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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8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00화

200화 떨어지는 태양 (1)

 

 

히로히토의 노성이 떨어지고 벌써 닷새가 지났건만, 대본영은 여전히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애시당초 '마땅한 해결책' 자체가 존재할 리 만무했지만.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곧 무적의 황군이 전세를 역전시킬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 말만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이나 들은 줄 아시오? 대체 언제까지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이오?"

"애초에 육군이 지나를 조기에 굴복시켰다면 이런 사태는-"

"무엇이!? 어쩌고 어째?!"

"그러는 해군은 여태까지 뭘 했소? 미 해군이 태평양을 제집 안방마냥 휘젓고 다니는데! 해군이 무능해서 황국이 위기에 처한 거 아니오!"

"말 다 했소?!"

 

존재하지도 않는 해결책을 찾기 위한 회의는 육해군 간의 치졸한 난타전으로 변질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회의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다.

 

그러기를 여러 번.

 

말로만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절대며 정작 그 대책을 마련할 생각은 1도 않던 대본영조차 충격에 빠진 일이 생겼다.

 

"총리 각하! 총리 각하!"

"무슨 소란이냐. 이른 아침부터."

 

우동과 무 절임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출근할 준비를 하던 고이소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나름 똘똘한 친구인 줄 알고 뽑아놨더만 저리 허둥거려서야.

 

"소련 대사관으로부터 전문이 왔습니다."

"소련 대사관으로부터?"

 

의아해하며 전문을 받았던 고이소는 이내 손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문을 다 읽었을 즈음엔 일어설 힘조차 없어 의자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 어떻게 이런 일이......."

 

1944년 1월 31일 월요일,

 

소련은 일본에게 소일 상호중립조약의 연장을 거부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소련의 폭탄선언에 이제까지 무슨 일이 생겨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던 대본영은 발칵 뒤집혔다.

 

***

 

"이제 우리, 아니 황국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없소."

 

소일 상호중립조약의 무효화 통보 이후, 충격으로 사임해버린 고이소를 대신해 총리직에 임명된 스즈키 간타로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세는 황국에 극도로 불리한 형편이오. 육군도, 해군도 모두 괴멸에 가까운 피해로 뼈대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반면 연합국은 우리에겐 없는 물자가 풍부한 데다, 유럽 방면의 병력들까지 대거 아시아로 이동 중이오. 앞으로 전황은 더욱 불리해질 것이오."

"......."

"다들 아시겠지만 오래전에 승리는 물 건너갔소. 이제 황국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화뿐이오. 영미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확률은 희박하지만.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보시오. 이 자리는 의견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눈치 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보시구려."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말을 꺼낸 이는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대장이었다. 전직 총리이자, 평소 온화한 태도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추종자가 많은 요나이는 고이소의 사퇴 때 해군대신에서 물러날 계획이었지만 스즈키의 강력한 요청으로 해군대신을 유임 중이었다.

 

"소련에게 영미와의 강화를 중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소련은 황국과 달리 영미와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니니까요."

"요나이 대신께서는 그것이 정녕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요나이의 말에 딴지를 건 이는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였다. 도조 일파의 압력에 외무대신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스즈키에 의해 다시 외무대신에 임명된 상태였다.

 

냉혹한 현실주의자인 도고가 보기엔 요나이의 제안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이미 소련은 소일 상호중립조약의 갱신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황국을 도와 영미와의 강화를 주선하겠습니까?

 

되려 몇 달 안으로 황국에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고는 스즈키로부터, 시베리아 각지에서 붉은 군대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군사학에 지식이 전무한 이가 봐도, 소련이 일본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안이 있소이까?"

 

요나이를 편든 이는 놀랍게도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이었다.

 

육군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경파인 그는 요나이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이었다.

 

"소련으로서도 영미와 국경을 맞대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할 겁니다. 황국이 소련과 미국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자처한다면, 소련 입장에서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일일 겁니다.

 

비록 소련 빨갱이들의 방패막이가 되더라도, 무조건 항복하여 영미에게 굴복하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아나미의 강력한 주장에, 노련한 정치인이자 도고 못지않은 현실주의자인 스즈키조차 흔들리는 눈치였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일세. 썩은 동아줄이라도 일단 잡고 봐야 하지 않겠나."

 

도고는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회의의 분위기가 소련과의 협상 쪽으로 가닥이 잡힌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도고 본인에게도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는 방법 외엔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소련과 접촉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다만,"

 

도고는 말을 멈춘 뒤 좌중을 둘러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탈린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황국에 막대한 영토를 요구해올 것입니다. 가라후토(남사할린)와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는 물론이고, 만주와 내몽고, 어쩌면 조선 반도까지 소련에 넘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소련과 접촉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황국이 망하면 모두 영미의 차지가 될 텐데,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전원 만장일치로, 소련과의 협상안이 타결되었다.

 

***

 

"한심한 놈팽이들 같으니라고."

 

일본의 협상 제안에 스탈린은 코웃음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취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을 터였다.

 

"아직도 현실을 못 보고 있군. 6살짜리 꼬마애도 이놈들보다 더 똑똑하겠어."

 

이미 스탈린은 일본이 어떤 제안을 해오든 간에 일본과의 전쟁을 취소할 생각이 없었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이자 군주정 혐오자인 스탈린이지만, 그런 그조차 과거에 러시아 제국이 일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만큼은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야 그 원한을 갚아줄 날이 왔는데, 뭣 한다고 놈들의 제안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는가?

 

"뭐어, 그래도 놈들을 방심시키는 일도 나쁘진 않겠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홍차를 마시면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지시를 내렸다.

 

"도쿄에 있는 말리크에게 전하게. 일본이 어떤 제안을 해오더라도, 경청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렇다고 너무 무시하지는 말고. 일본 놈들이 붉은 군대와 싸울 대비를 하면 우리 입장에서도 딱히 좋을 게 없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

 

"좋아, 좋아. 그대로, 천천히."

 

유도병들의 유도 대로 조종수들은 조심스레 전차를 움직여 열차에 올랐다.

 

이동 중에 주포가 흔들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포탑은 모두 뒤로 돌려 주포를 단단히 고정시켜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의 예상대로, 우리 대대는 아시아행이 결정되었다. 열차 편으로 체코에서 이탈리아로 간 뒤,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내리는 기나긴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열차를 타고 버마까지 갈 일을 생각하니 입에서 연신 한숨이 나온다.

 

"어이, 그레이 대위.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다시 전쟁터에 갈 생각을 하니 앞날이 캄캄해서 그렇습니다."

"그거야 모두가 같은 마음 아니겠나? 그래도 자네 같은 에이스도 같은 모습을 보여서야 쓰나. 병사들에게 늘 모범을 보여야지."

 

정작 무어 소령 본인도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란 딱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리라.

 

아직 배에 오르기도 전인데도 병사들의 얼굴에선 어둠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야자 끝나고 학원 가서 새벽까지 공부하는 대한민국 중고딩들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지랄맞은 전쟁 같으니라고.

 

그나마 유럽 전장보다 나은 점은 일본군이 독일군보다 약체라는 것뿐인데,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게 이 시기의 일본은 대전차병기의 부족을 '사람'으로 때운 인류 역사상 희대의 또라이들이다.

 

88이나 판처파우스트는 없어도, 대전차자폭조 같은 '인간병기'들은 지천에 널린 게 일본군이니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노릇. 마침 상부에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여럿 있는지 출발에 앞서 지침서가 나뉘어 졌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대영제국 장병들을 위한 지침서라. 이젠 별게 다 나오는군요."

 

상부에서 배부한 지침서를 받아든 게이츠 원사가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이미 버마에서 일본군과 한 번 싸워본 경험이 있는데, 굳이 이런 게 필요하겠냐는 말투였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원사. 일본군은 비록 무기는 독일군보다 열등하지만, 똘끼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들이니까요. 직접 봤잖습니까. 전멸 직전인데도 연신 돌격 외쳐대는 놈들을."

"으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고 박은 미군으로부터 자문까지 구했는지, 지침서 안에는 제법 유용한 정보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간단한 일본어부터, 일본군이 사용하는 무기들의 정보와 사용 방법,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까지.

 

전차병인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본군의 대전차전술이었다.

 

일본군 자신들도 자신들의 무기가 허접하다는 것을 알기에 부족한 대전차능력을 여러 전술로 메우고자 했다. 지금 들어도 해괴한 대전차총검술이 일본군이 주로 사용했던 전술 중 하나인데, 여기선 더 발전된 게 대전차자폭조였다.

 

문자 그대로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게 달려가 함께 자폭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전술. 알 카에다나 IS 같은 이슬람 광신도들의 원조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순무식한 전술이 치하 같은 전차보다 연합군 전차들에게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인데 그만큼 일본군 전차들이 쓰레기였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자폭조가 매우 위협적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부피가 크고 소음 때문에 위장이 힘든 전차와 달리, 사람은 위장이나 접근에 훨씬 더 용이한 법이니까.

 

"그러니까 너희들, 꼼꼼하게 읽어둬라. 이 손바닥만 한 지침서를 만들기 위해 미군은 만 명 단위로 죽어 나갔으니 말이야."

 

"예, 예."

 

일본군의 미친 전술을 빠싹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연신 부하들에게 주의를 줬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미지근했다. 다들 겨우 일본군 따위가 뭐가 문제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독일군과 싸워봤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적을 우습게 봐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천하의 미군조차 6.25 전쟁 초반에 인민군을 우습게 봤다가 영혼까지 털렸으니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

 

"나중에 기습적으로 물어봐서 제대로 대답 못하면 그땐 단단히 각오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열차에 있는 내내 변소 청소를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새끼들, 또 눈 이상하게 뜬다.

 

제발 철 좀 들어라. 이게 다 니들 위해서 하는 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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