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8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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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8화 (완결)
208화 종전 이후
"날씨 한 번 좋~다."
먹구름이 자주 끼는 런던의 하늘은 오늘따라 유달리 맑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이놈의 몸이다.
나이를 먹으니,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심지어 지팡이 없이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내 나이를 생각하면 복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래도 과거의 젊었던 몸을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울적해진다.
나이 앞에서는 장사 없다더니.
"조금 쉬었다 갈까요?"
"그러지."
"그러하면 마실 것을 좀 사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난 늘 먹던 걸로."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의점으로 뛰어가는 저 젊은 친구는 두 달 전에 새로 들인 하인이었다. 아직 어리숙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 젊은 친구들'과 달리 제법 싹싹하고 끈기가 있는 녀석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라니. 허허, 나도 모르게 이 생각부터 하다니. 역시 늙긴 늙었구만.
원래라면 하인이 아니라 가족끼리만 런던에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 부부는 갑작스런 미팅으로 어젯밤에 글레스고로 갔고, 손주놈은 대학 과제가 더 중요하다며 집에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나 혼자서 하인 1명만 거느리고 런던에 왔다.
어째서 런던에 왔냐고?
2차대전 종전 6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초청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뭐하겠나. 남작이라고 해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들보다 조금 더 부유하게 산다 뿐이지, 평범한 노인들처럼 집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게 전부다. 아, 물론 나는 다른 노인들과 달리 그 어렵다던 인터넷도 마음대로 즐기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집에만 있자니 몸이 쑤시는데, 마침 정부에서 초청장까지 날아왔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많이도 변했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60년 사이에 런던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고풍스러웠던 도시의 전경은 마천루를 연상케 하는 고층 건물과 현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형형 각색의 건물들과 조형물들 덕분에 60년 전과 비교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정확히는, '본래 내가 알았던 런던'에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게 더 이치에 맞는 것 같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땐 모든 게 얼마나 낯설었는지. 이제야 내가 아는 기억 속의 런던에 온 것 같아 느낌이 묘하다.
내가 아는 런던에 도달하려면 아직 18년이 더 남았지만,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본래 내 조국이었던 한반도는 역사보다 1년 일찍 해방을 맞이했다.
한반도가 해방되었을 때, 소련군은 아직 만주에 있었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합의하에 한반도는 미국의 권역에 포함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영국인이고, 사는 곳도 영국이지만 마음만큼은 한국인이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무척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한동안 잠을 설쳤을 정도니까.
허나 마냥 기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단도, 6.25 전쟁도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끝내 한반도는 1949년 겨울부터 1950년 여름까지 6개월 동안 내전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행히 국군과 주한미군의 토벌로 내전을 일으켰던 좌익 세력들은 대부분 정리되었고, 한반도는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 역사대로 전쟁이 끝난 지 1년 만에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기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한반도의 분단이 일어나지 않고, 역사에선 일본군에게 소멸당했을 정예 병력들이 대거 살아남은 덕택에,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당을 상대로 연승을 거뒀다.
국민혁명군이 만주로 진격해 공산당이 소멸 위기에 놓이자, 이전까지 중립을 지키던 스탈린은 민주주의화된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뒤늦게 개입을 선언하며 공산당을 지원했다.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공산당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만주를 도로 차지했다.
승기를 잡은 공산군은 급기야 만주를 넘어 중국 본토로 진격, 국민당을 남쪽으로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은 결사항전으로 맞섰고, 동시에 미국도 소련의 개입을 비난하며 공산군이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경우, 참전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압박해왔다.
이때 얼마나 가슴이 졸렸는지 모른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내부에서도 참전하니 마니 말이 나오고 있었는 데다, 아예 미국이 직접 자국의 참전 시 영국도 지원군을 파병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까지 들어왔었다.
이미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던 나는 다시 전쟁터에서 구르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때문에 정말로 군에서 제대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제발 참전만큼은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게 통한 모양인지 얼마 못 가 스탈린의 제안으로 휴전 회담이 열렸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 공산군의 공세를 막아낸 국민당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이듬해 반격을 성사시키며 마오쩌둥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상대방과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이 없었던 미국과 소련은 현 전선에서 국경을 결정짓기로 합의했고 그렇게 중국은 대륙과 대만이 아닌,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국민당의 패망과 6.25 전쟁이 없었던 탓인지, 한국의 경제발전은 역사보다 다소 느린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21세기에 들어선 나름 산다고 자부하는 데다 국토도 분단되지 않은 덕분에 군사력으로도 목소리가 높은 국가가 되었다.
비록 내가 아는 원래 세계에서의 경제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 대가로 분단을 피하고 수백 만에 달하는 이산가족들과 전쟁 희생자들이 생겨나지 않았으니 만족스러울 따름이었다.
6.25 전쟁이 없었기에, 일본도 역사에서처럼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은 미국의 계획대로 철저한 농업국가로 개조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그래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일만큼은 피했으니, 아주 나쁜 일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2차대전이 끝나고, 당연하게도 세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재편되었다.
루스벨트는 살아서 2차대전 승리를 보았지만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역사대로 1945년 임기 도중에 사망했고, 트루먼이 그 뒤를 이었다.
소련에 다소 유화적이었던 루스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소련과 대립하며 냉전을 이끌었다. 소련도 미국과 번번이 대립하며 냉전을 주도했지만, 역사와 달리 동유럽의 위성국화에 실패했던 터라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진영을 상대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실제 역사보다 6년 빠른 1985년에 해체되었고, 그에 따라 냉전도 종식되었다.
대신 원수로 지냈을 중국이 여기선 소련의 충실한 종이 되었고,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일본처럼 아주 손해만 본 것도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서 냉전을 이끌었고, 현재까지도 세계 유일의 최강국으로 남아있다. 러시아가 나름 추격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어림도 없는 데다 반토막 난 중국은 더더욱 가능성이 없었다.
일본과 함께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말로도 딱히 좋진 못했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원래 역사대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어 그럭저럭 지낸 반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는 것을 피했지만, 미국과 영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그나마 원래 역사에선 동서독이 서로 통일이라도 했지만, 여기서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상태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실제 역사에선 자살했을 히틀러가 암살을 당하고 신정부가 여러 실책을 저지르다가 덜컥 항복한 탓에 아직까지도 독일 일각에선 히틀러와 나치스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아는 독일에선 불가촉천민 취급을 당하던 AfD(Alternative für Deutschland, 독일을 위한 대안)가 제1야당을 차지하고, 그 지지자들이 공공연하게 하켄크로이츠와 SS 깃발을 들고 행진하며 히틀러를 암살했던 검은 오케스트라 일당은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으로 지탄받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원래 역사의 독일인들이 지금의 독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무척 궁금하군.
프랑스는 드골이 나름대로 유럽에서 제3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당장 비시 프랑스가 저지른 실책들로 인해 발언권도 축소된데다가, 역사대로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연패를 당해 그나마 남아있던 이미지까지 완전히 말아먹고 말았다. 프랑스는 다시는 실추된 자국의 위상을 끌어올리지 못하리라.
마지막으로 영국.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이자, 사실상의 조국.
당연하게도 2차대전이 끝난 뒤부터 영국의 은퇴는 기정사실이었다.
처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들을 하나 둘씩 해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인도가 가장 먼저 독립했고, 중동과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래도 영국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면, 비록 이전의 영광은 잃었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이 모두 몰락한 덕분에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농업국가가 되었고, 중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으르렁대기 바쁜 탓에 영국은 미국과 소련의 뒤를 이은 3위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군. 아, 마침 오네.
"기다리셨죠? 여기 있습니다, 탄산 레모네이드."
"수고했네."
쫍쫍.
음, 내가 아는 그 맛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 자꾸만 새콤달달한 게 땡긴단 말이지.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가자고. 행사 시간에 늦겠어."
"아직 2시간이나 더 남았습니다만?"
"유비무환 모르냐? 늑장 부리다가 늦어서 허둥대지 말자고."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
행사장에는 나처럼 정부의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자리에 앉아 승전기념일 행사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당연히도 내가 아는 얼굴들은 없었다.
나도 참.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이 주책을 부리고 있군.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브랜슨 대령은 중장까지 진급하여, 독일 주둔 영국군 사령관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냉전이 끝난 다음해 여름에 별장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무어 소령은 의외로 군대에서 가장 먼저 제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직후, 캐나다로 건너가 목재사업을 시작한 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가 말년에 겨우 자리를 잡아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준 뒤 유유자적한 은퇴생활을 즐기다 1988년에 눈을 감았다.
게이츠 원사는 1952년에서 군대에서 나왔다. 그의 전역식 날, 내가 깜짝방문을 하자 표정이 참 볼만했다.
은퇴 후 자사전을 쓰던 그는 냉전이 끝나기 2년 전에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서전은 사후에 출판되어 제법 나쁘지 않은 판매고를 올렸다.
닉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지만, 두 번의 낙방 끝에 포기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던 그는 늘그막에 동년배인 여성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꽤 늦은 나이에 결혼한 탓에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아내와 알콩달콩하게 잘 살다가 1999년에 사망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녀석이 죽은 날은 9월 9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보리스와 제레미가 무척 놀라워했지.
제레미는 아버지의 자전거 수리점을 이었다가 화재로 가게를 잃은 뒤, 집을 정리하고 친척이 살고 있는 호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친척의 농장을 물려받아 열심히 일해, 나름대로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막상 돈을 벌자 고국이 그리워졌는지 농장을 처분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3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그의 아버지의 묘 바로 옆에 묻혀 있다.
최고의 전차 조종수 중 한 명이었던 보리스는 트럭 운전수 일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그러다 그만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해 돈까지 부족한 상태였다.
과거의 전우를 위해 나는 녀석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었다. 녀석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퇴원한 후에도 운전수 일을 해오다가 2년 전, 자신의 생일날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군대에 계속 남았다. 중령까지 달고 나서야 이 생활에 지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상부가 내 제대를 허락시켜주지 않았던 탓에-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전 대대장 브랜슨 대령의 입김이 컸다고 한다-나는 졸지에 대령까지 진급한 후에야 겨우 군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군인으로 사는 동안, 내겐 여러 큰일이 있었다. 레이첼과 찰리 부녀는 사업이 번창해 급기야 영국 각지에 지점을 낼 정도로 성장했다.
부녀는 자신들의 성공이 내가 알려준 레시피 덕분이라고 확신했고, 여러 번 나를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들과 만남을 이어오던 어느 날, 찰리 씨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자네, 내 딸이랑 결혼하는 게 어떤가?"
나는 그만 마시고 있던 차를 내뿜고 말았다.
처음엔 그게 뭔 소리냐고,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찰리 씨는 매우 진지했다. 자신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내 덕분이고, 이것도 인연인데다 서로 알게 된지도 오래되었으니 아예 결혼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레이첼도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의외로 반대가 심할 줄 알았던 부모님도 우리의 결혼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렇게 우린 엉겁결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군인과 기자의 신분으로 만났던 우리가 부부가 되다니, 이래서 세상일은 참 모르는 법이다.
여러 고난이 있긴 했지만,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평탄하게 흘러갔다.
아버지는 1958년에 어머니는 1959년에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은 1964년에 가족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내, 레이첼은 1년 전에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사인은 폐암. 평소 골초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산 셈이었다.
샬럿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와 결혼해 현재는 포츠머스에서 살고 있다. 막내 빌리는 아직까지 독신으로, 지금도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즐기는 삶을 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런던에 있다.
행사 시작에 앞서 사진기자들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내 사진을 찍기 위해 허를 굽혔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놀라워하더니, 이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가 했더니, 아서 그레이 대령님 아니십니까!"
"나를 아시오?"
"모를 리 있겠습니까? 영국군에서 전설적인 분이신데. 사진으로만 뵈다가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
2차대전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서 이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가끔씩 나를 인터뷰하고 싶어하는 역사학자나 밀덕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있어도, 기자가 나를 알아보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는데.
"이 늙은이가 누구인지 기억해줘서 고맙구만."
아무튼 나는 그와 악수했고, 그의 부탁대로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그는 내게 감사인사를 한 뒤,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행사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행사가 시작되었다. 군악대가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유니언 잭이 바람에 휘날렸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