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3화
203화 떨어지는 태양 (4)
주소 일본대사 사토 나오타케는 오늘도 의자에 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책상의 재떨이에는 비틀어진 꽁초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어찌한담......."
본국의 전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이오지마는 사실상 미군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도 황군은 적의 공세에 퇴각하기 바빴다.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던 해군조차 잇따른 패배로 전력이 사실상 괴멸되어 지금은 항구에 처박혀 겨우 숨만 내쉬는 신세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자부했던 황국은 명백하게 침몰 중이었다.
오늘도 본국에선 사토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문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전황이 매우 암울함. 현재 황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음. 이를 피하기 위해선 소련의 협조가 필수적인 바, 소련 정부의 대답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 요망.'
말이야 쉽지, 대화를 하던 애원을 하던 상대방이 무시로 일관하는데 뭘 어쩌라는 건가. 사토는 몇 주 전부터 스탈린이나 몰로토프와의 회담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소련 측은 아무런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되려 사토의 이러한 행동을 대놓고 귀찮아하며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다.
사토는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본국에선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을 걸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지독한 절망이 그의 육체를 잠식했다.
절망감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선 니코틴의 도움이 필수였다. 그런데 담뱃갑에 담배가 한 개비도 없었다. 사토는 비서를 불러 담배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려던 찰나, 그의 비서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대사 각하. 급한 소식이라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무슨 소식이길래?"
"몰로토프 외상으로부터 각하와 직접 만나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사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까지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모른 척하던 소련 정부에서, 웬일로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오다니. 사토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 언제 만나자고 하던가?"
"금일 오후 5시입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그렇습니다, 각하. 뭐라고 전할까요?"
사토는 시계를 흘긋거렸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49분. 지금부터 준비하면 될 터였다.
"좋다고 전하게. 아, 최대한 공손한 표현으로."
"알겠습니다."
***
사토를 태운 차량이 크렘린에 들어선 시각은 오후 4시 55분이었다.
사토는 2명의 수행원만 대동한 채 크렘린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몰로토프 외상의 집무실 앞에 선 그는 정중한 말투로 몰로토프 외상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몰로토프의 경호원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토가 넥타이의 주름을 펴는 사이 그새 몰로토프의 답변을 받은 경호원이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가시지요. 단, 대사님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토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경호원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몰로토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온 사토를 응시하고 있었다.
"몰로토프 외상, 만나서 반갑-"
"아, 굳이 격식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자리가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뚝뚝함을 넘어 냉대에 가까운 몰로토프의 태도에 사토는 당황했다. 몰로토프의 얼굴에선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대사를 부른 이유는 일본 정부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 정부 명의의 통고문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서 있으실 필요까진 없으니 의자에 앉으시지요."
불안하다.
존나게 불안하다.
수십 년을 외교계에서 보낸 사토의 본능이 위기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사토는 몰로토프의 권유대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일본 대사관의 의자보다 훨씬 푹신하고 좋은 의자였다.
사토가 의자에 앉아 몰로토프는 준비한 문서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일본은 소련과 우호관계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에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으며 끝내 전쟁을 일으켰고, 소련과도 충돌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와 결탁하여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였다.
독일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전쟁을 지속 중이며 이러한 일본 정부의 행위로 여전히 많은 중국과 아시아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다. 소련 정부는 결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으며, 도탄에 빠진 인민들을 구조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상 소련 정부는 내일, 즉 3월 1일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말을 마친 몰로토프는 문서를 내려놓고 홍차를 마셨다. 사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의 의자에 고정된 것마냥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소련이 일본과 전쟁? 그것도 내일?
찰나의 순간에 사토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여러 번 생각하지 않았던가. 황국은 망하기 직전이고, 오래전부터 황국과 충돌해온 소련이 이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는 사실상 필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던 간에, 몰로토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사토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오직 그의 개인적인 위엄뿐이었다. 비록 내일부로 적국이 된다곤 하나 한 나라의 대사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 테니까.
"...알겠소이다, 외상. 그게 귀국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흠, 이해가 빠르셔서 다행입니다, 대사. 제가 개인적으로 귀하께 정중하게 배려해드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군요."
"외상의 친절을 잊지 않겠소."
"대사께서 원하신다면 본국과 무전 송신도 할 수 있게끔 해드리겠습니다. 또 필요하시다면 암호도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 정도는 제 개인적인 권한으로 보장해드리지요. 사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하지요. 이만 물러나겠소이다."
"조심해서 들어가시지요."
사토가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떠난 후, 몰로토프는 즉각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즉각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되었소?
"별 탈 없이 끝났습니다, 서기장 동지. 의외로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야지. 일개 대사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다고. 아무튼 수고했소.
***
몸의 떨림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대사관으로 돌아온 사토는 이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크렘린으로 떠나자마자 NKVD 요원들이 처들어와 무선 통신장비를 모두 압수해갔다는 것이었다.
"전화도 끊겼습니다, 각하.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상업 통신이라도 이용해야지. 즉각 준비하게."
평상시라면 보안이 전혀 되지 않는 상업용 통신으로 1급 기밀에 해당하는 소식을 전할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보안이건 뭐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전쟁이니까.
그러나 사토가 보낸 전문은 전신국을 통과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만주 국경 인근의 소련군 기갑부대에는 출동 준비 명령이 하달되었다.
***
1944년 3월 1일.
이오지마 수리바치산의 잔존 일본군 병사들이 미군의 화염방사기 앞에 녹아내리고,
태국의 정글에선 센추리온이 일본군의 벙커를 향해 불을 뿜었다.
충칭에선 장제스가 불도장의 국물을 음미하고,
오사카의 길거리에는 배급 쌀을 타러 온 시민들이 길게 줄지어서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홋카이도의 탄광에선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냄새나는 콩깻묵으로 허기를 때웠다.
드넓은 중국의 시골 마을에선 퇴각하는 일본군이 마을에 살던 중국인들을 끌어낸 총검과 기관총으로 의미 없는 살육을 자행했다.
그리고 만주에선,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었다.
시베리아의 공군 기지에서 이륙한 Pe-8, Yer-2 폭격기들이 관동군 기지들을 폭격하는 동안, T-34와 T-43을 앞세운 소련 육군이 소련-만주국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입했다.
소련군을 막기 위해 국경에 배치된 관동군은 정예라는 인식과 달리, 실체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들은 이미 중국과 동남아의 정글로 보내져 산화했고, 장비들은 모두 2, 3선급이었다.
하찮은 성능의 기갑장비들조차 수량이 부족했고, 태반의 병사들이 실전은커녕 훈련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이런 군대가 세계 최강의 군대인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소련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비상! 비상!"
"소련군이다! 전원 위치로!"
이제 갓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자대로 배치된 햇병아리 장교들은 합리적인 지시를 내리기보단 무작정 소리치기 바빴다.
그들은 현대전에선 사실상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일본도를 허공에 대고 휘두르며, 병사들에게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쳤다.
"이 병신 새끼야! 박격포탄을 왜 여기로 가지고 오냐! 2분대로 가야지!"
"죄, 죄송합니다!"
"기관총 탄약은 언제 오는 거야?"
"대전차포! 대전차포는 아직도 준비가 덜 끝났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해야할 장교들조차 어수룩한데, 병사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전투가 거의 없는 안락한 만주에서 지낸 탓에 막상 실전이 닥치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그나마 중국에서 실전을 몇 번 경험해본 오장과 군조들이 사실상의 장교 역할을 수행하며 부지런히 뛰어다녔지만, 적들은 일본군이 전투 태세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와악! 아아아악!"
"살려줘!"
"엎드려, 개새끼들아! 씨발, 엎드리라고!"
소련군 전차들의 포격이 시작되자, 일본군의 진지 곳곳에서 폭발이 일었다. 병사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흙이 쏟아져 참호와 이동로를 끊어놓았다.
혼란의 와중에, 겨우 방열을 끝낸 1식 기동 속사포가 소련 전차들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캉!
"튀, 튕겼습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도탄.
1식 기동 속사포의 47mm 포탄은 경장갑인 BT-7과 T-26 같은 경전차들을 상대로 효과가 있지만, 그보다 장갑이 몇 배나 두꺼운 T-34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일본군의 포탄을 여유롭게 튕겨내며 전진하던 T-34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곤 포탑을 돌려 대전차포를 조준했다. 포구에서 샛노란 화염이 튀어나오자, 1식 기동 속사포는 완전히 분해되어 고철더미로 전락했다.
"잘했다, 드미트리! 남은 놈들은 기관총으로 쓸어버려."
"알겠습니다, 중위 동지!"
T-34와 동등 이상인 4호 전차와 3호 돌격포, 그 이상의 성능을 자랑하는 티거와 판터까지 상대한 바 있는 소련군 전차병들에게, 일본군의 대전차포는 어린애들 장난감 수준이었다.
대다수의 대전차포들이 전차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역으로 격파당했다. 소련군 전차들은 일본군의 진지를 무한궤도로 짓밟으며, 패닉에 빠져 도주하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이 마냥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펑!
대전차포가 통하지 않자, 일본군은 화염병으로 소련 전차들과 맞섰다. 일본군의 허접한 대전차포 공격을 여유롭게 튕겨내던 소련 전차들도, 화염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화염병이 엔진룸에 제대로 명중하자, 폭발이 일어나면서 엔진에 화재가 발생했다. 곧 전차 내부로 유독 가스가 들이찼고, 전차병들은 해치를 열고 탈출을 시도했다.
"커헉!"
"죽어라, 로스케 새끼야!"
전차 밖으로 나오던 전차병들은 제대로 눈이 돌아간 일본군의 총검에 박히거나, 일본도에 목이 베였다. 참호에 무한궤도가 걸려 약점인 측면을 드러낸 전차들은 대전차포에 관통되어 격파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덮치는 붉은 파도는 끝이 없었다.
"쏴라, 쏴!"
"동무들, 승리가 코앞에 있소!"
"우라!"
전차들을 뒤따라 돌격한 소련 병사들이 기관단총을 쏘아대자, 전차에 들러붙었던 일본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일전에 할힌골에서 보병들 없이 전차들만 단독으로 보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적 있던 소련군은 그때의 교훈을 잊지 않고 전차 뒤에 보병들을 배속해서 투입했다.
그 결과 전차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병들을 보호하고, 보병들은 일본 보병들의 근접 공격으로부터 전차를 보호하며 전진했다.
가진 것이라곤 무지성적인 광신성 밖에 없던 천황의 군대는 수년간의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붉은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 하루 만에, 북만주의 관동군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붉은 파도는 남으로, 남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