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4화
194화 몰락 (1)
적절한 시기에 도착한 지원군 덕분에 우리는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독일군의 반격은 분쇄되었고, 전선은 사수되었다. 그간 사단의 선두에 서서 독일군과 싸워왔던 우리 대대는 잠시 전선에서 물러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당장 보유한 전차들 중 상당수가 피격되거나 고장을 일으켜 재정비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본국에서 올 전차들과 신병들을 기다리는 동안, 해가 바뀌어 1944년이 되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자식들아."
"소대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고 가는 덕담 속에 새해 첫날이 지났다. 뉴스에 따르면 헝가리 방면의 아군은 진격이 다소 정체된 상태였다.
비록 독일군의 공세 시도를 반격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의 방어도 완강한데다 아군과 보조를 맞춰야 할 유고군이 지난 공세로 넉다운이 되는 바람에 진격에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쾌속 전진 중이었다.
아헨에 무혈입성한 것을 시작으로, 뒤렌과 울리히가 차례로 연합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현재는 뒤셀도르프와 쾰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도 라디오에선 아나운서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연합군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두 부대는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영제국 육군과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군입니다. 이들 부대는 서로 경쟁하듯 진격을 거듭하고 있으며, 수만 명에 달하는 독일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길고 길었던 전쟁의 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
늑대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부터, 베를린에선 그 어떤 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방에 전세를 바꿔보려던 도박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며 방심한 적들에게 제법 타격을 줬지만, 연합군에겐 감당할만한 피해였다.
헝가리 방면의 연합군도 공세를 개시했고, 이를 막으려던 회프너의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서부전선의 상황은 더욱 암울했다. 믿었던 만슈타인이 배신했으며, 아헨을 지키던 만토이펠도 만슈타인의 전철을 따랐다.
적의 대열은 뒤셀도르프와 쾰른에 이르렀다. 긁어모은 잔존 사단의 생존병들과 패잔병들, 그리고 현지에서 징집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가까스로 방어선을 지키고 있지만, 이들이 오래 버티리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베크는 현장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은 내팽개친 채 슈납스를 마셨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위장이 쓰렸다. 하지만 그는 몸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그는 아침에 슈파이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자택 침실에서 발견되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로.
자살에 이용된 권총은 그의 손에 들려 있었고, 탄피는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유서는 따로 없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이.
슈파이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고도 그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많은 독일의 아들들이 전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나. 그런데 한스 슈파이델의 이름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반 정도 남아있던 슈납스를 비웠음에도, 베크는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괴르델러와 카나리스, 할더는 텅 빈 슈납스 병을 앞에 둔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베크를 보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들 눈에 베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기보단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중환자처럼 보였다.
"따로 뭐 보고할 거 있나? 죄다 비슷한 소식들뿐일 텐데."
"......영국 측으로부터 받은 답변 내용입니다."
카나리스가 말했다. 아헨에 연합군이 입성하던 날, 카나리스는 마지막으로 연합국과 접촉을 시도했다.
미국은 거절했지만, 영국은 일단 들어나보자는 입장이었다. 카나리스의 밀명을 받은 아프베어 요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영국 측 인사에게, 독일의 마지막 조건을 전했다.
1937년의 국경만 인정해준다면, 모든 저항을 멈추고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답변은? 뭐라고 하던가?"
"우선 항복 먼저 하면, 고려해보겠다고 합니다."
카나리스의 대답에 베크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지. 그야 당연하지. 패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데. 안 그렇나?"
혼자 낄낄거리던 베크는 웃음을 멈추곤 진지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천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린 전쟁에서 졌네."
"......."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말이지."
독일이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독일 전역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항복만 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 그리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 내가 가장 후회하고 있는 게 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사를 더 일찍 시도할 생각을 못 했냐는 것일세."
베크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목소리에선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절망,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절망만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네. 만약 우리가 거사를 1년, 최소 6개월 일찍 일으켰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랬더라면 저들도 우리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겠지. 전쟁은 진작 끝났을 테고. 국민들은 다시 전쟁 전의 삶으로 되돌아갔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했지. 일이 이렇게 된 건, 오직 우리들의 잘못일세. 늘 눈치만 살피며 뒤로 미루기만 우리의 잘못이란 말일세."
"각하."
"자책할 필요 없다고? 그럴 리가! 자네들은 자네들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 생각은 틀려. 우린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했고, 동시에 무능했네.
우린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하는 것도 막지 못했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막지 못했지. 아니지. 막지 못한 게 적극적으로 찬동했지.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소련을 침공할 때도 우리는 히틀러를 막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걸세."
소련을 무너뜨리고, 광활한 유럽 러시아 영토를 독일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야망은 굴욕적인 강화 조약으로 끝났다.
독일은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기는커녕, 이제는 기존의 영토들까지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국민들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독일을 위해 행동한다고 굳게 믿었지만,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의 장막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했다.
현실을 읽지 못하고 자존심만 앞세운 결과, 마지막 기회까지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파멸을 불러왔다.
"거사를 일으키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했어야 했네. 그랬다면 1937년의 국경은 지킬 수 있었겠지.
국토는 그나마 멀쩡했을 테고, 병사들도 덜 죽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모든 걸 다 가졌음에도 그 어떤 것 하나 이루지 못했네. 되려 굴러들어온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어."
베크는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국과 영국인들에게 전하게. 항복하겠노라고. 더 싸워봤자 뭘 하겠나. 피곤하니 좀 쉬어야겠어. 모두 나가게. 혼자 있고 싶네."
부하들을 돌려보낸 후, 다시 혼자가 된 베크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독일의 지도를 응시했다.
지도 속의 독일은 전쟁이 끝난 후 새로 설정될 독일의 국경을 예상하여 그린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단치히와 서프로이센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채 유럽 정중앙에서 버티고 있었다.
처칠은 저기서 몇 개의 선을 더 그을까? 1차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서프로이센과 알자스-로렌을 독일에서 분리했다. 이번에는 어디가 독일이 아니게 될까? 라인란트? 동프로이센? 아니면 바이에른?
"뭐, 이제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만."
베크는 조용히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냈다.
루거 P08. 독일 국방군의 상징과도 같은 총.
지금은 값도 더 싸고 성능도 더 좋은 발터 P38에게 밀려났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루거가 전선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베크는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참모장교로 복무할 때부터 루거를 가지고 다녔다. 사격훈련 때 외에는 한 번도 쏴볼 일이 없었던 총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베크는 총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권총의 총구를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잘 있거라, 나의 독일이여."
***
"다 끝났군, 다 끝났어."
할더의 한탄 섞인 목소리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셋 다 자기 앞의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 작전이 중단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 순간이 오리라곤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슈파이델, 그 멍청이 말에 끝까지 반대했어야 했는데."
카나리스가 뇌까렸다. 늑대 작전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들, 독일이 항복을 피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카나리스는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협상카드조차 허무하게 날려버렸다고 슈파이델을 씹어댔다.
"관두게. 이미 죽은 놈 욕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할더는 한숨을 토하며 슈납스를 들이켰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을 때, 총성이 울렸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섰다. 분명히 베크의 집무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설마.......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일은 끝나 있었다.
베크는 책상에 엎드린 채 관자놀이의 구멍으로 검붉은 피를 뿌리고 있었다. 베크의 피는 어느새 탁자 전체를 뒤덮고 서류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긴급사태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달리, 셋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베크의 손에 들린 루거와 관자놀이에 난 구멍만을 바라볼 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
"파시스트 놈들의 최후가 다가왔군."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스탈린은 놀라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이 또한 계산 안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이 무너지면, 약속받은 영토들을 받지 못하게 되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애시당초 스탈린은 이들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장 폴란드를 먹은 것만으로도 영국이 경기를 일으키는데, 체코에 이탈리아, 노르웨이까지 깃발을 꽂을 경우 틀림없이 전쟁을 걸어올 터였다. 처칠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탈린은 이대로 독일이 얌전히 항복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원래 이탈리아나 노르웨이를 우리가 먹기 힘들다는 것쯤은 내 알고 있었소. 일이 잘 풀렸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소이까?"
"서기장 동지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소. 어차피 이깟 조약 따위, 어느 한쪽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지."
스탈린은 코웃음을 치며, 조약을 맺고 안도했을 독일인들을 비웃었다.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배신했던 것처럼, 스탈린도 독일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본래 국제정치의 세계란 냉혹한 법. 약자는 강자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 당연하고,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 또한 당연한 법이다.
"독일에 심어둔 우리 측 요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 못 가 독일이 항복할 거라고 하는군. 그전에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 놔야 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간이고 쓸개가 다 떼어줄 것처럼 살랑거리는 부하들의 아첨을 들으며 스탈린은 어깨에 한껏 힘을 줬다. 그리고 전선에 있는 주코프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코프 동무, 준비는 다 끝났소?"
-모든 병사들이 서기장 동지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군. 시작하시오. 독일 파쇼들에게, 소비에트 인민들은 다시 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구려."
-명령 받들겠습니다.
스탈린의 명령이 떨어지자, 독일과 소련 국경에 배치된 소련군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카츄샤 대연장로켓포가 허공으로 가르며 날아가고, '흑사병' IL-2 공격기들이 지상에 로켓포를 퍼부었다.
소련군의 기습을 알지 못했던 독일군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포격과 공습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은 떼지어 몰려오는 T-34와 T-43의 해일을 보고 얼어붙었다.
"돌격! 독일 돼지들에게 피의 복수를!"
"이번에야말로 베를린에 손에 넣자!"
붉은 군대의 거대한 물결이 베를린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