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화
017. 검가
선택이 끝난 후.
조금 넉넉한 분위기 속에서 온-누르와 안톤은 한참이나 이야기를 했다.
삶을 정리하듯 온-누르는 그의 삶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고아로 태어나 지내던 길거리 생활.
벽에 붙은 공고를 보고 꿈을 갖고 조르디가에 발을 내디디며 처음 검을 잡게 된 기억.
재능을 보여 밀암무사로 선발되어 보냈던 20년의 세월.
그러다 현경의 경지에 이르고 검공이라는 무호를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의 시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친 그는 안톤에게도 과거를 물어 왔다.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정리하는 듯한 그 분위기에 취해, 안톤은 그만 모든 걸 고백할 뻔하였다.
안톤은 마음을 굳게 먹고 그동안 만들어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가 대역죄인이었고, 자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노예였다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부였다.
이것은 진실이었다. 다만, 이어진 이야기에 교묘하게 거짓을 섞었다.
여느 귀족 가문에 팔려 가, 그곳에서 비인도적인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마나에 입문한 것도 그 당시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어느 날, 영지전에 패배해 귀족가가 망했고 안톤의 존재는 극비였기에 그저 평범한 노예로 취급되며 검투사 양성소에 팔려 갔다. 그리고 이내 힘을 감추다 콜로세움에서 술주 전이 의식을 하는 중에 술주를 죽이고 탈출했다.
여기까지가 그가 만들어 낸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죄책감에 시달려 이야기 내내 온-누르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군.”
이야기가 끝나고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겠구나, 하는 위로의 말은 없었다.
이후 안톤은 온-누르가 알려 주는 절차를 따라 구배지례를 올렸고, 정식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만 쉬라는 말과 함께 온-누르는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과연 나는 멀쩡한 인간인가…….’
홀로 방에 남은 안톤은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을 배신했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믿지 못하겠으니까.
그가 보여 준 모든 것이 가짜일 수도 있으니까.
온-누르를 만난 지 이제 고작 두 달이 넘었다.
그 턱없이 부족한 시간 내에 한 사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었다. 누군가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톤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혹시 몰라…….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걸 알게 된다면…….’
물론 미래에 대한 정보만 얻고 안톤을 자유로이 풀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비밀의 유지를 위해 안톤을 구속하려 든다면, 혹은 해치려 든다면.
안톤은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어쩌면 딱 한 단어로 그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 불신.
‘나중에 이 각인에서 해방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그때는 안톤도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 *
하선한 그들 일행은 곧장 마차로 바꿔 타고 길을 따라 서쪽을 향해 달렸다.
배에서 내린 당일 날 하루를 노숙하고, 그다음 날 아침.
드디어 소문만 무성히 들었던 조르디가의 영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순례를 마친 둘째 공녀님이 돌아왔다!”
북부와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지어진 성벽을 지나쳐 들어가자 수많은 인파가 이들을 반겼다. 정확히 말해서는 린디아스 공녀를 반긴 것이었다.
꽃잎이 뿌려진 거리를 마차는 천천히 지나쳐 갔다.
그동안에도 사람들의 환성은 계속됐다.
안톤은 그걸 지켜보며 누군가 시킨 것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조르디가의 명망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 북부인이잖아?”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와 하얀 피부.
자신들과는 다른 안톤의 생김새가 신기했는지 그에게 관심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온-누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긴장하지 말거라.”
어차피 온-누르와 안톤은 공녀의 들러리 취급이었고, 주된 관심은 그녀였다.
이러나저러나 마차의 바퀴는 계속 굴러갔고, 이윽고 중심부에 위치한 내성에 도착했다.
‘나무?’
둘러싼 성벽은 석제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층을 몇 개나 만들어 쌓아 올린 성은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성에서는 그만의 고아한 멋과 풍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런 첫 감상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이제 내리자꾸나.”
일행은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벽 너머로 군중들의 웅성임이 들려오긴 했지만, 소란스러운 바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매가 풍성하고 길어서 손도 잘 보이지 않는 의상을 한 여인들이 다가왔다.
“무사히 순례를 마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아하니 시녀인 것 같았다.
일행은 그들의 안내를 따라 멋들어진 성채 안으로 들어갔다.
검과 갑옷, 마수의 사체나 조각상으로 성을 꾸미는 북부의 문화와는 다르게, 고유의 광택을 내는 도자기나 그림, 바닥에 깔린 천들은 확실히 머나먼 타국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층을 두 개나 올라서였다.
시녀들이 문을 옆으로 밀어서 열기 전까지, 안톤은 그게 문인 줄도 몰랐다.
아무튼 거대한 은색 호랑이가 그려진 문이 열리고 장내가 드러났다.
안쪽에는 십수 명의 인중이 제각기 얼마간의 간격을 둔 채로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왔느냐.”
척 봐도 상석인 듯 보이는, 홀로 몸을 문 쪽을 향한 채 앉아 있던 남자가 그 음성의 주인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버님.”
일행들은 신발을 벗고 자리로 들어섰다.
린디아스는 준비되어 있던 빈자리에 앉았고, 안톤과 온-누르는 그 뒤쪽에 섰다.
“상당히 애매한 때에 왔구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순례 중에 생긴 일행이더냐?”
린디아스와 온-누르.
그 둘을 제외한 모든 인영들의 시선이 따갑게 날아든다.
하나둘, 소리를 내뱉으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암검인 것 같고…… 그럼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순례 중에 만난 북부인인 것 같은데…… 어인 일로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설마 결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린디아스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웅성임이 들린 듯싶었다.
상석에 앉은 남자, 슐츠 조르디는 오른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그럼 내게 누군지 소개해 주겠느냐?”
“이 남자의 이름은 안톤이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츠레이바 왕국에서 만난 노예로…….”
그녀의 말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도중에 끊겼다.
“노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노예는 맞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
린디아스는 어떻게든 다시 설명을 해 주려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비천한 북부의 노예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고?”
주변의 인물들도 제각기 한 마디씩 내뱉으면서 장내는 시끄럽게 변했다.
그때였다.
평범하던 공기에 압중한 무게가 실렸다.
숨 쉬기가 불편한 것을 넘어 어려울 정도의 진한 압박감.
이 모든 것은 온-누르가 앞으로 일보를 내디디면서 파생된 일이었다.
“거참,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이렇게까지 뭐라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근데 뭐, 비천한 노예라고?”
꺼렁꺼렁한 그의 말이 장내를 울렸다.
장중의 인물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이에 압도되어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다들 제대로 귓구멍 열고 똑똑히 들으시오. 여기 이 안톤은 나 암검 온-누르의 제자요.”
그 한마디가 끝마쳐지는 순간부터 기묘한 정적이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