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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4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화

016. 소망

 

 

30일간의 운항 동안에 딱히 사건 사고는 없었다.

 

오전에는 온-누르에게 이론적인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셋이 함께 저녁을 먹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저 변한 것이라면, 린디아스 공녀에게 체스트를 알려 주는 대가로 소우든의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것 정도였다.

 

굳이 거래의 형식을 땄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냥 알려 달라고 하여도 알려 주었을 것이다.

 

물론 안톤도 눈치는 있었기에 그녀 앞에서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일타이피의 맥을 짚는 제안이었다.

 

소우든의 글자야 급한 것은 아니지만 익혀 두면 언젠가 쓸 곳이야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 린디아스와의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무척 좋은 편이었다.

 

안톤이 그녀보다 나은 점은 경험과 뼈대가 되는 전략 정도였고, 이를 채워 주니 실력이 쭉쭉 늘었다.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의 성과를 이룬 린디아스는 결국 어제부로 일전의 그 상인으로부터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어제 전 객실에 알림이 있었다.

 

내일 오후에 종착지인 카릇 부두에 도착한다는 알림이었다.

 

그와 함께 온-누르의 호출도 있었다.

 

“왔느냐.”

 

철컥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힌다.

 

묵묵히 앉아서 안톤을 기다리던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진중했다.

 

“예전에 내가 현경에 대한 설명을 하다 만 적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예. 도착하기 전에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약속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아마도 그날의 말을 이어 가려고 안톤을 불러낸 것 같았다.

 

“그때 설명을 하다가 만 것은 사실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 너는 화경의 무인이 다음 단계라는 현경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온-누르가 선실 벽에 위치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타부타 말들이 많지만…… 딱 잘라 말하건대, 현경에 오르는 데 요구되는 것은 기공의 완성이다.”

 

“기공의 완성이라 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딱 알겠구나. 그래,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이론상 화경을 이룬 무인은 검을 수련하지 않아도 현경에 도달할 수 있다.”

 

경지에 접어든 무인들이 밖에서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구석에 틀어박혀 기공에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며, 말하는 온-누르의 얼굴엔 자조 섞인 웃음이 묻어 있었다.

 

“온 사람들이 말하지, 현경의 경지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라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방법을 찾았지. 현경에 도달하는 조건이 기공의 완성이었으니, 그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선 검도의 완성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한 인물을 만나며 내 가설이 절반은 옳았음을 알았다. 그는 기공을 포기하고 검으로 극의에 오른 남자였다. 나는 그와 싸웠고, 그리고 무참히 패했다. 검강으로 뒤덮인 내 검을 두 동강 낸 것은 한 줌의 마나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었다.”

 

검으로 극의에 올랐다는 것도 평범한 철검이 오러를 갈랐다는 것도, 당장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벗어나는 이야기였다.

 

안톤은 당장에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온-누르의 표정이 심각했다.

 

“나는 그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바라던 가르침을 내려 주었지.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그 무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내가 지금껏 이룩한 기공을 전부 버려야만 했으니까.”

 

예전에 온-누르는 안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각성, 혹은 환골탈태는 초인이 되기 위해 피와 살을 바치고 빈자리를 마나로 대체하는, 반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과정이라고.

 

그런데 기공을 버린다라.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지, 안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온-누르는 혼잣말을 하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설령 기공을 포기한다 하여도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도 나는 기공을 포기하겠다 말했지. 허나 그는 결사적으로 말렸다. 내가 젊은 나이라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기공을 포기하는 건 자살행위라는 것이 이유였지.”

 

온-누르가 탁자 밑으로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검학을 내 손으로 정립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기에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흔히들 말하는 제자라는 이름을 통해서 내 이상을 만족시키려 한 것이지.”

 

이제야 슬슬 조금씩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순이 하나 있었다.

 

‘왜 나였지?’

 

안톤은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소위 말하는 천재들이 존재했고, 현경이라는 무위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런 제자를 찾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는 짓에 비하면 꽤나 눈치가 빠른 온-누르는 안톤이 그런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러 기재가 있었지만 내 검학을 받아들일 만한 녀석은 찾지 못했다. 조화를 중시하는 소우든의 검인들은 대개 어느 정도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다른 곳에서 적당한 녀석을 찾기로 했다. 조르디가의 순례자들을 후견하는 역을 맡은 것도 대륙을 돌아다니다 보면 만날 기회가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안톤은 이제 이야기의 끝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길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온-누르라는 무인이 아니라, 온-누르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벌써 세 번의 순례였고 너를 만났다, 안톤.”

 

온-누르의 시선이 한데 고정된다.

 

“다시 물으마. 내 제자가 되겠느냐?”

 

두 달 전, 그때의 물음과는 그 울림부터가 달랐다.

 

“대답을 듣기 전에 미리 말할 것이 있다. 아니, 선택할 것이라고 해야겠지.”

 

선택이라.

 

노예의 삶이 익숙한 안톤에게는 도무지 익숙해지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단어였다.

 

“나는 너를 나와 같은 방법으로 성장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기공을 배제하고 그 남자처럼 검에만 매달리도록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오로지 검술만으로 경지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온-누르는 안톤에게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지 않았었다.

 

아니, 본래 지니고 있던 마나 연공법조차 수련하지 못하게 했다.

 

안톤은 그 이유가 나중에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고 기공을 전수할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나 연공법을 수련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진심으로 검도로 극의에 오르고자 한다면, 그 뜻을 이루는 데 기공은 발목만 잡는다. 솔직히 말하겠다, 안톤. 나는 네가 썩 마음에 든다. 좀 전에 선택이라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기공을 전수하고 내 후계자로 성장시키겠다.”

 

후계자.

 

안톤은 온-누르의 신분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꽤나 높은 신분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억압받기만 하던 신분에서, 누군가를 부리는 위치로.

 

그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언젠가 안톤이 권력과 힘을 거머쥘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눈빛이구나. 나 역시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사람이 마음에 드는 건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그리고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선택해라. 기공을 택할 것인지, 검을 택할 것인지.”

 

확실한 길과 불확실한 길.

 

안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안톤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신중히 결정하라는 듯이 온-누르는 보채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생각을 정리한 안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10년 후 주겠다는 자유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자세히 말하자면 길어지겠구나. 간략히 설명하마. 검을 택하고 네가 경지에 접어든다면, 이 마법각인의 구속은 네 스스로 풀어낼 수 있을 게다. 극의에 이른 검은 무엇이든 베어 낼 수 있으니까.”

 

안톤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있자, 온-누르가 한 가지 첨언을 내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 내가 너에게 어떤 명령도 하지 않는다면, 이 마법각인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 거니까. 네가 어떤 걸 선택하든 나는 이런 마법적인 제약을 의지해 널 내 마음대로 부릴 생각은 없다.”

 

“결정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검을 택하면 후계자 지위에 대한 것은 사라지는 겁니까?”

 

귀족. 푸른 피의 권력자.

 

그 달콤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얼마만큼의 힘을 지녔는지. 노예로 살아온 안톤은 뼈에 사무치게 겪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아까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방해하는 것일 뿐.

 

정말로 안톤 본인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온-누르는 어떤 의도로 안톤이 이런 말을 하였는지 알아챘다.

 

껄껄.

 

온-누르는 호탕하게 웃었다.

 

한없이 가라앉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 내 자리를 이어받으면 얻는 것만큼이나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기겠지……. 네가 검을 택한다면 나는 네게 한 가지의 부탁을 끝으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마.”

 

“부탁이라면?”

 

“아까 말했던 그 남자를 찾아가 비무를 해 달라는 것이다. 이기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중에 그 결과를 내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결정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온-누르의 모습은 평소와 같이 차분했다.

 

하지만 안톤은 어째선지 그가 약간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택하겠습니다.”

 

안톤의 진실한 바람은, 검과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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