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8화
178화 진실의 그림자 뒤에
"소대장님!"
"대위님!"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체감상 한 4, 5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소대원들이 들려주는 얘기는 달랐다.
"다행입니다, 소대장님! 진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는데......?"
얼굴에 침을 튀기며 안도의 말을 쏟아내는 보리스에게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소대장님 2시간 만에 겨우 깨어나신 겁니다."
"2시간?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다고?"
끽해야 몇 분 정도만 기절한 줄 알았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주변에는 팔이나 머리에 붕대를 대충 감은 부상병들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
"전투는? 전투는 어떻게 됐어요, 원사?"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이겼으니까요."
게이츠 원사가 말하길, 나는 수류탄이 터지는 순간 그대로 5m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고 한다.
다행히도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위생병의 치료를 받았다. 위생병의 소견으론 가벼운 뇌진탕에 다리에 파편 몇 개가 박힌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큰 이상은 없단다.
위생병이 놔준 모르핀 덕분에 통증은 거짓말처럼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기까지 했다. 이래서 약쟁이들이 모르핀에 환장하는 거구나. 평소엔 알 수 없었던 금단의 문을 연 듯한 기분이다.
전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중대의 피해가 커서 브랜슨 대령에 의해 중대는 후방으로 돌려졌다. 지금 이 트럭은 후방 진료소로 가는 중이란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습니다. 비록 전차가 박살 나긴 했지만, 아무튼 목숨은 건졌으니 말입니다."
"음, 운이 좋다면 아예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요?"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게이츠 원사는 순간 정색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젊으신 분이 벌써부터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옙.
***
부쿠레슈티를 과감하게 우회해서 그 뒤에 있는 플로이에슈티를 장악하고, 나아가 부쿠레슈티 근방의 독일군 병력들을 통째로 쌈 싸 먹고자 했던 아군의 작전은 하마터면 대재앙으로 끝날 뻔했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를 포위, 섬멸하려 했던 독일군의 계획은 아군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다. 측면을 사수하던 그리스, 불가리아군을 무너뜨리고 돌입에 성공한 독일군은 곧바로 후방에서 가해진 아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도로 퇴각했다.
이로써 아군은 역포위, 섬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지만, 작전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애시당초 너무 무모한 작전이기도 했고.
허나 마켓가든 작전과 달리 아군이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플로이에슈티 점령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아군은 독일군의 측면을 넓게 포위하는 형세가 되어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피해도 원역사의 마켓가든 작전 때보다 적은 편이었다. 작전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상당수가 생환에 성공했고, 아군 기갑전력의 피해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은 아니지만.
피해가 경미하다곤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잃은 것만 많고 얻은 건 하나도 없던 마켓가든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승리라는 표현은 무리수 아닌가?
***
"전쟁훈장? 그게 뭡니까?"
위생병의 야매 치료 대신 군의관의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쉬고 있던 내게 브랜슨 대령이 전쟁훈장에 관한 말을 꺼냈다.
이제까지의 활약으로 나와 무어 소령, 그리고 브랜슨 대령 본인이 전쟁훈장 서훈 대상자로 임명되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훈장을 받는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닌데, 그 전쟁훈장이라는 게 뭔지 처음 들어본다. 원래 역사에도 있던 훈장인가?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진짜 처음 듣는 말인데.
"모를 만도 하지. 두 달 전에 제정된 거라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거든. 아무튼 이름 그대로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를 한 군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일세. 자랑스럽게 여기게나.
아, 그레이 대위 자네는 이미 훈장을 여러 개 받았으니 별 감흥이 없겠지만."
"에이, 그럴 리 있겠습니까?"
뭐어, 역사가 본래 내가 알던 역사와 거의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으니, 현실 역사에선 없던 훈장 하나 새로 생긴다고 이상할 게 없다.
참고로 새로 제정된 훈장은 전쟁훈장 말고도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용맹훈장이라는 놈이다. 전쟁훈장보다 한 단계 아래의 물건인데, 오랫동안 전쟁에서 싸워온 베테랑 군인들 중에 꾸준한 성과를 올린 병사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이제껏 내 전차의 포수로 활약한 게이츠 원사가 이 훈장을 받을 예정이었다. 아까 전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던 이유가 여기 있었구만.
"대신, 주의할 사항이 있네."
브랜슨 대령은 행여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살며시 낮추었다. 얼마나 비밀스러운 일이길래 이리 조심하는 거지?
"자네도 신문을 봐서 알 걸세. 상부에선 이번 작전을 아군의 승리라고 부른다는 것을.
하지만 현실은 승리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야. 피해는 큰데, 얻어낸 성과는 흘린 피에 비하면 작지."
거기까지만 들었을 때 브랜슨 대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정부가 언론에 힘을 써서 애써 승리로 포장하긴 했지만, 이미 국민들 사이에선 승리치곤 피해가 너무 큰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네. 때문에 상부에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이번 수여식을 결정했다네. 기자들도 대거 부르고. 제법 성대하게 할 계획이라는군."
"즉...... 기자들이 물어보면 매뉴얼 대로 대답하면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하긴 자네는 기자들과 여러 번 인터뷰 해봤을 테니 나보다 더 잘 해내리라고 믿네. 혹시 모르니 병사들한테도 입단속 잘 시키고."
"염려 마십쇼."
갑자기 왜 훈장 수여식인가 했더니, 이래서였구만. 하긴 전쟁도 결국엔 정치의 연장선이니, 당연한 일이다. 특히 국민들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 입장에선 우리 같은 군인들보다 여론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을 테고.
참.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때 몽고메리는 누가 몽가놈 아니랄까 봐 원 역사의 마켓가든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알렉산더가 세운 루마니아에서의 작전안을 전해 듣곤 자기도 네덜란드에서 똑같이 하려고 했다는데, 작전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단다.
서유럽 방면의 친구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알고 있으려나? 자기들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사실을.
***
천신만고 끝에 루마니아를 지켜낸 독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목표였던 플로이에슈티 함락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합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플로이에슈티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다.
"......간신히 유전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피해가 심각합니다. 공습으로 인해 아군은 전투기 서른 기를 손실했고, 시설도 타격을 입어 60%가량이 마비되었습니다."
"피해 복구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기술자들을 총동원해 피해를 복구 중입니다만,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베크는 한숨을 쉬며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손으로 한 번 머리칼을 쓸어넘길 때마다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날마다 올라오는 보고가 패전 아니면 공습과 관련된 소식들뿐이군. 이런 꼴을 보려고 거사를 일으킨 게 아닌데 말이지."
그는 말을 멈추곤 카나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디 그 입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찬 소식이 나오길 고대하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제네바에서의 회담은 어떻게 되었나? 성과가 있었나?"
카나리스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요구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장 전쟁을 끝낼 생각이 있으면 항복을 하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하더군요."
"젠장맞을."
이번 회담에서 베크의 신정부는 협상 조건으로 체코 합병 이전의 독일 국경 유지를 내걸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영토인 단치히와 서프로이센 지역까지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무조건 항복.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주데텐란트도 원주인인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돌아갈 것이며, 단치히와 서프로이센도 폴란드에 귀속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한다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겠노라는 말이 끝자락에 붙긴 했지만, 베크는 코웃음 쳤다. 관용이라고? 한 나라를 지도에서 완전히 말살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관용?
어처구니없는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정말로 연합국은 독일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모양이군."
"저놈들은 대세를 읽을 줄 모릅니다. 독일이 사라지면 소련과 국경을 맞닿게 될 건데......."
"내 말이! 당장 원한에 눈이 멀어 미래를 포기하다니! 저들은 정녕 이 유럽이 빨갱이들의 손에 넘어가길 바라는 건가?"
상관들의 푸념과 정신승리가 뒤섞인 한탄을 경청하던 오스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로 항복 외엔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베크와 카나리스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카나리스가 따지듯이 물었다.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가 얌전히 백기를 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몰라서 그따위 말을 하는 건가?"
"각하, 외람된 말이지만 이미 독일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자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국민들의 사기도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전쟁을 계속할수록, 저들의 요구는 더욱 가혹해질 것입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항복해서, 저들의 자비를 바라는 편이 더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듣기 싫네. 그건 맹수 앞에서 무기를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저항을 포기하고 자비를 바라는 순간, 놈들은 이 나라를 인정사정없이 난도질할 것일세."
비츨레벤과 트레슈코프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이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괴르델러가 입을 열었다.
"발상은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상이 바꾼다라? 어떻게 말이오?"
"지금까지 우린 미국과 영국만을 상대로 협상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럼 달리 협상을 할 대상이 있단 말이오?"
"있지 않습니까?"
괴르델러의 말에 베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이내 괴르델러가 말하는 협상의 대상이 무엇인지 깨닫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괴르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련이 있지 않습니까. 소련과 협상을 하는 겁니다."
소련과의 협상.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카나리스가 제정신이냐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총리, 러시아인들과의 협상이 가능하다 보십니까? 스탈린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기나 하겠습니까?"
"물론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 대안이 있습니까? 이미 영국과 미국은 우리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러시아인들과 얘기가 통할지 모릅니다. 영미와 달리, 소련은 스탈린이라는 인간 한 명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스탈린의 구미에 당기면 영미보다 협상이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르델러의 제안에, 참석자들은 침묵에 빠졌다.
예전 같았다면 농담도 정도껏 해라며 흘려 넘겼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절실해진 지금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