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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9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2화

202화 떨어지는 태양 (3)

 

 

"천황 폐하 만세!"

"만세!"

"우아아아아아!"

 

일본군은 밀리면서도 악착같이 저항했다.

 

사이비 광신도들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광신성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저 모습을 보라. 전차를 상대로, 달랑 소총과 일본도만 들고 무지성으로 달려오는 것이 어찌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책과 인터넷으로만 접했던 일본군의 막장성은, 실물로 보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쪽발이들이 몰려온다!"

 

"전 차량 해치 닫아! 적의 육박전에 주의!"

 

일개 알보병을 전차로 쓸어버리는 일 정도는 간단하지만, 상대가 저런 미친놈들이라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특히, 전차 한 대 잡으려고 1개 분대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살'시키던 일본군이라면 더더욱.

 

적이 밖에서 열 수 없도록 해치를 단단히 걸어 잠근 뒤, 공축 기관총을 난사해 적의 대열을 빗자루로 낙엽 쓸듯이 밀었다. 핏방울이 튀면서 주르륵 쓰러지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미친 새끼들.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제레미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죽어도 죽어도 좀비 떼처럼 끝없이 몰려드는 적의 대열을 보며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암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었으면 애초에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겠지만.

 

워낙에 수가 많은 탓에 끝내 적군이 전차에 근접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선두 차량에 적들이 달라붙자, 게이츠 원사는 포탑을 돌려 공축 기관총을 난사했다. 해치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일본군 3명이 벌집이 되어 전차에서 굴러떨어졌다.

 

달칵!

 

"젠장, 재장전!"

 

쉬지 않고 기관총을 쏘아댄 탓에 총탄이 금방 바닥났다. 서둘러 재장전을 하는데, 해치 위에서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적군이 전차에 올라탄 것이다.

 

"씨발, 어느 틈에 올라탄 거야?"

 

전차 뒤에 있는 보병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관측창으로 후방 상황을 살피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너무 거센 탓인지, 보병들이 전차로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그들은 자신들에게 몰려오는 적들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래서야 보병들의 지원을 받기 힘들 것 같았다.

 

전차에 달라붙은 놈을 어떻게 떼어내야 할지 고민하는데, 머리 위에서 폭음이 울렸다.

 

"뭐야?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대위님?"

 

난데없는 폭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나를 보고 게이츠 원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난 멀쩡해요. 그냥 좀 놀래서 그렇지."

 

아무래도 조금 전의 폭음은 적의 수류탄 소리 같았다. 도저히 해치를 열 수 없으니까 수류탄을 쓴 것 같은데, 전차의 해치는 수류탄 정도로 박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이 일반 수류탄이 아닌 집속수류탄 같은 폭발력이 강력한 무기를 썼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적은 여전히 전차에서 떨어지지 않고 개머리판으로 해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당장은 안전하지만, 지금 이 상태가 언제까지고 계속될지 모르는 일. 조급해진 나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보리스, 1시 방향에 있는 농가가 보이냐?"

"잘 못 들었습니다!?"

"1시 방향에 농가가 보이냐고? 찾았어?"

"아, 보입니다!"

"좋아, 그대로 전속력으로 달려서 농가에 부딪힌다!"

"예?"

 

내 명령이 다소 어이가 없었는지 게이츠 원사까지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걸 어쩐다. 나는 진심인데.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빨리! 지금 우리 전차에 달라붙은 놈이 또 무슨 장난을 치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게이츠 원사, 포탑 뒤로 돌려요. 주포에 손상이 가면 안 되니까."

"옙, 대위님."

 

그사이 전차에 적군이 추가로 올라탔다. 좁은 관측창으론 적이 몇 명이나 전차에 올라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관측창이 가려질 정도로 많은 적군이 올라탔다는 것이었다.

 

보리스는 내 지시대로 속도를 올려 농가를 향해 돌진했다. 충돌에 대비해 상체를 엎드리는 순간 전차에 충격이 전해졌다. 그리고 전차 밖에서 쏟아지던 무수한 일본어가 뚝 끊겼다.

 

"좋았어! 이제 후진해!"

 

보리스가 전차를 후진시키는 사이, 나는 해치를 열고 확인에 들어갔다. 조금 전의 폭발로 해치의 잠금장치가 고장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해치는 잘 열렸다.

 

해치를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슴도치마냥 나뭇조각이 온몸에 박혀 나자빠진 일본군의 시체였다. 그런데 아직 한 놈이 목숨이 붙어있었다. 녀석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녀석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나는 허리춤에 찬 리볼버를 뽑아 녀석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퍽 소리가 나면서 놈은 전차에서 굴러떨어졌다.

 

"대위님, 위험합니다! 얼른 들어오십쇼!"

"알아요, 알아!"

 

다시 해치를 걸어 잠근 뒤 보리스에게 적 대열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전속력으로 전차를 몰아 적의 대열 한가운데로 돌격하자 일본군들이 전차에 치여 쓰러졌다.

 

"지그재그로 몰아! 지그재그로! 원사, 포탑 돌리면서 마구 쏴요!"

"알겠습니다!"

 

삼국지의 여포마냥 적의 대열로 쳐들어가 기관총을 마구 난사하자, 일본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아무리 광신적이어도, 결국 보병은 보병. 겨우 살과 뼈로 구성된 물렁한 육체가 총탄을 견뎌낼 수 없는 법이다.

 

중대의 다른 전차들도 일제히 속도를 올리자 일본군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전차들과 떨어져 고전하던 보병들도 어느새 뒤를 따라잡아 열심히 총탄을 퍼부어댔다.

 

30분 후, 전투가 끝났을 땐 사방이 피바다였다.

 

전차 무한궤도에 짓이겨지거나 기관총에 벌집이 된 일본군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부패가 시작된 시체들에 날벌레들이 몰려와 들러붙었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광경에 병사들은 구토를 일으켰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도로 안으로 들어온 닉이 한 말이었다. 차마 못볼 꼴을 본 것처럼 얼굴이 핼쑥해진 녀석에게 나는 조용히 끔찍한 진실을 알려줬다.

 

"더 큰일은 뭔지 아냐? 궤도에 들러붙은 살점들까지 다 치워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을 들은 녀석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일본군과 전투를 치루고 난 후에는, 항상 무한궤도에 살점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걸 일일이 떼어내는 일도 참 고역이 아닐 수 없었는데, 모양도 끔찍한 데다 악취는 물론이고 금방 썩어 문드러져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궤도를 청소할 걱정에 곳곳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와 반대로 대대 무전망에는 브랜슨 대령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방콕까지 이제 30km 남았다, 제군들! 서두르자!

 

***

 

"진격이 아주 순조롭군. 좋아, 좋아. 이래야지."

 

방콕을 향해 늘어선 전차와 장갑차, 트럭들의 행렬을 응시하며 몽고메리는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일본군은 특유의 광신성을 내보이며 끝없이 공격해왔지만, 이미 유럽에서 독일군과의 전투로 단련된 영국군은 일본군을 가볍게 쳐부수며 전진했다.

 

일본군의 전차는 차마 전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고, 대전차포조차 부족해 일반 보병에게 수류탄을 들려주면서 전차 앞으로 돌격시키는 형편이었다. 이러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가.

 

"그런데 다 좋은데 말이야,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군."

 

본국 상황을 떠올린 몽고메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아 줄 겸, 그간 상실했던 아시아 영향권 회복을 위해 처칠은 아시아로 대규모 병력 파견을 결정했다. 영국 본토와 독일 주둔군을 제외한 거의 전 병력이 아시아로 보내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영국 본토에선 병사가 부족해 불과 며칠 전 퇴역한 예비역과 해산한 홈가드까지 재소집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도 제법 안 좋은 소리들이 나왔다. 전쟁이 끝났는데 여자들과 노인들이 여전히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면서 말이다.

 

됭케르크와 북아프리카에서 잃은 병력이 워낙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처칠이 과도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아시아로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칠 자신도 이러한 문제를 아는지 아시아로 가는 몽고메리에게, 반드시 대전과를 올리라고 주문했다. 그래야 언론과 야당에서 나오는 군소리들이 없어질 것이라면서.

 

"처칠 이 양반, 다른 건 다 좋은데 우릴 너무 정치에 이용해먹으려고 들어서 좀 그렇네. 다음 선거 때 노동당에 투표할까 고민 중이야."

"저, 각하?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발언입니다만...."

"하하, 농담일세. 없는 데선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뭘."

 

느긋하고 여유로운 영국군과 달리, 일본군은 매시간마다 똥줄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영국군이 방콕에서 3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습니다!"

"32사단과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영국군의 강력한 중전차 때문에 피해가 극심하다고 합니다!"

 

분 단위로 쏟아지는 피해, 퇴각, 연락 두절 보고에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제15군은 영국군의 공세에 맞서 태국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 공세를 방어하기는커녕, 일본군은 퇴각에 퇴각만 거듭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무다구치는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평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주색잡기와 짬때리기가 전부였던 그가 현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손자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미쳐버리겠군. 적을 도로 버마에서 내쫓아버리겠노라고 큰소리만 떵떵 치고 왔는 데.......

 

"각하? 각하?"

"무, 무슨 일이냐."

"31사단으로부터 전문입니다. 피해가 워낙 막심해 후퇴하지 않으면 전멸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후퇴라니, 그게 황군으로서 할 말인가? 절대, 절대 안 되네!"

 

사실 무다구치도 머리로는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을 뿐.

 

가뜩이나 전과를 올리기는커녕, 전멸과 퇴각만 반복하고 있는데 후퇴를 허용한다. 그랬다간 대본영으로부터 할복하란 지령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병력과 물자를 쥐어짜 최대한 버티는 것뿐.

 

"당장 31사단장에게 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말라고! 마땅히 황국의 군인이라면, 죽음을 각오한 기세로 싸워야 한다고 말이야! 알겠나?"

"...그리 전하겠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사령관이란 작자가 이 모양이니, 휘하 부대들이 제대로 싸울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더 큰 비극이 남아있었다.

 

***

 

"동무, 조금만 더 뒤로. 그래, 정지."

 

유도병의 신호에 맞춰 조종수들은 전차호 안으로 전차를 후진시켰다.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일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독일제 라이터는 성능이 좋았다. 성냥보다 사용하기 편리한 데다 소련제 라이터보다 불도 잘 붙어서 모든 병사들이 애용하는 물건이었다.

 

"니미. 전쟁 끝나서 고향 갈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시베리아라니."

"여름 오기 전까지 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집과 고향에 돌아갈 희망에 잔뜩 부풀었다. 대부분 전쟁이 터져 급히 소집된 이들이었기에, 전쟁이 끝났으니 더 이상 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부에선 그들을 제대시키는 대신, 시베리아로 보냈다.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명령만 내릴 뿐. 병사들도 속으론 불만과 의문을 품으면서도 반항하진 않았다. 전쟁이 끝난 마당에 총살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긴 싫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에서 온 병사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린 병사들은 곧장 참호를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먹고 잤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게끔 감시하면서, 동시에 상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만주 국경이 있는 남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늘 그렇듯이 푸른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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