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2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2화
022. 보답
“나는 잠깐 어디 좀 다녀오마.”
안톤이 다시 별관으로 돌아온 이후.
온-누르는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르디가에 도착한 이래로, 그가 이렇게 말없이 사라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톤은 그의 목적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건물에 마련된 바깥 마루에 기대앉아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그러던 때였다.
익숙한 향기가 가을바람을 타고 안톤의 콧등을 간질였다.
주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안톤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 무복을 입은 여인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귓가로 정리하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린디아스 공녀님?”
그녀는 안톤이 앉아 있던 마루에 들고 온 옷가지를 살포시 내려놓고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이 옷은 다 뭡니까?”
“아까 비무에서 옷을 못 쓰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가져왔어요. 눈대중으로 본 거라 잘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아.”
안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의복이야 그녀가 직접 가져올 필요도 없다.
비록 오늘 옷 한 벌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예전에 처음 별관에 들었을 때 시녀가 몇 벌이나 되는 옷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톤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갈 곳을 잃은 시선을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로 고정시킬 뿐.
안톤도 린디아스도, 어째선지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상처는 어때요? 제대로 치료했어요?”
“네. 아까 스승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누르 공께서요? 어디요. 한 번 봐 봐요. 또 약도 제대로 안 바르고 붕대만 칭칭 감았죠?”
정곡을 찔려서인지 대답을 못 하는 안톤을 보며 린디아스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으이구.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자, 이리 와 봐요. 내가 이럴 줄 알고 약도 챙겨서 왔어요.”
“괜찮습니다.”
“덧나서 흉이라도 지면 어떡해요?”
‘흉터라……. 평생 그런 걸 신경 써 본 적은 없었는데. 그나저나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군.’
철부지 같기만 하던 그녀가 오늘은 유달리 성숙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안톤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 정말로. 정말 괜찮습니다. 이런 상처 정도야 익숙합니다.”
그런 꼿꼿한 모습이 서러웠을까.
린디아스가 언성을 높였다.
“이이!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럴 거예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해서. 결국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이제야 그녀답군.’
평소와 같은 모습에 안톤은 오히려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톤은 조심스레 겉옷을 벗어 내고 몸을 톨톨 감고 있는 붕대들마저 떼어 내려 했다.
“자, 가만히 있어 봐요. 내가 해 줄 테니까.”
결코 능숙하다고 하지는 못할 솜씨로, 린디아스는 안톤의 몸에 감긴 붕대를 걷어 냈다.
그리고.
“아…….”
안톤의 널따란 등에 빼곡히 각인된 노예 문신이 드러났다.
허나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린디아스가 이렇게 소리를 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입은 상처의 수십 배는 됨 직한 오래된 상처들이 그의 등에 흉이 져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니에요.”
린디아스는 준비해 온 외상약들을 상처에 얇게 펴서 바르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손놀림은 느리기만 했다.
그 둘 사이에 마땅한 화제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 탓인지 한참이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간간이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만이 들리던 때, 린디아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날 원망하진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날, 내가 당신을 따라가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잖아요.”
“아……. 그걸 신경 쓰고 있으셨습니까? 괜찮습니다. 결국 제가 힘이 부족했기에 그런 것이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저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무인들이란 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지녔나요?”
그녀의 울분 어린 목소리에 안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시 일말의 시간이 지나고, 조금 감정을 누그러트린 린디아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더 이상 수련하지 않으려고요.”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예요. 조르디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무인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겪은 일들로 그게 나랑은 안 맞는 걸 깨달았달까……. 아무튼 누르 공이나 안톤, 당신이 한 노력이 다 나 때문에 무의미해지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린디아스는 안톤이 뭐라 대답할 여지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 다 됐어요. 어때요, 훨씬 낫죠? 사실 저는 이런 쪽이 더 잘 어울리는 걸지도 몰라요. 아, 맞다. 그리고 이거.”
린디아스가 안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소우든의 글자가 가운데 큼지막하게 새겨진 은패였다.
무슨 물건인지 짐작도 못 하겠다는 듯, 안톤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례를 마치고 얻은 보영전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당신한테 양도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내게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까. 비록 삼주령을 한 번 사용해 천급이 아닌 지급의 보영전이지만…… 잘 찾아보면 당신에게 꼭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을지 몰라요.”
린디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툭툭 털었다.
“그럼…… 가 볼게요, 이제.”
안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자리를 뜨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내일 봐요.”
“내일…… 말씀이십니까?”
“소우든의 글자. 아직 제대로 못 배웠잖아요? 약속은 지켜야죠.”
조금 급하게 느껴질 수 있는 빠른 속도로 린디아스는 뒤돌아 떠났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안톤은 곧바로 자리에 앉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안톤은 방으로 돌아가 린디아스가 주고 간 옷을 입어 보았다.
곤색. 회색. 흰색.
여러 단색의 의복들은 화려한 수실 없이 수수하였지만, 이음새가 꼼꼼하고 천이 부드러웠다. 잘 지어진 옷 같았다.
“내가 그렇게 크게 보였나?”
옷은 조금 넉넉했다. 안톤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무래도 요긴하게 잘 입고 다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안톤은 린디아스에게 받은 은패를 온-누르에게 보여 줬다.
“음……. 공녀님이 보영전의 출입권을 양도했다고?”
잠깐 생각하던 온-누르가 애매한 눈짓으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가만 보아하니 입고 온 옷가지도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수련 중에 벗어 놓는 것도 그렇고…….”
그동안에 안톤은 항상 수련 시에 옷을 입고 있었다.
온-누르는 그것이 안톤이 노예 문신이 새겨진 상체를 가리려 하는 것이라 여겼고,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더냐?”
이럴 땐 참 눈치도 빠른 노인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제자와 스승은 한 몸이라고, 사소한 일이라도 빠짐없이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는 스승님은 어제 어디에 다녀오신 겁니까?”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느냐?”
온-누르의 집요한 물음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안톤은 재차 수련하는 것에 열중했다.
그런 꽁한 태도에 심심했는지 온-누르도 화제를 바꾸었다.
“지급 보영전이라…….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구나. 네 운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면 가서 큰 행운을 얻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네 검이 많이 낡았지?”
“알고 계시면 새로 하나 마련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한 몸 같은 제자인데.”
그렇게 잡다한 대화나 나누던 오전 중에 별관으로 한 방문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