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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2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화

001. 회상

 

 

불빛 하나 없이 어둡고 적막한 막사.

 

그 고요함이 내 심장을 옥죈다.

 

일반 병사들에 비하면 호사롭기 그지없는 간부 전용의 1인용 막사일진대, 아직도 그런 특혜들이 어색하기만 하다.

 

이런 푹신한 침대보다는 풀밭에서 깔고 누운 침낭 속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그건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박힌 노예근성 때문일까.

 

그래, 나는 태어나길 노예로 태어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모님은 대역 죄인이었고 그 아이인 나에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예 딱지가 딱 하고 붙었다.

 

만약에 노예로 태어난 이후 11년간 살았던 영지가 귀족가의 정치 문제로 망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렇다 한들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했다면 조금 운명이 달랐을까?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쑥쑥 키가 컸다.

 

누구든지 나를 처음 본다면 또래에 비해 서넛은 나이가 많게 어림짐작하는 것이 보통일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기골이 남달랐던 나는 영지가 망했을 때 노예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 갔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

 

어떤 아이는 이제 막 글을 배울 시기에 나는 살기 위해 작디작은 손으로 검을 쥐었다.

 

참 다행스럽게도.

 

기초 훈련소에서의 첫날, 처음 잡아 본 검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타 아이들과는 다르게 소스라치는 칼날의 서늘함이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황홀했다.

 

영혼의 동반자를 만났음을 직감함으로부터 느껴지는 짙은 충족감이라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그 고양감에 사로잡혀 몇 날 며칠이고 온종일 심장이 쿵쾅거렸던 그날의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아련히 남아 있다.

 

나는 검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짝사랑만이 아니었다. 내게는 소위 말하는 재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교관의 명에 따라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양성소에서 3년이 지났을 때, 나는 그 어떤 검투병보다도 힘 있게 베어 내고 빠르게 찌를 수 있게 되었다.

 

교관도 그 사실을 인정했고, 나는 평균보다 이른 나이로 콜로세움에 입성했다.

 

연습과 실전은 달랐지만, 그곳에 적응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경기를 치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강해졌다.

 

상대의 공격로를 예측하여 회피하는 것이 점점 더 쉬워졌고, 보다 능숙하게 적의 허점을 찾아내어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연전연승.

 

콜로세움에서 유명세를 떨치면 떨칠수록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내 몸값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내 주인은 바뀌었다.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콜로세움에 구경을 왔다가 나를 발견한 코르보 백작 부인이 거액을 들여 내 소유권을 구입한 것이다.

 

주인이 바뀐 만큼 내가 하는 일도 바뀌었다.

 

콜로세움의 검투사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코르보 백작령의 시종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르보 백작 부인의 밤 시종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나의 검이 아닌, 그저 단단한 몸뚱이였을 뿐이다.

 

밤 시중 일 자체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타고난 요부인 코르보 백작 부인은 젊었고 미인이었으니까.

 

맛있는 음식, 질 좋은 잠자리, 좋은 옷.

 

그녀는 내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괜찮게 대해 주었다.

 

허나 자유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인형처럼 제멋대로 다루었다.

 

가끔 몸매를 유지하기 위한 운동 시간을 제외하면 늘 그녀에게 끌려다녔다.

 

식사를 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그녀의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자도 좋다는 말을 듣지 못하여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운 날도 있었다.

 

허나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점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이 친절히 내게 ‘검술 수련을 해도 좋아.’라고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검을 손에 쥘 수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당시엔 그 사실이 가장 갑갑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기에 상상했다.

 

공상 속에서의 나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니까.

 

그곳에서 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기억을 재구성하여 적들과 전투를 벌였고, 검술이라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괴리에 대하여 끝없는 물음을 던지며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현실 속의 나와는 다르게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내 검의 궤적은 무한히 자유로웠다.

 

그러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그 2년이란 세월이 수십 배 고통스러웠으리라.

 

방금 말하였듯이 2년이다.

 

2년 후, 상황이 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2년 후의 암살 사건, 그 이후라고 해야겠지.

 

영주성에 자객 무리가 침입했다.

 

목표는 백작 부인이었다. 내성을 그토록 쉽게 침입한 것으로 보아 명백한 내부자의 소행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마도 가문 내의 불화가 원인이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나는 그 일로 2년 만에 다시 검을 빼 들게 되었다.

 

그간의 상상 속 훈련 덕일까.

 

아니면 이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경험들이 몸에 남아 있던 덕일까.

 

손에 잡히는 검의 촉감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솟았다.

 

공상 세계에서 수천 번을 그리던 유려한 검의 궤적이 내 손으로 펼쳐졌을 땐, 둘도 없는 쾌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별다른 무력이 없는 아녀자가 목표였던 탓일까.

 

열 명이 넘는 인원이었음에도 나 혼자서도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 낼 수 있을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가고, 나는 영주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실력을 높이 산 것은 아닐 거다. 나보다 빼어난 기사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아마도 영주가 나를 높이 산 것은 다름 아닌 복종심.

 

추상적이기 만한 감정 따위가 아닌 노예각인마법으로 보증된 완벽한 복종이었으리라.

 

온갖 더러운 일을 시켜도 군말 없이 응하고, 비밀을 목숨처럼 지킬 수밖에 없는 충견.

 

그런 면에서 키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영주의 한마디로 내 주인은 바뀌었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에 따라 내가 하는 일도 바뀌었다.

 

전 백작 부인이 바득바득 부당함을 외쳐도 소용없었다. 이미 내려진 영주의 명령이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백작 부인의 몸종에서 소영주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마음껏 스스로를 단련해도 되었다.

 

아니, 열심히 수련하는 것이 명령이었다. 노예각인마법을 이용하여 비밀 유지를 명령받고 코르보 백작가의 비전 연공술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소영주의 호위기사 역할을 하면서 강해질 기회를 얻었다.

 

다른 기사들의 텃세, 비아냥 및 조롱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련을 빙자한 구타와 괴롭힘도 괜찮았다.

 

그렇게 고역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수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버텨 낼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을 굳이 뽑아 보자면 스무 살이 넘은 시점에서 처음 시작한 마나 연공술의 진전이 한없이 느렸다는 점일까.

 

하지만 괜찮다. 조금 더딘들 어떠랴.

 

오늘을 노력하면, 내일의 나는 조금 더 강해진다.

 

그땐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소영주의 지시로 비밀이 유지되는 더러운 임무를 수행할 때 외에는 오로지 수련으로 점철된 일상이 이어졌다. 그간에 나는 꽤나 강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대전쟁이 발발했다.

 

내가 속한 영지 또한 그 전운을 피해 갈 순 없었고, 나는 소영주의 지휘를 따라 전쟁터로 향했다. 서른다섯이 된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어떤 신념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많은 피가 손에 묻었다.

 

가슴의 응어리는 죄책감이었을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근원 모를 응어리가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갈수록 반대로 나는 또 강해졌다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처럼, 적을 죽이면 죽일수록 내 이름은 유명해졌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

 

나에겐 노예기사라는, 조롱의 의도가 다분한 별칭도 붙었다.

 

혹 어떤 병사는 나를 악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저 검이 좋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 잠깐의 상념으로 시작된 회상이 이토록 길게 이어질 줄이야.

 

중요한 전투를 앞둔 전날.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를 신경 써야 할 이때에 밤을 지새우다니, 어쩌자고 이런 미련한 행동을 한 걸까.

 

아니, 외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확정된 죽음. 무의미하게 수면을 취하는 것보단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인가…….’

 

단 한 가지만 뺀다면 숙면을 취했을 때보다 개운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이것이 울화라는 것일까.

 

무언가 가슴에서 먹먹함이 느껴진다. 배 속에 몹시 무겁고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똬리를 튼 듯한 감각.

 

처음엔 무시해도 좋았을 그 텁텁함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확 하고 심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토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뱉어 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마음의 문제인가 싶어서 침대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둔 검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진정되길 바라는 의도였으나, 그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컥!”

 

기침에 피가 한 움큼이 딸려 나온다.

 

사태의 심각함에 당황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머릿속은 점차 백지장으로 화하고 있다.

 

그렇게 어느덧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검과 맞닿은 손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단어 그대로 검과 한 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존재에 대한 기준이 사라진 무의 영역이 찾아왔다.

 

영원할 것만 같던 황홀의 시간.

 

아쉽게도 그 끝은 금방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왔을 때, 깊은 여운, 상실감과 함께 내 손에 잡힌 검으로 오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오러 유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헌데.

 

‘왜 하필 지금……!’

 

거대한 진전을 앞두고 아쉬움이 먼저 앞섰다.

 

‘이 깨달음을 갈무리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기상나팔 소리가 황야를 울린다.

 

중요한 이권을 앞에 두고 분쟁을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행해진 3 대 3의 기사전.

 

나는 이제 그 기사전에 출전한다. 그리고 그 기사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0을 수렴한다.

 

상대 기사는 명인 반열에 오른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난 오러 마스터였고, 명실상부 상대 측 진영의 가장 강력한 패였으니까.

 

‘살아 돌아오진…… 못하겠지.’

 

내가 단지 버림패에 불과하다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평생 그 점을 명심하며 살았기에, 딱히 그 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일 뿐인 거니까.

 

‘이제 고작 두 시간 남짓이 남았나…….’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저 내게 남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지금 얻은 이 깨달음을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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