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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0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화

004. 결의

 

 

이 세계에서의 신분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왕족, 귀족, 평민.

 

그리고 노예.

 

안톤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장 밑바닥 신분이었다.

 

대역죄를 저질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모는 옥살이 중에 안톤을 낳았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대기하던 마법사에 의해 노예마법이 몸에 새겨졌다.

 

마법적인 제약으로 구속된, 철저하게 주권이 박탈당한 삶.

 

일반적인 노예들과는 조금 다른 경우다.

 

보통의 노예들은 이러한 마법각인이 없다.

 

인두로 지져서 낙인을 찍거나 노예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전부지, 이러한 마법적 제약까지 부여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단순 손익의 문제다.

 

일반 여성 노예를 하나 구입하는 데 평균 1골드가 든다. 그런데 마법각인을 한 번 새기는 데 드는 비용은 수십 골드가 넘는다. 근데 누가 그런 수지 타산에 맞지 않는 일을 하겠는가.

 

무엇보다 노예각인마법은 어린 아기의 몸에만 시술이 가능했다.

 

나이가 한 살만 더 먹어도 시술에 들어가는 마법시약이 터무니없이 증가하고, 서너 살만 되어도 아예 각인술이 먹히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예각인마법은 극히 드물게 시행됐고 그마저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들에 한해서, 그 자식에게까지 연좌제를 물어 형벌의 의미로 가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안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부모의 이름도 얼굴도 신분도 모른다. 다만 부모란 작자들이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그 자식인 자신이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원망하다 못해 체념했던 안톤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지금.

 

간만에 이 지독한 굴레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번 생마저 그렇게 살 수는 없어.’

 

그렇기에 발버둥이라도 쳐 보려고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또다시 노예로 살라고 과거로 되돌려 보낸 것은 아닐 터.

 

단지 죄인인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는 것이, 한 번의 생으로는 차마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아닐 것이다.

 

안톤은 그렇게 믿었다. 그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방도를 찾았다.

 

우선 자신이 지닌 것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미래에 대한 정보.’

 

역병, 반란, 대전쟁…….

 

암만 노예라 해도 간략한 미래의 사건들은 알고 있다.

 

혹여 안톤이 상인이라면 모를까, 노예인 지금 그것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톤은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숱한 실전 경험. 검술에 대한 지식. 코르보 백작가의 비전 마나 연공법…….’

 

평생 검을 쓰는 일을 해 왔다고, 떠오르는 것 또한 그러한 것들뿐이다.

 

‘나는 전생의 나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럼 이전보다 강해진 것으로 무얼 할 수가 있을까.

 

안톤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술주 전이의 의식.’

 

일반적인 노예와는 다르게, 노예각인이 새겨진 노예는 그저 돈만 받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술주의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별도의 의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의식 기간 동안엔 마법적인 제한이 일시적으로 해제된다.

 

‘만약 그때 술주를 죽여 버리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이론상 성공만 한다면 마법각인은 그대로이되, 술주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다만 탈주 노예라는 딱지가 붙고 추격자들이 쫓아오겠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도주할 실력만 있다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사실상 각인마법에 얽매인 노예가 탈출을 하고자 한다면 기회는 오로지 그 시기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술주 전이 의식은 엄중한 경계 속에서 치러지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안톤은 전생에 콜로세움에 팔려가던 당시를 떠올렸다.

 

‘마나 봉인 구속구도 없었고 엄청나게 허술했었지.’

 

수갑으로 팔다리를 묶고 주변에 있던 검투사들 몇몇만이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마나도 없는 노예 검투사 훈련생 하나에게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리라 여긴 것이다.

 

실제로도 그것으로 충분하였고 말이다.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만 같았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이라면 가능해. 마나 유저 중급만 되어도 수갑 따위야 가볍게 끊어 버릴 수 있어……!’

 

전생에서 배운 코르보 백작가의 비전 마나 연공법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검술을 비롯한, 숱한 실전으로 갈고닦은 전투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구속구만 끊어 버린다면, 주변 검투사들의 경계를 뚫고 술주를 죽이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다.

 

‘그러려면 누구한테도 들켜선 안 돼.’

 

배운 적도 없는 마나 연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 연유에 대하여 샅샅이 캐물어 올 것이다.

 

그리고 끝내 과거로 돌아왔다는 진실 또한 얘기해야만 하게 될 테고.

 

그런 상황까지 치닫게 되면 사실상 도망갈 길은 모두 막혀 버린다고 보면 된다.

 

‘절대 놓아줄 리 없으니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래의 사건들을 알고 있는 노예를 다른 누군가에게 팔기보다 이용하려 할 터다.

 

설사 이용 가치가 다해서 술주 전이 의식이 치러진다 해도, 안톤이 벗어날 엄두도 못 낼 만큼 만전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일 테였고.

 

‘하지만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평범한 노예를 연기한다면, 그리고 힘을 키우다가 전이 의식 때 술주를 죽일 수만 있다면……!’

 

‘자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몸이 오소소 떨려 온다.

 

안톤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강해져야 해.’

 

최소 마나 유저 중급.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추격자들을 따돌려야 했으니,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좋다.

 

전생의 경험과 코르보 백작가의 비전 마나 연공법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생과는 비교도 못 할 속도로 강해질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두 가지나.

 

앞서 말했듯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시간이 안톤의 편이 아니라는 것.

 

‘이제 3주가 남았나.’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훈련에 복귀해야 한다. 온종일 연병장에서 검을 휘두르다 보면 안톤이 진짜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 터다.

 

현재 안톤에게 부족한 것은 마나의 보유량이지, 깨달음이나 검술이 아니었으니까.

 

‘하루 종일 앉아서 마나 연공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기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세를 잡으려는 때 같은 방을 쓰는 훈련생, 레온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안톤은 왜 항상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명상을 하는 거야?”

 

“그냥 생각하는 게 좋아서. 오늘도 조용히 해 줄 수 있지?”

 

“알겠어. 나도 이제 쉬어야 하니까. 이제 불은 끌게?”

 

입바람에 초가 꺼지고, 장내는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옆방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약간의 번잡함만 제외한다면 꽤나 조용하다.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그러자 고요한 어둠이 그를 찾아왔다.

 

어느새 모두가 잠들어 숨소리만 가득한 이 밤공기에, 안톤의 규칙적인 호흡 또한 섞이기 시작한다. 안톤의 의식이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 * *

 

몸을 추스르라고 주어진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안톤은 다시 훈련에 복귀했다.

 

하압! 하압!

 

땡볕 아래서 열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훈련생들.

 

그 속에서 안톤도 조심히 검을 휘둘렀다.

 

‘못하는 척 연기하는 것도 꽤나 힘들군.’

 

그렇다고 대충 할 수는 없다.

 

무의식중에 예전 실력이 나오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기에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뒤에서 끈적끈적한 시선이 전해지고 있었다.

 

‘교관의 성정상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시선 속에서 명백한 악의가 느껴졌다. 그 시선의 주체는 교관 잭 레보닌이었다.

 

‘앞으로 상당히 귀찮아지겠군.’

 

안톤은 지난 생에서 겪었던 잭 레보닌이란 인물에 대하여 떠올렸다.

 

속은 좁고 뒤끝은 긴, 전형적인 편협한 인물.

 

교관이 지닌 권한이 특히나 막강한 이 검투사 양성소의 특성상, 그에게 찍힌 훈련생은 대개 생활이 엄청나게 고달파지기 마련이었다.

 

“그만!”

 

그간 뒤에서 관망하던 훈련 교관 잭 레보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훈련생들의 동작을 멈춰 세웠다.

 

“오늘은 일대일 대인전 연습을 하도록 하겠다. 짝을 지어 주지.”

 

잭의 지명에 따라 하나둘 짝이 지어진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실력에 맞게 분배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 빨간 머리! 네 상대는, 음…… 앤더슨이다!”

 

안톤의 상대로 호명된 앤더슨은 입소한 지 어언 4년 차로 잭이 가장 아끼는 훈련생이었다.

 

그를 아끼는 이유는 앤더슨이 잭을 특히 잘 따른다는 것도 있었지만, 눈치가 빠르다는 점도 한몫했다.

 

앤더슨은 잭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대련’이라는 단어에 ‘반쯤 죽여 버려.’라는 속뜻이 숨겨져 있단 걸 알았다.

 

‘엄청나게 크군…….’

 

안톤은 앤더슨의 앞에 섰다.

 

얼추 보아도 2미터는 될 법한 거구의 소유자.

 

아무리 날이 없는 수련용 철검이라고 한들, 그의 손에서 휘둘러진다면 그것은 충분히 흉기였다. 제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지는 일 따위 예삿일도 아니리라.

 

‘나한테 이런 녀석을 붙여 주었다는 건…… 그냥 두들겨 패겠다는 얘기군.’

 

신체적 조건은 그러려니 하여도 4년 차와 4개월 차의 훈련생의 대련.

 

누가 봐도 불공평한 배정이었지만, 일개 훈련생이 피력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악감정은 없다.”

 

꽤나 과묵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련이 시작되기 무섭게 앤더슨은 공격을 해 왔다.

 

‘생각 이상으로 저돌적인 녀석이군.’

 

날아드는 검격을 힘겹게 막아 내며, 아니 힘겹게 막아 내는 척을 하며 안톤은 뒤로 물러났다.

 

마치 멧돼지 같은 공세를 펼쳐 오는 앤더슨을 보며 안톤은 잠시 이전 삶을 떠올렸다.

 

‘나도 저랬을까?’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전생에서 안톤은 앞에 있는 앤더슨처럼 잭의 편애를 받는 훈련생 중 하나였다.

 

안톤은 그저 검이 좋아 항상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했고, 재능이 있어서 실력도 금세 늘었다. 게다가 노예각인마법 덕에 누구보다 교관에게 복종적이었다.

 

교관의 마음에 쏙 들어가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일이다.

 

“윽!”

 

무겁게 내려치는 철검을 막으며, 안톤은 힘에 부친 듯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사실 검의 무게를 옆으로 흘려 내었기에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안톤은 고개를 들었다.

 

잠깐 훑었을 뿐인데 허점이 적어도 몇 개는 보인다. 그 허점 중 아무 데나 검을 내뻗기만 한다면 이 거구의 훈련생은 그대로 쓰러지리라.

 

허나 안톤은 겁먹은 표정으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한 번 엉망진창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나…….’

 

이겨선 안 된다.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적당한 녀석을 붙여 놨으면 겨우겨우 밀리는 척하면서 시간이라도 끌어 봤을 텐데, 유난히 눈에 띄는 녀석을 붙여 놨다. 앤더슨을 상대로는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 다시 드러누우면 그 시간 동안 마나 연공을 더 할 수도 있어.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합리화하며 이점을 찾아내려 하던 안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무자비한 앤더슨의 검격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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