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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3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화

014. 여정

 

 

“본격적인 사제 관계를 맺는 것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하도록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노예라고 칭하기엔 뭣하고, 제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석연찮은 점이 남은 채 여정이 시작됐다.

 

일행은 벨토스 노예 검투사 양성소가 위치해 있던 남쪽의 펭 제국이 아닌, 동쪽의 레노테이르 왕국으로 가서 강을 타고 쭉 남하한다고 하였다.

 

그 여정에는 대략 두 달가량이 소요된다고 했고.

 

“아직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그 시간 동안 놀기만 하면 아깝지 않으냐.”

 

그렇게 온-누르의 가르침이 시작됐다.

 

가르침이라지만 결국 서로 검을 마주 들고 무작정 검을 섞어 대는 형식으로, 그 과정이 꽤나 과격했다.

 

치명상만 입히지 않을 뿐, 대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온-누르의 검은 가차 없었다.

 

그래도 대련이 끝나면 꼭 한 가지씩 첨언을 해 주었다.

 

사실 누군가, 그것도 까마득한 윗 경지의 무인이 검술을 지도해 준다는 것은 굉장히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검을 휘둘렀고, 궂은 실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실력을 키워야 했었으니까.

 

사막 한복판에서의 물 한 방울처럼, 도저히 혼자서는 채우지 못하는 갈증을 그가 채워 주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하나하나가 안톤에겐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안톤은 왜 소우든을 검의 종주국이라 칭송하는지에 대하여 절절히 이해했다.

 

검술보다는 마나 연공법을 훨씬 중요시 여기며 검술 자체는 실전에만 치중된 북부의 검술과는 다르게, 남부의 검술은 깊이가 있었다.

 

검술(劍術)이 아닌 검도(劍道).

 

남부의 검은 북부의 검과는 다르게 부드러웠고, 한 번의 휘두름에 여러 변화가 섞여 있었다.

 

실용과 무론의 중립선이라고 할까.

 

안톤이 그토록 추구하던 것들이 남부의 검에는 잔뜩 담겨 있었다.

 

그렇게 안톤은 매일 밤에는 혹사당하고 낮에는 너절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여정을 따라 나가는, 조금은 가혹할 수도 있는 행보가 시작됐다.

 

여정 내내 거의 말을 섞지 않고 쌀쌀맞은 태도를 고수한 린디아스마저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가는 안톤을 조금 가엾게 여길 정도였다.

 

레노테이르 왕국의 국경을 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톤의 사정은 나아졌다.

 

소우든으로 향하는 상선에 올라타고선 그런 과격한 수업은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내용이란 검술과 기공에 대한 이론이었다.

 

“보자니 북부인들은 기초적인 개념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한 부분이 없잖아 있더구나. 오늘은 그런 개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다. 이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진한 한숨과 함께 온-누르의 수업이 시작됐다.

 

“북부인들은 화경의 경지를 오러 유저라 하고, 현경의 경지를 오러 마스터라 구분하더구나. 물론 완전하게 똑같은 개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검강의 발현 여부에 따라서 경지를 구분한다는 건 같았다.”

 

안톤도 그 화경이란 경지에 이른 경험이 있었다.

 

단 하루뿐이었던, 화경의 극초입부라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하게 오러를 발현시켰다.

 

물론 그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져 불안정하고 마나가 부족해 오래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아무튼 그 경지에 오른 것은 오른 것이다.

 

“남부의 체계적으로 정립된 무학과는 달리 북부인들은 참 주먹구구식으로 수련하더구나. 그리고 운 좋게 경지에 접어들면 그 과정을 깡그리 묶어 깨달음이라고 얼버무리지. 얼마나 미련한 녀석들인지. 쯧쯧.”

 

온-누르의 일침을 들으며 북부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안톤은 내심 속으로 찔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화경에 접어들 수 있느냐. 바로 기공과 검술의 조화다. 그렇기에 화할 화(和) 자를 써서 화경이라 칭하는 것이지.”

 

그는 직접 종이에 글을 써서 보여 주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안톤은 소우든의 글자를 읽지도 못했다.

 

아마 익힌다 하여도 한 세월은 걸릴 것이다.

 

“검술이 암만 뛰어난들 기공이 부족하면 검강을 발현시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이 두 가지 모두 어느 경지를 넘겼을 때야 비로소 검강, 즉 북부인들이 말하는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톤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충분했지만 마나 연공이 부진하여서 벽을 넘지 못했었다.

 

그러다 결국 전생의 마지막 날.

 

회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마나 연공에서 큰 진전이 있었고, 이에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추어지면서 오러 유저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러 마스터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어진 말에서 그 나머지 궁금증이 풀렸다.

 

“오러 마스터. 즉 현경에 이른 무인들에 대한 구분은 간단하다. 북부인들이 말하는 각성. 즉 환골탈태를 겪었느냐다.”

 

뱀이 탈피하여 새 껍질을 얻는 것처럼, 무인들 역시 극의에 이르면 이 비슷한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새로운 피부. 새로운 이빨. 새로운 모발.

 

그렇게 얻은 새 육신은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게 되고 이후에 노화도 천천히 진행된다.

 

효능은 그뿐만 아니다.

 

마나 로드와 마나 홀. 즉 기혈과 단전 또한 넓어져서 마나에 대한 제약을 완전히 벗어 낸다.

 

단어 그대로 진정 초인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만인지적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현경에는 어떻게 오르느냐.”

 

활짝 귀를 연 안톤의 시선이 그의 입가에 틀어박힌다.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는 안톤이 조금은 우스웠던 것일까.

 

온-누르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나중에 알려 주도록 하마. 음…… 소우든에 도착하기 전날이 좋을까.”

 

오늘의 수업은 그렇게 애매한 결말로 끝이 났다.

 

 

* * *

 

철컥.

 

온-누르가 방을 나가고, 안톤은 상념에 잠겼다.

 

그가 올랐던 최고의 경지는 화경이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검을 잡았고, 스물이 되어서야 마나에 처음으로 입문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그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

 

“현경……. 마스터의 경지라…….”

 

대륙 전역을 전란으로 물들였던 대전쟁 당시.

 

전생의 안톤은 수많은 전장을 헤치며 그 경지에 오른 명인들을 몇 번 만나 본 적 있었다. 한 번은 직접 검을 나누기도 했고.

 

‘모두 하나같이 괴물들뿐이었지.’

 

그런데 그들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라니.

 

비록 이론뿐일지라도, 한 사람의 무인 된 자로서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까마득한 경지이지만, 무학의 가르침을 주는 이가 무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그렇게까지 허황된 얘기는 아닐 거다.

 

누군가 이를 본다면 분에 넘치는 기회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안톤은 외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이라……. 이걸 잘되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전생의 40년과 회귀하고 나서의 3년.

 

도합 43년을 살아왔지만, 이는 모두 정상적인 삶이 아니었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먼저 자각하고 있다.

 

어디까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인지.

 

이 사람의 정확한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 선이 너무나 불분명하였기에, 인간관계에 특히나 취약한 안톤은 혼란스러웠다.

 

‘암검 온-누르…….’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이 노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어느 때처럼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의 실력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 남부에 위치한 소우든 또한 대전쟁의 여파에선 비켜 나가지 못했으니까.

 

당시 마스터를 둘이나 끌고 참전한 조르디가의 활약은 대단했다.

 

북부에서 전쟁을 치르던 안톤의 귀에까지 그 명성이 들려왔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 속에 온-누르라는 이름은 없었다.

 

‘분명 조르디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 같기는 한데.’

 

온-누르는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았기에 한 달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안톤은 그의 정확한 신분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 이를 설명해 줄지도 모르는 린디아스 공녀와는 애초에 말을 섞을 기회조차 별로 없었고.

 

‘도착하면 차차 알게 되겠지.’

 

지나치는 시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자신은 그 과정 속에서 무엇도 알 수 없고, 무엇도 본인의 의지대로 할 수가 없다.

 

명확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은 꽤나 답답한 것이었다.

 

‘바람이나 쐬어야겠군.’

 

안톤은 선실을 밖으로 나가서 상선의 갑판으로 향했다.

 

물비린내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코를 통해 느껴진다.

 

시간은 정오.

 

상선에 속한 인부부터, 객실을 이용하는 승객들까지, 넓은 갑판 위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인부들은 본연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승객들은 그 틈에서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거나 홀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안톤은 무리에 속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난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 멀리 강가의 끝으로 보이는 육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기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 무리들이 보였다.

 

나룻배를 이끌고 강을 횡단하는 사공도 있었다.

 

‘세상은 참 넓군.’

 

어여쁜 자식에 대한 고민과 생계에 대한 걱정.

 

고된 하루지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과 기쁨.

 

안톤이 평생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들을 그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선실로 돌아갈까…….’

 

기분을 전환하려 했는데, 더욱 갑갑해지고 말았다.

 

돌아가기로 결정하고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안톤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한 인물이 확 띄었다.

 

‘넬-린디아스 공녀?’

 

상인 무리에 속하여 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흑발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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