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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6화

 196화 전후처리 (1)

 유럽 전쟁은 종료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나 그랬지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동부전선에선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항복한 대상이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이었기 때문이다.

 즉, 소련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들은 소련군을 상대로 '합법적'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뭐, 이 문제는 정치가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고, 우리한테는 우리들이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레이 대위, 자네가 할 일이 있네."

 종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무어 소령이 내게 한 말이었다.

 "무슨 일 말이십니까?"

 "힘든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게. 아주 간단한 일이야."

 아주 간단한 일치고 좋게 끝나는 경우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러니까 더 불안한데.

 "사단본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제리들한테 가서 공식적으로 항복을 받아내라고. 우리 대대에선 자네하고 나, 대대장님이 제리들한테 가기로 했다네."

 "어, 언제 가는 겁니까?"

 무어 소령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지금이지. 원래 이런 일은 빨리 해결할수록 좋다는 걸 모르나?"

 ***

 독일군 진영으로 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낼 사람들은 나를 포함한 장교 5명에, 호위용으로 데려갈 병사 1개 분대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전차도 한 두 대 정도 같이 끌고 가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너무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데다 뜻밖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있어서인지, 전차 대신 다임러 딩고 정찰자도 같이 가기로 했다. 아직도 항복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차량마다 백기를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출발하지."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긴장감은 그렇게 들지 않았다. 정말로 무슨 드라이브를 나온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쳤을 풍경들도 이제야 눈에 속속 들어왔다. 한겨울이라 사방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마치 겨울철의 강원도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라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딱히 그립지는 않았지만.

 "무슨 생각하나, 대위?"

 적진이 도착할 때까지 그냥 가기엔 심심했는지 브랜슨 대령이 말을 걸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바깥 풍경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의외구만. 자네라면 필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어, 이다음에 우리가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역시. 자네는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 것 같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으니,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다면 한군데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시아 아니겠습니까. 동남아가 될지, 중국이나 오키나와가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독일과 달리 일본은 여전히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중이다. 지금 전선이 어디더라? 랜드리스로 무장한 중국군이 중원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중이라곤 들은 것 같은데.

 "쪽발이들도 제리들처럼 빨리 백기들면 참 좋을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시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정글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답답하니다."

 무어 소령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일본군은 독일군과 달리 88이나 티거 같은 강력한 병기들이 없고, 겨우 치하나 자돌폭뢰 따위로 무장해서 독일군보다 상대하기 쉽지만, 그놈의 정글과 무더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어 소령 말대로 얌전히 항복하면 소원이 없을 텐데. 허나 원폭과 소련군에게 처맞기 직전까지도 1억 총옥쇄 운운하던 정신병자들이 알아서 백기를 올릴 리가.

 "전방에 제리 놈들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소위가 다급히 말했다. 400m쯤 전방에 독일군 한 무리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단순 보병들만 있는 게 아니라, 4호 전차도 한 대 있었다.

 4호 전차의 포탑이 돌아가자, 심장이 덜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마, 주변이 온통 눈밭이라서 우리가 내건 백기를 못 본 건가?

 그도 아니면 항복 소식을 인정 못하고 계속 싸우고자 하는 전쟁광들인가? 우릴 겨냥한 전차의 주포를 보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났는데, 정작 전쟁이 끝난 다음 날 죽다니, 이 무슨 개죽음이란 말인가.

 그러나, 적의 주포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포탑을 돌렸다. 4호 전차의 포탑이 도로 회전하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반사적으로 포탑을 돌렸거나, 그도 아니면 단순 위협용으로 돌린 듯했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 간에 간담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4호 전차를 지나쳐 5분을 더 달리자, 드디어 독일군 진영에 도착했다. 독일군 사령부는 어느 작은 고성에 위치해 있었는데, 우리가 오리라고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초병들이 알아서 문을 열어주었다.

 "카를 호저 소령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을 거느린 독일군 소령이 우릴 맞이했다. 차에서 내린 브랜슨 대령이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브랜슨 대령일세. 반갑네."

 "각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대신, 병사들은 놔두고 장교들만 오십시오."

 호저 소령은 우릴 성안으로 안내했다.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병사 둘이 문을 열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장군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장군은 뒤를 돌아봤다.

 "어서들 오게, 영국 나으리들."

 "브랜슨 대령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군."

 "그렇군. 나는 회프너일세. "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는 사람이었다.

 에리히 회프너. 실제 역사에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동참했다가 발각당해 처형당한 이였다. 그런데 여기선 히틀러가 죽고 쿠데타가 성공해서 용케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독일이 망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브랜슨 대령은 오는 길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선 함구한 채, 항복 인수 절차에 들어갔다. 회프너는 얌전히 브랜슨 대령이 내민 항복 조약서에 사인을 했고, 자신의 권총을 넘겨주려고 했다.

 "오후에 아군이 왔을 때 넘겨주십시오. 그때까지 가지고 있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어디까지나 본대가 오기 전에 먼저 적의 항복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었기에 애초에 할 일이 적었던 것이기도 했다.

 이대로 바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상부로부터 본대가 출발했으니,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져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게 느껴지는데, 우리의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회프너는 우리에게 사령부 내부를 둘러봐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맘대로 하게. 어차피 우린 패자고, 자네들은 승자니까."

 다른 이들도 가만히 앉아있기엔 좀이 쑤셨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브랜슨 대령은 회프너와 할 얘기가 아직 남았는지 방에 그대로 남았다.

 함께 온 장교들과 함께 성 이곳저곳을 조용히 둘러보고 다니는데,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상대도 나와 마주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당신은......?!"

 "......프로흐노 소령?"

 세상일은 참으로 오묘했다.

 과거 디에프에서, 포로로 잡힌 나와 대화를 나눴던 막시밀리안 폰 프로흐노 소령이었다.

 그사이에 진급했는지,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나와 마주친 그는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요."

 "흠, 그러게 말일세."

 내가 먼저 손을 건네자, 그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건넸다.

 "전에 만났을 땐 소령이었는데, 지금은 중령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그래봤자 패잔병 신세지만."

 프로히노 소령, 아니 중령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진심으로 조국의 승리를 믿고 있던 그에게 패전은 상상 그 이상의 충격이었으리라. 지치고 힘없는 표정을 보니 측은하면서도 한편으론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자네 말이 맞았어. 우린 전쟁에서 졌고, 자네는 승리했지."

 "예정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기운 좀 내십쇼. 비록 전쟁에선 졌어도, 중령님은 살아남으셨지 않습니까."

 이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승자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 위로도 그에겐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살아남았지. 하지만 가족들은 지금 어떨지 모르겠군."

 프로흐노 중령의 집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있었다.

 그리고 쾨니히스베르크는 지금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연일 공습을 당하고 있는 중이고.

 "모두 무사할 겁니다. 힘내십쇼."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겨우 격려밖에 없었다. 솔직히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한단 말인가? 그저 그의 가족들이 무사하길 기도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프로흐노 중령은 씁쓸한 얼굴로 나와 악수했다.

 곧이어 본대가 사령부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회프너 장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항복한 독일 병사들은 아군 병사들의 감독하에 무기를 수거하고 일렬로 서서 조사를 받았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들도 조만간에 포로수용소로 향할 예정이었다.

 ***

 독일의 항복을 받아들인 직후, 미국과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소련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것이었다.

 "서기장 동지, 미국과 영국 정부로부터 온 서한입니다."

 "이리 줘보게."

 몰로토프는 다소 불안한 얼굴로 스탈린에게 서한을 건넸다.

 스탈린은 먼저 미국의 서한부터 살폈다.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했으니, 소련도 더 이상의 전투 행위를 종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서한의 맨 밑줄에는 루스벨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처칠의 것을 한 번 볼까.

 미국의 서한과 달리, 영국의 서한은 훨씬 더 직설적이었다. 소련이 독일을 공격하는 것은 또 하나의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중대한 위협사항이며, 당장 교전행위를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이를 무시하고 독일군과의 교전을 계속하며 현 위치보다 전진할 시, 연합국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말까지 적혀 있었다.

 "흥, 늙은 불독 같은 놈. 아직도 영국이 대영제국인 줄 아는군."

 미국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런던에 하켄크로이츠가 걸려 있을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군. 스탈린은 처칠의 경고에 분노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스탈린의 측근들은 설마 미국과 영국이 이제까지 적국이었던 독일을 위해 소련을 공격하진 않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루스벨트라면 몰라도, 처칠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소련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상상 이상이라서 꼬투리라도 생기면 득달같이 물어서 전쟁으로 만들 작자가 바로 처칠이었다.

 처칠이라면 틀림없이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갈 바에는 다시 전쟁을 벌이는 편을 택할 것이다.

 물론 영국 단독으로 소련과 전쟁을 할 수 없으니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처칠 그 자라면 며칠 밤을 꼬박 새더라도 끝내 루스벨트를 설득할 터였다. 물주인 미국이 전쟁을 결심하면,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잡다한 국가들도 당연히 따를 테고.

 붉은 군대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이미 오랜 전쟁으로 국토의 상당수가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인민들이 죽었다.

 당장 식량조차 자급자족할 수 없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인데, 그들과 다시 전쟁을 벌인다? 그랬다간 모스크바가 위협받는 선에서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동시에 전쟁으로 군부의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들은 밑도 끝도 모르고 계속해서 기어오를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

 "몰로토프 동무. 동무가 할 일이 있소."

 "뭐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서기장 동지."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몰로토프는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루스벨트와 처칠을 만나서 직접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소. 그들에게 한번 만나자고 전하시오."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몰로토프를 내보낸 후, 스탈린은 최전선의 주코프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기장 동지?

 "주코프 동무. 현재 아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소이까?"

 -방금 메멜을 함락시켰고, 이제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하기 직전입니다.

 "그렇군. 일단 전군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시오. 독일 놈들에게도 그리 전하시고.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다간 저 자본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소."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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