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38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38화
138 무혼과 아이네스(1)
전장은 조용했다. 땅을 가르며 존재감을 드러냈던 복수의 마신이 무너지며 소멸되어가자 동맹군의 병사들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마신의 인간계 강림. 동맹군들은 그들의 신화를 보았고 마신의 강림으로 가이오스트의 전쟁은 동맹국의 승리가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으나 곧이어 무너지는 마신의 모습은 그들의 정신을 공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투신이신 복수의 마신님이 소멸되시다니…….”
“말도 안 돼…….”
어둠의 신전에는 마신들이 전쟁을 벌이는 그림이 빠지지 않고 그려져 있다. 무시무시한 힘을 분출하는 마신들 중 전쟁의 선봉에 등장하고 있는 일곱 투신은 마계의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그들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동맹군의 투지는 바닥을 드러내었다.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다. 땅을 가르며 나타난 마신의 존재감은 마신과 상극인 천신들을 추종하는 연합군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런데 그저 앞에만 있어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게 만든 마신의 존재감이 일시에 사라지자 일종의 허탈감이 생겨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스스스스스스.
쉬이익.
마신이 뿜어내었던 검은 안개가 지금 회오리를 일으키며 한 곳으로 휩쓸리는 모습을 보던 동맹군과 연합군의 얼굴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검은 안개의 회오리 중앙에 보이는 황토인.
7클래스에 도달한 공주가 자신과 맞바꿔 불러왔다는 무적의 전사는 옷이 너덜너덜하였으나 굳건한 모습으로 대지를 밟고 그의 검에 어둠의 안개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마신이 강림하여 뿜어내었던 마계의 기운이니만큼 새로 뿌려진 검은 안개의 기세는 대단했다.
마신은 소멸했건만 황토인은 아직도 싸울 여력이 남아있다. 설혹 그가 지치고 힘이 빠져 지금 보이는 모습이 허세라 해도 마계의 투신을 쓰러뜨린 존재라면 손짓 한 번으로도 눈앞에 보이는 동맹군을 쓸어버릴지도 모른다.
줄어드는 안개만큼 동맹군의 공포는 커져갔고 그 공포는 병사, 기사, 하급 마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번져갔다.
그들이 공포에 질려가며 말없이 보는 동안에도 안개가 검 한 자루에 응축이 되자 매서운 기세를 줄기줄기 뽑아낸다. 마신의 등장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었던 대지가 또다시 균열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구구구구궁.
땅의 울림이 신호인 듯 동맹군의 병사들이 일제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캉!
점점 크게 울리는 땅의 진동은 바로 뒤에서 황토인이 다가오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며 동맹군의 모든 병사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무혼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제껏 상대가 있으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 모인 검의 기운을 뿌릴 곳이 없다.
무기와 갑옷까지 벗어 던지며 도망치고 있는 동맹군의 병사들에게 던지고 싶지 않았고 그저 땅이나 하늘로 쏟아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마신이 직접 뿜어낸 기운이라 그런가?”
곤란한 표정으로 검을 보고 있으니 그의 뒤로 나타난 인영이 있다.
“엘라드.”
“하하, 마계의 투신을 쓰러뜨리다니, 무혼 경과 아이네스 공주님께서 함께 있을 때는 관조자의 한 명이라고 자랑할 수 없겠어요.”
그건 엘라드의 진심이었다. 마계의 투신이라면 엘라드가 각성을 하여 정식 관조자가 되어도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인간의 몸으로 소멸시키는 것을 보니 넉살 좋은 엘라드도 질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난처한 표정인데요?”
“이 기운을 없앨 방법을 궁리 중입니다.”
“흐음.”
동맹군이 오합지졸처럼 도망을 가고 있어도 연합군이 쫓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무혼의 검에서 맴도는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이다.
거대한 대지마저 비명을 지르게 할 정도의 기운의 존재감을 피해 오히려 뒤로 물러나 멀리서 무혼을 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마기가 농축되어 감도는 백색의 신검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던 엘라드는 무혼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였다.
“내가 백색 신검을 돌려받는 방법밖에 없겠네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엘라드의 말에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원래의 주인이었고 그에게서 빌려 쓴다고 생각하고 있던 무혼이었기에 결정이 빨랐다.
한동안 궁리를 하던 엘라드는 자신의 망토를 들어 올리더니 망토 속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손을 휘젓더니 눈에 익은 우산을 꺼냈다. 그리고 우산의 자루를 당기니 백색의 신검과 비슷하게 생긴 검이 하나 뽑혀 나왔다.
“그곳에도 검이 없으면 허전하니까. 이 검과 바꿔요. 이래 봬도 최고의 명장 드워프가 만든 명검이에요.”
천진난만해 보이는 엘라드의 모습에 무혼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검의 주인이라 돌려주는 것인데 엘라드는 무혼의 검과 바꾸기라도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엘라드, 고맙습니다. 제가 계속 귀찮게 하는군요.”
“아니요. 큰 도움을 받았어요. 보세요.”
엘라드는 무혼의 눈앞에서 하프를 뜯기 시작했다. 하프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혼의 예리한 감각은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엇일까?’
- 흑마나가 보여요.
아이네스의 말처럼 하프의 현에 흑색의 기운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현을 뜯으니 현과 현 사이에서 가느다란 흑색의 마나가 보였다.
“무혼 경과 아이네스 공주님 덕분이에요. 두 분이 마지막에 펼쳐 보인 모습에서 저는 저의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죠. 이 흑마나가 그 증거입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돌아갑니까?”
“아니에요. 아직 수백 년은 더 떠돌며 많은 것을 배워야죠. 내가 백마나탄뿐만 아니라 흑마나탄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예요. 하지만…….”
끝말을 흐린 엘라드는 무혼의 눈을 보았다.
“잠시 보고 오는 것도 괜찮겠죠.”
싱긋 웃은 엘라드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엘라드의 손에 있는 검 자루와 무혼의 손에 있는 검 자루의 끝부분이 부드러운 느낌으로 바뀌고 검날이 뽑혀져 나왔다.
그리고 검날은 공중을 날아 교체되어 다시 붙었다. 무혼이 잠시 살펴보았지만, 원래의 자리인 듯 어색한 곳은 없었다.
“대단하군요.”
“호호, 이 정도는 가능하답니다.”
우산을 옆에 끼고 마계의 기운이 맴도는 검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엘라드의 앞에 그가 통과할 수 있을 크기의 회색 타원이 생겨났다.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나중에 봐요.”
회색의 기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엘라드가 사라지자 타원도 곧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아이네스도 중원으로 돌아갔다.
강렬한 기운의 존재감이 사라지며 대지의 진동도 멈추자 기세를 피하고 있던 연합군의 병사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잠시 둘러보았으나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환호성을 지르며 이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진 성에서 뛰어나왔다. 그 병사들의 앞에 카세팜 후작이 무혼을 향해 활짝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혼 경, 사랑하네.”
쿨럭.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는 무혼을 덥석 안은 카세팜 후작은 노구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무혼을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카세팜은 마신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마신의 존재감에 눌려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벌레가 밟혀 죽듯이 생을 마감할 것이라 예감했었다.
그러나 가이오스트의 기사들보다도 오히려 덩치가 작은 황토인이 마신을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을 보았다. 무모한 짓. 그렇게 생각했으나 황토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마신을 소멸시킨 것이다. 그의 남은 평생을 목말 태우라고 시켜도 후작은 그 말을 따를 용의가 얼마든지 있었다.
“황토전사 만세! 빛의 연합군 만세!”
미타모할 성의 앞에 있는 평원에서는 연합군들의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나긴 대륙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무혼에게 저항할 방법이 없는 동맹군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붉은 기운이 맴도는 하늘과 붉은 모래바람이 날리는 대지가 한 존재의 분노에 찬 절규 소리에 떨리고 있다.
어둠의 존재 중 최고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마신 아코마사본의 절규는 그의 존재에 호응하는 마계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제약이 많은 인간계라고 하나, 마신이 어떻게 소멸될 수 있단 말이냐?”
대마신의 고함 소리가 마계의 중앙에 있는 마신성에 쩌렁쩌렁 울렸다.
복수의 마신, 콜레나루트가 소멸당하면서 이제는 서른여섯이 남은 마신들은 모두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마신의 야심 찬 계획이 완전히 무너져 그의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기나긴 절규를 하고서 조금 속이 풀린 아코마사본은 그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인간계에…….”
콰콰콰콰쾅.
갑자기 마신성의 한쪽이 무너지며 서른여섯 마신과 함께 마신성의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처박힌 대마신은 몸을 일으키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지배가 절대적인 마계에서 설혹 마신성이 무너진다 해도 바닥에 처박힌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코마사본.”
“어느 놈이 감히… 헉!”
대마신은 그의 위쪽에 떠 있는 창조신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가 창조신을 본지 어언 일만 년이 넘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존재감은 아직도 여전했다.
‘제길 저놈만 없어도…….’
하지만 눈에 핏발만 세울 뿐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었다. 변치 않은 저 존재감으로 보건대 마신들을 모조리 이끌고 함께 덤벼들어도 창조신을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대체 왜 나타난 거지?’
게다가 천여 년 전에 일으킨 신마전쟁 때도 보좌하는 신을 보내어 싸움을 중지시켰을 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창조신이었는데 오늘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대마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에 가득했던 노기가 사라지자 대마신의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조신의 뒤에 있는 존재들도 대마신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잘못하면 소멸될 수도 있겠구나.’
대마신의 눈은 창조신과 보좌신들, 그리고 빛의 신들과 관조자들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없어져 갔다.
“너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바를 거부하고 반항을 하는 아이였지.”
“젠장, 마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그런 세상이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아!”
“그래서 모든 것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이었느냐?”
“그게 뭐 어때서!”
“아무래도 벌을 좀 받아야겠구나.”
“누가 벌 따위를 겁낼 줄 아나?”
대마신과 서른여섯 마신들은 기세가 등등했으나 창조주의 다음 말에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내려준 적이 없었던 벌이다. 소멸시키지는 않겠다만 소멸의 아픔은 한 번쯤 느껴봐도 될 듯하구나.”
신에게 최고의 공포인 소멸은 존재가 소멸하기에 공포가 아니다. 그 소멸 과정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고통은 신마저도 자신을 잊고 비명을 지르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물론 소멸된 신은 이 자리에 없기에 고통을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소멸하는 신을 본 다른 신들은 그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그런!”
“이번은 처음이니 고통의 시간도 반, 고통의 크기도 반만 부여하도록 하겠다. 만약 내가 다시 너를 찾게 된다면 그때는 영원한 소멸의 고통 속에 널 던질 것이다.”
“이, 이익! 모두 저놈을 공격해!”
대마신과 서른여섯 마신은 창조신을 향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창조신은 가소로운 듯 그들을 내려다본다.
“오호, 날 보고 저놈이라, 저것들을 모두 잡아라!”
창조신의 비호를 받은 신들은 본래의 신력보다 몇 배의 신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창조신의 의지에 따라 마신들은 그들의 본래의 신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극명히 차이가 났다.
“제길, 빌어먹을! 끄아아아아아악!”
마계의 하늘에서 대마신 아코마사본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