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화
002. 죽음
나는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맑은 하늘이 한가득 눈에 들어온다.
정말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니, 도통 실감 나지 않는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본 결투에 어떠한 불명예 행위도 스스로가 먼저 금할 것을 지금 이 순간 굳게 맹세한다.”
의례적인 결투의 맹세가 끝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살폈다.
‘정말로 저 남자가 그 유명한 제오르 경이란 말인가?’
짧은 금발에 호쾌한 인상의 남자.
오러 마스터가 되었던 나이가 마흔이 넘었었다고 들었는데 외려 나보다 10년은 족히 어려 보이지 않는가.
체격은 나보다 훨씬 작은 편, 아니 평균을 놓고 보아도 조금 작은 편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오러 마스터에 이른 명인. 체격의 이점 따위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를 앞에 두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벽을 앞에 둔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그것은 내 모든 검격을 퍼부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아마 오러 유저가 되기 전에 만났다면 분명 그 무엇도 느끼지 못했겠지.
문득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허나 그 순간 발동된 노예각인마법이 그것을 막아냈다.
‘도망치지 말 것.’
나는 한 걸음조차 물러날 수 없었다.
그렇게 얼어 있던 내가 안쓰러웠을까.
먼저 말문을 터 온 것은 제오르 경이었다.
“지닌 악명에 비하면 상당히 얌전한 친구구먼그래. 껄껄!”
본나이에 맞는 말투겠지만, 암만 생각해도 젊어 보이는 얼굴 탓에 위화감이 물씬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결투가 시작되기 전에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싶은 듯 보였지만, 내게는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와 나의 격차만 크게 보일 테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닥의 의지마저 꺾이기 전에, 전력으로 부딪치고 싶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릉!
모든 미련을 털어 내듯, 단숨에 검을 뽑아낸다.
허나 아직 삶의 미련이 남았는지 이 순간에도 각인 명령어가 새삼 뇌리에 떠오른다.
‘도망가지 말 것.’
필사적으로 싸워서 이기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참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명령 덕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투의 시작을 알리듯, 나는 빠르게 다가가 정석적인 찌르기를 쏘아 냈다.
단순한 찌르기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함정을 담았다.
상대의 영역에 닿기 직전, 빠르게 쏘아지던 찌르기의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검로에 변화를 준다.
손목이 아닌 체중을 이용해서, 심장을 노리던 검의 궤도가 한없이 낮추어진다.
딱히 비기랄 것은 없다만 평소에 꽤나 유용하게 사용해 왔던 기술로, 삶을 담보로 걸고 검을 휘두르다 보니 생긴 잔재주였다.
챙!
허나 아쉽게도 이번엔 상대가 달랐다.
과연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노장이이라는 것일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비틀며 검을 쳐 냈다.
그런데.
가볍게 날아든 것치고 꽤나 묵직하다.
나는 느껴지는 반동을 이용해 적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이후 이어질 반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대응 자세를 재빨리 취하고 제오르 경을 봤을 때,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 내가 잘못 봤구먼. 병사들이 느끼기엔 충분히 악몽이었겠어. 그래, 한번 해 보세.”
눈빛이, 아니 분위기가 변했다.
본격적으로 제오르 경의 검이 파공음을 내며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결투의 초반부. 얼추 결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본인의 호기심 때문인지 오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 수, 두 수.
주거니 받거니 검격이 이어진다.
챙! 챙!
그가 찌르기를 하면 나는 피해 내고, 내가 베어 내면 그는 흘려 막는다. 내려치는 검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간 서로가 쌓아 올린 순수한 검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러던 중 문득, 나는 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즐겁다.
누군가에게 검을 휘두른다는 것이 이토록 즐거울 수 있다니. 살면서 처음으로 해 보는 경험이다.
제국의 세 번째 명인 클린턴 제오르.
직접 검을 맞대니 알겠다. 그가 지닌 명성 그대로의 사나이라는 걸.
마나 연공법만 붙잡고 끙끙거리던 여타 오러 유저들과 그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검격 하나하나에서 그가 지닌 검에 대한 이해가, 노력이 묻어 나오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한 수에서도 그가 지내온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적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검사로서 경외감이 먼저 생겨난다.
‘마지막에 정말 호사를 누리는군.’
노예로 태어난 주제에, 모든 검사들의 동경인 오러 마스터와 검을 맞추다니.
참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1분 1초라도 더 살아 있고 싶어졌다.
이 기적 같은 시간을 더욱 느끼고 싶어서.
허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일 뿐.
종장이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 불시에 오러를 피워 내어 기습한다면 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명령은 ‘싸워서 이겨라’가 아니라 ‘도망치지 말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전투의 승리는 필수적인 과제가 아니다.
“아쉽구나……. 너 같은 인재를 버림패로 사용하다니. 혹시…….”
처음으로, 제오르 경의 얼굴에서 감정이 비쳤다.
씁쓸함? 아쉬움?
너무 짧게 스쳐 간 감정의 편린이었다.
“……아니다. 부질없는 짓이려니.”
제오르 경은 무언가 생각을 하였다가 끝내 속에서 결론을 지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제오르 경이 일순간 하였을 생각이 무엇인지 말이다.
회유든 뭐든,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가 그를 인정한 것처럼, 그 역시 그랬던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분 좋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끝낼 시간이 온 것이 너무 아쉽군.”
“동감입니다.”
제오르 경의 검 위로 일렁거리는 붉은색 기운.
오러 마스터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완성된 형태의 오러.
나는 이에 압도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만의 오러를 뽑아냈다.
그의 것과는 다르게 그 크기도 작았고 안정성도 현저히 낮았지만, 이 역시 분명한 오러임에는 틀림없다.
순간 제오르 경의 얼굴에 또다시 감정이 일었다. 놀라움이었다.
“숨기고 있었던 건가?”
“어젯밤,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 함은 꼭 자네를 보고 쓰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뿌우우-.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각 진영에서 뿔피리를 불어 댄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아니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이제 가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검을 받아 낼 때마다 내장이 진탕되고 뼈가 가루가 되는 느낌이었다.
고작 세 번가량의 검격이 지나간 이후, 내 검은 반쪽으로 부러져 허공을 가로지른다.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땅에 무릎을 댄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혹여 살려 달라는 부탁이라 생각했을까, 그의 표정에 실망감이 엿보였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지막 일검, 당신의 최선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그제야 제오르 경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슬쩍 감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의 공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뒤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등을 스치고 지나 어디론가 향한다.
그 종착지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곳에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막대한 기운이 응축되고 있었다.
그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제오르 경은 한 그루의 거목처럼 흔들림 없이 고고했다.
“이런 자리에서 진정한 검사를 만나서 즐거웠네. 그럼 이만 쉬시게.”
나는 눈을 감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서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버텨 낸다.
이윽고 광활한 파도가 나를 향해 덮쳐 온다.
내 시야를 가득 뒤덮는 무섭도록 찬란한 붉은빛.
그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육체가, 아니 의식이 조각조각 해체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무의 존재가 되었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존재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의식의 한 조각만을 겨우겨우 붙잡은 채로 암흑세계를 유영할 뿐이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어떠한 동력이 느껴졌다. 그 힘은 왠지 모를 따사로움을 풍기며 나를 감쌌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어느 사이인가, 나는 따뜻한 힘에 의하여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파동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근원과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포근한 기운 역시 점점 강해졌다.
그 따사로움에 얼어붙은 몸이 녹듯이 잠들어 있던 감각과 기억이, 의식이 하나둘 깨어난다.
인지력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암흑세계의 구멍이라고 할까.
나는 그 비슷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뜨거워…….’
이곳은 어딜까.
마치 영혼이 불타서 한 줌의 재로 화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며 그 시간들을 감내하고 있던 때, 어느 순간 세상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