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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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19화
119 제갈두휘의 길(2)
그러한 모습을 보던 제갈두휘의 머리에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제갈세가를 습격했던 라마혈교가 제갈운혜를 납치한 후 서쪽으로 향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제갈세가에서 서쪽으로 칠천 리 넘게 간다면 서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제갈세가가 있는 산동이 중원의 동쪽에 치우쳐져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그 길은 정파의 지역을 모두 지나는 길이었다.
게다가 그 긴 길을 갈 생각이라면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납치한 그의 여동생을 혼절시킨 뒤 상자 같은 곳에 몰래 숨겨서 가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그들은 제갈운혜를 단순히 중독시켰을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갔었다.
제갈두휘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납치사건 때의 일을 다시 더듬어보니 그들의 행적으로 보면 멀리 가게 될 모습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목적지가 서장이 아닌 산동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숨어 있고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상대들을 보아하니 대단한 무공을 지닌 자들은 아닌 듯했다.
“만일 제갈세가를 습격한 자들의 무공실력이라면 이렇게 허술하게 주위를 경계하지도 않을 것인데…….”
문득 제갈두휘는 오히려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주위를 다시 한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니면 처음 생각보다 저들이 별 볼 일 없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장에서 오천 리가량 떨어진 곳이라는 것과 조금 전에 들렸던 문파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점 등을 생각해 보면 그들 뒤를 캐보는 것이 좋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체를 하다가 무림맹의 집법부에서 파견 나온 무사들에게 잡힐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큭. 무엇을 망설이나? 제갈두휘. 언제부터 그렇게 죽음과 처벌을 두려워했느냐. 서장이 꾸미는 흉계가 중원에 밀어닥칠 때 제갈세가도 함께 휘말린다는 것을 잊었느냐?’
생각이 계속되면서 제갈두휘는 쫓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을 해냈다.
제갈세가의 부흥. 그 하나를 위해서 친형과도 같은 남궁장천을 사지로 내몰 결심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는 도주를 포기하고 서장의 사람들을 쫓을 결심을 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행동한 적은 없다. 처음부터 목숨이 아까웠다면 무혼을 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도주하는 것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죽음이 싫었기에 도주할 뿐, 제갈세가에 해가 될 일을 막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걸을 결심을 하고 있던 그였다.
‘가보자, 그들이 어떤 일을 획책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
결심을 굳힌 제갈두휘는 품에서 붓을 하나 꺼냈다. 그 붓에 묻어 있는 것은 제갈세가 특유의 만리향이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제갈세가의 만리향에 단련된 두휘의 코가 그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단지 누구에게 이것을 묻히느냐에 따라서 제대로 된 추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정하는 것은 쉬웠다.
바쁘게 붓을 놀리는 것을 보니 저자가 중요한 곳으로 가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그자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만리향을 묻힐 방법을 강구했다.
바늘이나 가느다란 암기로 날려 보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겠지만 암기를 사용할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무기들이 가지고 있는 예기(銳氣)다. 삼류의 무인이라 해도 예기가 가지는 서늘함을 눈치채기 쉬울 터였다.
그러나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곧 그에 대한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한 시진(두 시간)에 한 번씩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도 바람에 실려 온 마른 나뭇잎들이 날아들었고 그들은 손을 들어 머리와 옷에 붙은 나뭇잎들을 털어내었다.
눈앞의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제갈두휘는 만리향이 묻어 있는 붓을 들어 나뭇잎의 앞뒤에 전(田)자를 적은 후 목표로 한 자의 뒤쪽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거의 일각의 시간을 들여 그가 있는 자리의 뒤쪽으로 이동한 두휘는 나뭇잎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제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나뭇잎들이 떨어진다면 그때 함께 날리면 될 것이다.
그 자세로 이각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다. 긴장감에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듯하였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얼굴에 에는 듯한 공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던 바람이 불어왔다.
만리향을 묻힌 나뭇잎이 제갈두휘의 의지에 따라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때 조금이라도 눈치를 챈다면 오히려 쫓기게 될 사람이 제갈두휘가 될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나뭇잎은 두휘가 원하는 자의 등에 무사히 붙었고 그자는 등에 붙은 나뭇잎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저어 나뭇잎을 떨어뜨렸지만 이미 만리향의 흔적은 남아 있을 터였다. 그 후로도 반 시진 정도 이야기를 더 나눈 그들은 삼삼오오로 헤어져 이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갈 때 두휘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이제 추적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비록 만리향을 붙였다고 하지만 언제 놓칠지는 모를 일이었기에 그들이 멀리 보이는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고 있던 두휘는 간혹 놓쳤을 때 만리향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서장의 인물들은 뒤에 제갈두휘가 추적하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한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물론 제갈세가의 만리향이 몸에 있는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쫓던 제갈두휘는 그들의 무공실력이 상당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무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로 보이진 않았다.
그들이 숲의 외진 곳에 접어들자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에 당황한 두휘가 주의를 기울이며 다가가자 그의 감각을 조여 오는 것이 있다.
‘진식?’
태어나면서부터 진식을 배우고 자라온 그였기에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 진식이 주위에 있을 때 나타나는 감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진식이라면 그가 당황할 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진식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떠한 느낌과도 달랐다. 그 말은 처음 겪는 진이라는 의미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지간한 진식은 모두 안다고 자부했던 그로서도 알아내기 힘든 난해한 진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법이 포함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대체 누가 이런 진식을 만든 거야?”
그들이 사라진 바위를 만져보았지만, 보통의 바위였다. 기관 장치가 되어 있나 하는 마음에 바위를 샅샅이 조사하였지만 별다른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자 두휘는 그곳에 숨어서 다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두휘가 쫓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서장어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두휘가 쫓던 사람들과 한패일 것이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들 역시 바위에 다가가더니 망설이지 않고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서도 바로 통과했다.’
그 모습을 다시 몇 번이고 생각해 보던 제갈두휘는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 눈을 감고 걸음을 내디뎠다.
머릿속으로는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면서 내딛자 그의 발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눈을 떠본 제갈두휘는 그가 바위의 반대쪽에 거의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위를 완전히 지나 다시 손을 대어보니 바위는 있었다.
그러나 제갈두휘는 한 번의 통과로 이곳에 펼쳐진 진식을 통과하는 방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 쫓고 있는 자들도 대단한 무예를 지닌 것도 아니었기에 처음 쫓던 자보다 훨씬 쉽게 그들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제갈두휘는 단지 그들의 행로를 그대로 따라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장 사람들의 뒤를 쫓아 산모퉁이를 돌던 두휘는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신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라마 불교는 계속 윤회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라마 불교의 라마는 ‘스승’을 뜻한다. 물론 이 스승은 자신을 직접 가르친 스승뿐만 아니라 책이나 다른 기록 등을 통해 가르침을 내린 스승도 포함된다.
그렇기에 라마승들은 스승을 그린 탱화를 걸어두고 법회를 열기도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신상은 결코 인간으로 보기 힘들었다.
기본적으로는 라마승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귀 위에 있는 양의 뿔과 이마 위에 솟아난 뿔 그리고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기다란 송곳니는 그가 결코 인간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게다가 어깨는 털이 수북이 덮여 있었고 아래로 내린 손은 기다란 손톱이 매달려 있다. 그리고 허리 부분에서 앞으로 나온 형태는 꼬리가 분명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저러한 모습을 가진 존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왜국의 귀신 중에 비슷한 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상 앞에는 돌로 쌓은 높은 제단(祭壇)과 낮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단을 살피던 두휘는 그 제단에서 출발한 검은 줄이 신상의 두 손을 지나 세 개의 뿔을 거쳐 하늘로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대체 저 줄은 뭐지? 무엇인데 제단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일까? 아닌가? 내려오는 것인가?’
제갈두휘가 산속에 몸을 숨기고 제단을 주시하고 있는데, 모자가 달린 망토와 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제단 위에 나타났다.
그러자 어디에서 데리고 온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줄에 묶여 끌려왔다. 신상의 앞에 서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줄에 묶여 끌려온 자 중 몇 명을 높은 제단과 낮은 제단 위에 올린 후 기묘한 춤을 추며 큰소리로 날뛰고 있다.
두휘가 보기에는 그것은 어떠한 제사 의식을 지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들에게서 눈길을 돌려 다른 곳을 살펴보던 그는 높은 제단 위에 올려진 사람들이 모두 여성들이며 낮은 제단에 올려진 사람들은 남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들은 중원의 여성들과 몽골의 여성들이 섞여 있었고 대부분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로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녀들이 묶여 있는 높은 제단이 점점 검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의식을 지내는 자들이 높은 제단 앞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항아리들을 놓자 검은 안개는 그 항아리들까지도 감쌌다.
“까아아아악.”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명의 비명이 끝나면 다시 다른 소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밑에 묶여 있는 소녀들은 겁을 먹은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양팔과 몸이 묶여 있는 그녀들로서는 도망갈 수도 없었고, 공포감을 견디다 못해 간혹 혼절하는 소녀도 보였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불쾌한 존재감을 내는 무엇인가가 흐물거리며 항아리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오직 눈빛만이 흐르고 있었지만, 눈빛에 숨겨진 광폭함은 멀리서 보고 있는 제갈두휘의 등줄기도 서늘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