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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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3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27화
127 망인곡과 미타모할 성(3)
무혼이 있는 미타모할 성에서 서쪽으로 서너 시간 정도 가면 동맹군들이 모여 있는 로자본 성을 발견할 수 있다.
베트란은 그 로자본 성의 내성 성벽 위에서 동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 미타모할 성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래, 연합군과 함께 황토인이 온 것은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그의 작전관인 호레이스는 동쪽을 노려보고 있는 베트란의 옆에서 몇 시간 전에 도착한 연합군에 대한 자료를 보며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미타모할 성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성을 버린 것은 아니다. 점령은 하였으나 최후까지 저항한 연합군을 몰살시켰을 때까지 소모된 검은 안개가 꽤나 많았고 만년목에 저항하며 미타모할 성을 검은 안개로 덮기에는 그 기세가 부족했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으나 성의 공략에 참여한 하급 마인들이 끔찍스러우리만치 찢어놓은 사람들의 시체 덕분에 연합군이 미타모할 성을 회수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쉽군. 좀더 검은 안개가 진해지면 그곳을 점령할 생각이었는데, 다시 싸워야 할 판이로군.”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던 베트란은 호레이스 옆에 서 있는 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안개가 충만해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베트란의 눈길을 받은 자는 몸이 터져나갈 듯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쇠몽둥이가 쥐여 있다.
그가 바로 중급 마족에게 빙의된 마인이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베트란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어차피 마인이라고 해도 같은 등급은 아니다. 빙의된 마족의 힘이 강렬할수록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마인들은 상하 서열이 뚜렷했다. 특히 처음으로 마신에게 빙의된 베트란은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적어도 5일 정도 걸립니다.”
“흠……. 5일이라. 호레이스, 5일이면 그놈들이 얼마나 정비를 마치게 될까?”
호레이스는 서류들을 다시 훑어보며 입안으로 웅얼거리는 것을 보니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라면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나왔을 터이지만 지금은 정보를 받고 즉시 베트란에게 달려왔기 때문에 정밀한 분석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성을 보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쳇. 처음부터 새롭게 성을 공격해야 하는 게로군.”
“하지만 베트란님, 황토인은 만만치 않은 자입니다. 게다가 그의 능력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하급 마인들을 보내어 흔들어보는 것도 좋겠군.”
“그러다가 황토인이…….”
“후, 자네보다 허약했다고 하지만 중급 이상의 마족에게 빙의된 자들을 쓰러뜨린 자다. 하급 마인들을 보내어도 무사할 거라 생각한다. 하급 마인들에게 쓰러질 정도라면 굳이 우리가 상대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천명 정도면 황토인의 능력이 파악되겠지? 5일 뒤 하급 마인들을 보낼 준비를 하라.”
베트란에게 고개를 숙인 마인은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트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성벽으로 보았다.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봐주겠다.”
베트란은 동쪽으로 다시 눈길을 던지며 웃음을 띠었다. 미타모할 성을 포기하며 돌아올 때 어쩌면 황토인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꼭 오기를 원했기에 하급 마인들로 성내를 휘젓게 만들었고 그의 의도대로 하급 마인들은 성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명도 살려놓지 않았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황토인이 왔다는 것을 연락받았을 때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제 두 달 내에 황토인과 자웅을 겨루게 되리라. 그런 후 베트란은 검은 안개와 함께 마인들을 앞세워 빛의 왕국들을 피로 잠기게 할 생각이었다.
만년목이 계속 검은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면 좀더 빠르게 진행을 할 수 있었겠지만 베트란이 노리던 미라크네의 공주가 만년목을 정화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수로 정화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상당히 귀찮아.”
만년목이 빛의 경계선으로 오고 있는 검은 안개를 계속 정화를 시킴으로써 검은 안개를 계속 없애고 있기에 만년목의 능력을 넘는 검은 안개를 마계로부터 끌고 와야만 한다.
베트란이 아쉬운 것은 자신의 빙의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지금 어둠의 동맹국을 감싸는 검은 안개는 두 개의 경로를 통해 인간계에 뿌려지고 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빛의 귀족 영애들을 제물로 바치며 진행하는 의식의 제단을 통해서다.
“그 공주를 잡아 와 의식을 치렀더라면 좀 더 많은 안개가 생성되었을 것인데.”
순결한 피를 가진 빛의 연합국의 수많은 귀족 영애들은 검은 안개를 위한 거름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 동맹군이 그녀들의 납치에 열을 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신과 같은 마인들의 몸을 통해서다. 특히 마신이 빙의된 그를 통해서 막대한 기운이 흘러오고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몸을 기준으로 그럴 뿐, 가이오스트 대륙은 너무나도 넓었다.
베트란의 빙의만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빠르게 검은 안개를 대륙에 퍼트릴 수 있다. 하지만 시간만 보낸다고 빙의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의 마신 콜레나루트를 만족시킬만한 희열을 느껴야 빙의가 진행되었기에 베트란은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희열을 몇 배로 가져다줄 황토인이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다.
황토인의 목으로 피의 축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축제가 끝나는 날, 검은 안개는 가이오스트 대륙을 모두 덮을 것이고 그 안개는 천신의 빛의 마법을 막아주는 그들의 절대적인 보호막의 역할을 해준다.
그때쯤에는 인간계는 제2의 마계가 되어 마신과 마족들을 도우며 천신을 공격하고 천신들과 신족의 피로 두 번째 피의 축제를 열게 되리라.
그 뒤? 그 뒤는 어찌 되든 베트란에게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오직 빛의 연합국을 핏속에 던져 베르노의 복수를 완성하는 것과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하는 강력한 존재의 피, 피, 피!
“천신의 목을 잡아 뽑는다면 느낌이 어떨까?”
이미 입속의 이들이 날카로워져 있는 베트란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기대에 찬 눈빛을 했다.
달콤한 그리고 자극적인 혈전만이 그의 인생을 차지하고 있다.
5일 뒤 베트란과 마인들의 의지에 이끌려 미타모할 성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검은 안개의 모습은 성을 지키던 연합군 병사들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거리가 멀었기에 안개와 함께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마인들의 모습은 병사들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베트란의 명령에 따라 미타모할 성으로 향하는 일천 명의 하급 마인들은 불과 한 달 전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있다.
광란에 가까운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끊임없이 사람들을 찢고 가르며 혈향에 취했던 미타모할 성. 그들의 지배자는 이 성이 다시 한번 혈향 속에 파묻히기를 원하고 있다.
성에 다가갈수록 붉어지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본 미타모할 성은 이미 붉은색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곧 그것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간간이 기괴성을 흘리고 온몸의 뼈가 비명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즐기며 눈이 붉어지는 만큼 묘한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곧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하급 마인들의 머나먼 뒤 미타모할 성이 작게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베트란은 성을 향해 다가가는 하급 마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흥분이 베트란에게도 전해지는 듯 그의 눈도 검붉은빛이 감돌고 있었고 그의 옆에 있는 중급 마인도 눈의 색깔이 검붉다.
“황토인의 실력이 어떤지, 무슨 수를 쓰는지 기대되는군.”
으스스하고 얇은 웃음소리를 내던 베트란은 기대에 찬 눈으로 성을 노려보았다.
수십 년간 계속되던 전쟁은 마인들을 계속 탄생시켰고 그들의 지배자인 베트란이 나타나자 그의 지배에 들어가며 활발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버서커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인들은 연합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황토인이 하급 마인들에게 쓰러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검은 안개의 도움을 받기에 일반 병사들이나 기사들에게는 위협적일지는 몰라도 베트란이 들은 황토인의 능력이 사실이라면 일천 명의 하급 마인들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렇지만 베트란이 원하는 황토인의 실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흐흐흐. 좋아, 좋아.”
베트란은 오른손에 쥔 잔을 입가로 들이켰다. 포도주 속에 담겨 있는 혈향이 코에 맴돌자 그의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병사들의 보고를 받은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내성의 지휘소에 올라 성밖에서 밀려오는 검은 안개를 보고 있었다. 지면을 모두 덮고 있는 안개의 공포를 잘 아는 그들은 외성 정문의 성벽 위에 있는 무혼의 뒷모습에 눈길을 돌렸다.
무혼의 양쪽에는 성벽을 따라 엘프들이 활을 들고 검은 안개를 노려보고 있었고 성문의 안쪽에는 긴 자루가 달린 도끼를 든 드워프 전사들이 입가의 수염을 떨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드워프들의 뒤로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도 보였다.
“오늘의 전쟁에서 기나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될까요?”
한 지휘관의 이야기에 카세팜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무혼이 이미 두 명의 중급 마인들을 쓰러뜨렸다는 것을 적들도 잘 알 것이다. 그것은 무혼이 마인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아직 살아 있는 마인들은 무혼의 능력을 직접 확인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모든 마인들을 이 성으로 모은 것이 아닌가?
후작의 생각에는 무혼의 능력을 확인한 후에 중급의 마인들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공격을 하는 것은 무혼 경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중급 마족을 소멸시킬 정도의 무혼 경이니 적들의 공격이 그만큼 대단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지휘관들은 다시 앞쪽을 보았다. 다른 때의 전쟁이었으면 지휘관들은 각자의 부대를 이끌기 위해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겠지만 검은 안개가 전선을 뒤덮은 후 전략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적들이 검은 안개로 성 주위에 깔고 성을 넘어오는데 무슨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휘하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평소 훈련시키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겨야만 합니다.”
한 지휘관이 나직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모든 지휘관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혼은 정문 위의 성벽에서 검은 안개를 노려보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지만 검은 안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인의 것이었다.
이제까지 상대한 중급의 마인에 비해서는 훨씬 약한 기세였으나 눈앞에 보이는 전체에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많은 수의 하급 마인들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했다.
안개 오는 것이 보인다고 했을 때 카세팜 후작이 들려준 말을 기억하는 무혼은 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안개들보다 더 기분이 나쁘군.”
무혼의 옆에 있던 투돌 장로는 그의 도끼를 쓰다듬으며 툴툴거렸다.
“마인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무혼의 말에 투돌 장로와 머레이 장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개 속을 보고자 하였으나 아직은 검은색으로만 보일 뿐 그 안의 형체는 구분할 수 없었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중급 마인은 느껴지지 않지만 많은 수의 마인의 기운으로 볼 때 수백이 넘는 하급 마인들이 몰려오는 듯합니다.”
“성의 모든 사람들을 죽인 게 저놈들인가 보군.”
머레이 장로는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검은 안개를 잘 없애만 준다면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게야.”
활을 준비하고 있는 엘프들의 앞에는 성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궁사들이 있었다.
만일 검은 안개가 그대로 저들을 덮치게 된다면 병사들과 엘프들 그리고 드워프들은 안개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무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이네스의 마법 지팡이에서 검을 뽑았다. 엘라드가 준 백색의 신검을 훑어보던 무혼은 안개가 백 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내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카세팜 후작은 그에게 어느 정도 힘을 숨길 것을 권했다. 이 공격 뒤에 있을 중급 마족과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중원에서도 자고로 3할의 힘을 숨기라고 했었지.’
처음 미타모할 성에 왔을 때 그가 봤던 성내의 거리를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안개를 노려보던 무혼은 안개가 성벽에서 삼십여 미터까지 접근을 하자 검을 겨누며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아!
간혹 맹수의 조용하고 위협적인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검은 안개는 갑자기 큰 괴성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혼은 그의 앞을 가로막는 마인을 반으로 가르며 그를 둘러싼 마인들의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그의 내력 운용에 흑명공이 합해지며 무혼의 눈이 맑은 검붉은 색을 띠기 시작하고 피부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백색의 신검도 무혼의 눈빛과 같은 검붉은 기류로 검날을 휘감으며 무혼의 의도에 호응하여 앞을 막는 모든 것을 가르기 시작했다.
하급 마인들은 무혼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쉴 새 없이 그를 몰아붙이고자 하였지만 무혼은 그의 진로를 막는 마인들을 가르며 검은 안개를 명혼흡정술(冥魂吸精術)의 구결에 따라 유도하기 시작했다.
명계의 기운을 이용하는 명혼흡정술이 흑명공과 합해지자 검은 안개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트란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마인이 아닌 자가 검은 안개를 저렇게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서 황토인은 분명 검은 안개를 이끌어 검에 모으고 있었고 검은 안개는 그의 검에서 강하게 농축되며 하나의 무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흐흐흐흐흐.”
베트란은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와 그에 맞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황토인을 상대한다면 그의 빙의는 더욱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어쩌면 황토인의 목을 베는 순간 그는 빙의가 끝나 완벽한 마인이 될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전멸할지도 모를 일천의 마인들쯤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황토인의 능력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면 두 배의 마인들이 조각이 난다고 해도 그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황토인만 쓰러뜨리고 난다면 검은 안개 속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많은 혈향 속에서 새로운 하급 마인들이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다.
“호레이스의 의견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는군.”
그의 옆에 있는 중급 마족도 공감한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무혼의 모습에 눈을 뗄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