음이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물며 독일은 전쟁으로 얻은 모든 영토를 포기하겠다고까지 했다. 서방측이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제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영국은 소련을 독일과 일본만큼이나 위협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미국을 꼬드겨 대소 랜드리스를 반토막 낸 것도 영국의 짓이었다.

 "빌어처먹을 제국주의자 놈들."

 스탈린은 잔에 따른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소리 나게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만약 연합국이 생각을 바꿔 독일과 협상한다면, 가장 곤란해지는 쪽은 누가 봐도 소련이었다.

 당장 처칠은 전쟁이 끝나면 소련과 폴란드의 국경선은 전쟁 전으로 복구되어야 하며, 소련이 합병한 발트 3국 역시 독립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늙다리 총리의 말에 열광이나 하고 있고.

 그뿐인가? 당장 미국도 소련의 간첩들이 발각당한 탓에 영국인들만큼이나 소련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좀 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워싱턴과 뉴욕에선 대소지원을 반대하는 반공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나마 루스벨트가 상식인이라 -어디까지나 스탈린 본인의 입장에선- 그들의 말을 무시했기에 망정이지,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독일에게 모스크바가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서방 연합군과 달리, 소련은 아직까지도 제자리걸음 중이다. 그런 와중에 독일과 서방측이 타협한다면? 드네프르강 너머의 벨라루스 땅과 우크라이나 서부, 그리고 발트 3국은 몽땅 연합국의 차지가 될 터였다.

 그 수많은 땅을 거저 주워 먹은 연합국이 과연 거기서 만족할까? 만약 저들이 지난날 히틀러가 꿨던 야심을 꿈꾸기라도 한다면?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연합국은 자신들의 개가 된 독일군을 앞세워 소련을 공격할 것이고, 모스크바는 다시 위협받게 될 것이다.

 비록 히틀러의 독일은 실패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독일이라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물론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소련을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합국이 독일을 통해 손에 넣은 소련 영토의 반환을 거부한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괴뢰국을 세운다면?

 소련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불리한 편은 소련이지 연합국이 아니니까. 오히려 처칠은 소련이 전쟁을 걸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

 "결국 이게 잘한 일인지 잘 모르겠군."

 슈납스가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베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괴르델러가 말했다. 정작 본인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했다.

 "어차피 영국과 미국은 독일을 완전히 거세할 생각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제안을 번번이 무시했죠."

 "하지만 소련도 우리의 멸망을 바란다는 점에선 똑같지 않나? 오히려 우리를 더 증오하면 증오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독일이 멸망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독일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맞구려."

 베크는 슈납스를 들이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금방 몸이 달아올랐다.

 "돌이켜보면, 참 후회스럽네."

 "무엇이 말입니까?"

 "당연히 거사를 보다 빨리 일으키지 않은 것이지."

 베크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거사가 2년, 아니 1년만 더 빨랐더라면 어땠을까? 그땐 아직 독일이 지금보다 유리한 상황이었으니, 틀림없이 영국과 미국도 자신들의 강화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1942년에 거사를 일으켰다면, 지금처럼 구걸하는 입장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을 것이다. 단치히와 서프로이센을 포기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역으로 알자스-로렌과 체코, 폴란드를 두고 협상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베크는 우유부단했고, 이는 나머지 음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만을 노린다며 헛되이 시간을 날렸고, 독일 패망이 초읽기에 다가온 시점에서야 히틀러를 죽일 결심을 했다.

 다행히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도 성공적으로 제압했지만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한 서방 연합국은 신정부의 제안을 비웃으며 독일을 완전히 꺾어버리겠다는 야망을 서슴지 않고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신정부의 무장해제에 반발한 SS가 연합군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전선에 구멍까지 뚫리고 말았다.

 겨우 전선을 수습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알토란 같은 기갑부대와 보병사단들이 후퇴할 시기를 놓쳐 포로가 되고 말았다. 망할 친위대 새끼들. 우리 말을 듣느니 차라리 포로가 되는 걸 택할 줄이야.

 "지금 우리에게 남은 동맹국은...... 슬로바키아, 핀란드, 일본. 이렇게 셋뿐인가."

 이탈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는 독일이 강제로 점령한 상태고, 슬로바키아의 경우 아직까지 독일과 동맹 관계였지만, 애초에 슬로바키아의 존재 자체가 히틀러가 만들어낸 괴뢰국이라 동맹국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위치였다.

 핀란드는 이미 뒤에서 연합국과 협상 중이며 독일과도 거리를 두려는 추세다. 일본은...... 일본은 독일 신정부와 딱히 척을 지고 있지 않았지만 되려 신정부가 일본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전쟁에 끼어들게 만든 게 일본인 데다, 일본을 향한 미국의 분노를 알고 있는 만큼 베크는 만약 미국이 협상 조건으로 일본과의 관계 단절과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수락할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 독일에겐 동맹국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카나리스 제독, 무솔리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는가?"

 "여전히 우리 눈치를 보며 브랜디와 여자에 빠져 사는 중입니다. 자기 목줄을 우리가 쥐고 있는 걸 아는 눈치입니다."

 "그렇겠지."

 베크는 영국과 미국에 강화 제안으로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의 철수 및 무솔리니 일당의 송환을 내밀었다. 연합국이 강화 자체를 거절했기에 수포로 돌아갔지만.

 무솔리니도 자신의 목숨이 온전히 독일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신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던 야망가 치곤 참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베크가 빈 잔에 슈납스를 따르려고 할 때, 오스터가 나타났다.

 "각하, 소련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소련으로부터 답장이?"

 베크는 깜짝 놀라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소련과의 협상을 제안했던 괴르델러가 다급히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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