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2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21화
021. 비무
‘작군.’
에스닌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안톤은 그녀를 쓱 훑어보았다.
적을 앞에 두고 기본적인 탐색을 하는 것은 오래된 그의 버릇이었다.
어떤 병장기도 소지하지 않고 비무에 나선 그녀의 허리춤에 위치한 두툼한 포대로 눈이 갔다.
‘연검을 사용하는 건가?’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대전쟁 당시, 안톤은 수많은 무인들과 전투를 나누었다.
그 속에 연검이라는 특이한 무기를 쓰는 상대도 있었다.
안톤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빠르고, 현란했지.’
대신 다른 무기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 약점이었는데, 에스닌은 안톤보다 윗 단계의 마나 유저였다.
‘힘으로 승부를 볼 수도 없겠군.’
그뿐만 아니라 린디아스처럼 실전이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워질 수도 있겠어.’
허나 안톤은 위축되지 않았다.
전생에서 자신보다 강한 무인을 상대해야 하는 일은 부기지수였다.
전쟁의 혼란은 안톤이 상대를 가릴 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안톤은 그 악바구니 속에서도 거의 막바지까지 살아남았다.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굳은 의지와, 매일같이 흘려 왔던 땀방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검이 어디까지 통할까 궁금하군.’
온-누르의 가르침으로 안톤의 검술은 더욱더 발전했다.
안톤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오러 마스터 클린턴 제오르와의 일전에서, 안톤은 검이 지닌 본연의 매력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회귀한 이후.
비록 자유라는 목표하에 불철주야로 수련을 하였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또 자신의 검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에스닌은 정말 오랜만에 겨루는, 제대로 된 상대였다.
듣기 좋은 울림으로, 안톤의 심장이 요동친다.
적절한 긴장감은 보다 유연한 방향으로 육체를 고조시킨다.
안톤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말도 안 되는 수련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한가.’
이러나저러나.
결국 안톤 역시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투가 아닌 결투.
그렇다고 선공을 양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형식상의 말을 던지고서 안톤은 곧바로 에스닌을 향해 뛰어들었다.
“천스럽긴.”
에스닌의 포대에서 뽑혀 나온 연검이 이를 가로막았다.
작은 체구, 강보다는 유와 변에 주력한 무기를 연마했다고 보기엔 그녀는 아주 공격적인 성향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안톤도 마찬가지였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결이 펼쳐졌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몸에 상처가 생기고 조금씩 피가 낭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 다 숙련된 무인이라는 것일까.
그중 누구도 통증에 신음을 내뱉거나 검을 주춤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도 특별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비무가 이어졌다.
“짜증 나게.”
에스닌이 코를 찡긋했다.
무언가 하려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생기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기공의 측면에서는 에스닌의 우세였지만, 지닌 무기의 한계 탓에 압도적인 우세는 아니었다. 여기까진 그러려니 하겠다.
그럼 이제 본위의 검술이 승패를 가늠해야 한다.
연검이라는 무기를 택한 에스닌은 날렵하고 다채로운 검술을 얻는 대신 강(强)을 포기했다.
지금까지는 이를 아쉽다 여긴 적도 없었고, 힘에서라면 모를까 이쪽에서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게 만든 상대도 없었다.
하지만 안톤은 어떤가.
힘도 자신보다 부족하면서 검술에서조차 끈질기게 그녀를 압박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게 그녀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안톤을 쉽게 생각했다는 점도 그 감정을 한껏 부추겼다.
점점 더 대결 구도는 저돌적이게 변했다.
“허…….”
비무라기엔 너무 과격하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감상이리라.
슬슬 그만두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참관한 장로들 중 몇몇이 옆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가장 높은 신분이며, 이 대결에도 가장 크게 관련된 슐츠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장로들도 어쩔 수 없이 노심초사하며 대결을 마저 지켜보았다.
고전하고 있는 것은 안톤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에스닌의 검은 뱀처럼 한없이 유연했지만, 필요할 땐 강철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허나 안톤을 정말로 곤란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선 저것부터 어떻게든 해야겠군.’
안톤은 나풀거리는 에스닌의 소매를 보았다.
손가락 끝까지 내려온 기다란 의상은 그녀의 손목을 완전히 가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매끄러운 연검에서 뻗어 나오는 극심한 변화들은 모두 그 손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손목의 움직임을 먼저 확인할 수 있으면 조금 더 상대하는 것이 요원해지리라.
그러한 판단을 내린 안톤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집요하리만치 에스닌의 손목에 집중했다.
몸과 달리 손은 노리기가 어려운 부위다.
하지만 안톤의 본목적은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손목을 드러나게 하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톤은 그 목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소매가 갈기갈기 찢겨 연한 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에스닌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안톤은 한결 수월하게 에스닌의 검을 막아 내고 피해 냈다.
중간중간 허점으로 공격을 찔러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로소 균형이 깨졌다는 것일까.
동수를 이루던 형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안톤의 우세였다.
“가주님.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레 말을 꺼낸 것은 눈치를 보던 장로들 중에서 가장 고참인 자였다.
슐츠의 표정은 비무가 시작되기 이전과 똑같았지만, 장로는 왠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한기를 느꼈다.
“그만.”
한창 전투에 몰입하던 그 둘에게까지 전해지기엔 그 소리가 너무 작았다.
안톤의 검이 에스닌의 목을 찔러 가던 때였다.
챙!
슐츠의 손에서 날아든 기파가 안톤의 검과 부딪쳤고, 안톤은 그에 이끌려 튕겨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검은 놓지 않았다.
“선생님의 제자의 실력은 잘 알겠으니,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지요.”
슐츠의 말에 에스닌이 반발했다.
“아버님!”
“가만히 있거라.”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어조.
에스닌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멋대로 비무 중에 난입하였음에도 슐츠는 안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다만 온-누르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그에게 다가갔다.
“넬의 무호에 관한 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슐츠 님은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군요.”
온-누르의 사족에도 슐츠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좌중을 한 번 훑으며 말했다.
“그럼 다들 이만 자리를 파하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에스닌, 너는 잠깐 남아 있거라.”
이날의 비무는 그런 맥 빠지는 결론을 지은 채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